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거 조합에 소속된 평범한 인력거꾼들의 삶은 고관대작의 인력거를 끄는 인력거꾼의 삶과는 달랐다. 인력거 조합에 소속된 보통 인력거꾼들의 일상은 척박했다. 더욱이 인력거는 매우 비싼 물건이어서 눈독을 들이는 도둑들이 있었고 이따금 인력거를 도둑맞는 일이 생기면 회사의 ‘재산’을 잃어버린 인력거꾼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렇지만 인력거꾼들의 가엾고 비참한 삶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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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병문 좌편 쪽에 인력거꾼 삼삼오오 대오를 지어 지껄이는 수작 가관일세. 한 작자 하는 말이, 오늘 아침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여편네 속곳 전당 잡히고 팥죽 두 그릇 사다가 조반으로 에워 먹고 나왔다네. 돈도 요사이에는 어찌도 바싹 말랐는지. (중략) 인력거야 하는 소리 전혀 없데. 저녁은 무엇을 먹고 살잔 말인가. 우선 여편네 보기 부끄러워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간들 무엇이라고 말하나.
― “인력거꾼 수작”, 〈서북학회월보〉, 19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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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한정되어 있었고, 지금의 대중교통 같은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1900년대 인력거꾼들의 삶에는 힘들다고 해서, 또 ‘최저 생계비’에 못 미치는 벌이를 하고 있다고 해서 정부가 지원해주는 보조금도 없었고 그렇다고 회사가 자신들의 ‘이윤’을 줄여가며 고용된 인력거꾼들의 생계에 보탬을 주지도 않았다. 회사는 자신들의 이익을 불리느라 바빴고, 노사 간 ‘상생’이란 말은 그 어떤 사전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인심이 그들의 처지를 위무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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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일에 가로 상에서 인력거꾼과 막벌이꾼들이 여름의 곤뇌(困惱, 가난 따위에 시달려 고달픔―인용자)를 이기지 못하여 낮잠을 자다가 순사에게 발로 차이고 뺨도 맞으며 군도 등으로 얻어맞았다. 이에 놀라서 병이 됐다고 칭원(稱冤, 원통함을 이야기 함―인용자)한 자가 있다. 이것은 맞아서 병든 것이 아니라 잠병이 든 것이니 때려서 깨워주는 것은 도리어 고마운 일이라. 독한 약이 입에는 써도 병에는 이로우니 남을 칭원 말고 내 몸을 칭원하시라. 행로인(行路人).
―“투서”, 〈대한매일신보〉, 1909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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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거꾼도 노동자고, 막벌이꾼도 노동자다. 이들이 과연 한여름의 무더위 때문에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일까. 1900년대는 ‘개화·계몽’의 시대였다. 인민들의 몸과 마음을 모두 서구식이자 근대적인 표준에 맞춰 ‘개조’하려는 움직임이 대세인 시대였던 것이다. 계몽 지식인들은 조선인들의 가장 큰 ‘병폐’ 중에 하나가 ‘게으름’이라고 생각했다. 게으름의 척결이야말로 쓰러져가는 조선을 ‘문명부강(文明富强)’한 나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계몽 지식인들은 믿었다. 그런 시대였으니 대낮에 한가롭게 낮잠을 자는 최하층 인민들의 모습이 좋게 보였을 리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게으름’도 ‘무지’도 아닌 다른 데 있었다. 힘겨운 일상, 열심히 일해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의 ‘일급’, 그나마도 일거리가 없으면 하는 수 없이 주린 배를 끌어안고 지친 삶의 피난처인 잠 속으로나 빠져들 수밖에.

이는 1900년대의 상황만은 아니었다. 인력거의 전성기였던 192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923년 인력거는 총 4,600여 대였다. 자가용 인력거도 증가했다. 1924년 자가용 인력거는 1,500여 대였다. 경성 시내에서 운행된 영업용 인력거와 자가용 인력거 수는 총 1,997대였다. 가히 인력거의 전성시대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인력거꾼의 삶은 1900년대 초반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개벽〉, 1924년 6월)의 인력거꾼 ‘김 첨지’를 기억하는가. 한 집안의 가장인 김 첨지의 삶은 너무나 비참했다. 열흘 동안 한 푼도 벌지 못한 김 첨지와 그의 아내는 겨우 조밥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간다. 세 살배기 개똥이는 어미의 젖을 힘껏 빨아보지만 젖이 잘 나올 리 만무하고, 달포가 넘게 콜록거리는 아내에게는 약 한 첩 써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인력거를 끌고 나간 김 첨지는 아침 댓바람부터 저녁까지 30원이라는 거금을 번다. 설렁탕 국물이 먹고 싶다는 아내에게 ‘오라질 년’이라 욕하며 뺨을 갈기고 나오고서도, 막상 돈이 생기니 병석에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과 아내가 그렇게 먹고 싶다던 설렁탕 생각이 났다. 김 첨지는 횡재한 김에 술도 한 잔 걸친다. 얼큰하게 취한 김 첨지는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사서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김 첨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은 아내와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빨고 또 빠는 개똥이 뿐이다. 김 첨지에겐 억세게 ‘운수 좋은 날’이 또한 억세게 ‘운수 옴 붙은 날’이었던 것이다. 현진건은 김 첨지를 통해 1920년대 인력거꾼, 더 넓게는 최하층 빈민의 전형적인 삶을 묘파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