검은 피부, 하얀 가면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8
프란츠 파농 지음, 노서경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랑스어 원전 번역이라고 광고하는데, 번역 안 좋습니다. 

일단, 문학동네판의 미덕은 서양사전공 번역자의 인명 등 고유명에 관한 꼼꼼한 주석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충실한 해제에 있어요.

하지만 파농의 사상적 기반인 사르트르(헤겔)과 프로이트(정신분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보입니다.

대표적으로 existence를 어떤 때는 존재로, 어떤 때는 실존으로 옮겼는데(제 눈에는 별다른 기준이 없어보이고), 특히 5장, 7장, 결론처럼 헤겔과 사르트르의 논의를 바탕으로 변증법, 주인, 노예, 인정이 주된 테마로 등장하는 장에서 이해를 방해하는 수준입니다.

번역 오류를 전부 지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몇가지만 지적해보면...

14쪽 중간 : 이에 바쳐진 분석은 유난히 퇴행적이다.
-> 파농이 자신의 분석방법을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설마 자신의 방법론을 가리켜 퇴행적이라고 말했을까요?
regressives(원서 10쪽)는 '퇴행적'이 아니라, 역진적, 역행적, 후진적, 아니면 결과에서 원인으로 거슬러올라가는 형태... 정도의 가치상 중립적인 용어로 번역하는 게 낫겠습니다.

15쪽 중간 : 이 차이, 이 몰이해, 이 부조화를 발전시켜 인간애란 진정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 교육받은 흑인은 자신의 인종과 거리두기를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는 내용입니다.
즉,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문장인데, 이 책에서는 정반대로 이 흑인을 인류애를 깨달은 사람처럼 옮겨 놓았네요.
이 차이, 이 몰이해, 이 부조화를 발전시키면서 자신의 진정한 인간성(의 의미)를 발견한다. 정도?

79쪽 중간 :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부끄러워하게 만든다, 라고 장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존existence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장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가 낫겠네요. '만드는'의 주어는 사르트르입니다.

6장에, le reel 을 실재계라고 번역하신 부분이 몇 군데 있던데...
파농이 라캉을 인용한 부분이 있는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이마고와 관련해서이고... 그 출처도 1938년 프랑스 백과사전 '가족' 항목입니다.
21세기의 독자인 우리에게 친숙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라캉을 분석에 적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재계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보여요.

예컨대,
170쪽 중간 : 소녀는 질적인 관점으로만 실재계를 파악한다.
-> 실재계를 파악한다[이해한다]니? 정말 이상한 문장이 되어버리잖아요...
그리고 이 부분은 (라깡이 아닌) 프로이트의 여성의 섹슈얼리티 개념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수준(음핵, 질, 성감)에서 논하는 중인데 말이죠.

이런 오해를 빚을 수 있기 때문에, 2008년에 출간된 영어판에는 le reel을 the real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reality라고 옮긴 것 같습니다. (각각 불어144, 영어 137쪽)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새로 나왔다길래, 그것도 문학동네길래, 기대에 찬 마음으로 사봤는데, 실망입니다.

파농이 심오한 사상가인 것은 맞지만, 많은 한국어 독자들이 좋지 않은 번역문을 심오한 문장으로 착각하면서 읽고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 참고로 저는 2003년에 찍은 인간사랑판도 가지고 있는데, 그 책도 번역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2013년 개정판은 책이 없어서 확인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로 파농을 한번 읽어보자고 똑같은 제목의 책을 3권씩이나 사는 게 맞는 일일까요? (사실 1978년도 김남주판도 있음ㅠ.ㅠ 물론 김남주판은 제목이 다르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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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2018-06-13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농으로 가는 길은 너무 머네요ㅠㅠ 푸에르토리코에서 크루즈를 타면 소안틸레스 제도의 섬들을 잠깐씩 방문해볼 수 있습니다. 비싸지도 않아요. 그렇게 한번 다녀오는 게 더 빠를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