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 문학과지성 시인선 164
박용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7월
평점 :
절판


영화 '챔피언'에서 주인공은 무작정 자신의 두 팔을 믿는다. 팔이 셋 있는 사람은 없으니...권투라는 시합은 정말 공평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영화속 주인공의 대사를 듣다가 울컥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영악해져버린 나는(또는 다른 사람들은) 팔이 셋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니까.

이 시집을 읽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진다. 내 대신 세상을 향해 덤비는 시인의 주먹질이 보이는 듯 하기 때문이다. 김정란 시인은 그래서인지 박용하 시인을 '돈키호테'라고 지칭했다.

내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러닝과 팬티를 가린 옷이 전부였다.
그리고 책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살아 남는 일이
부질없는 비, 봄의 끝에 내리는 비 같았다.
2년 만에 서울아,
몸이 메마른 걸레 같다.
단 2년 만에 서울아,
정신이 딱딱 굳은 찐빵같다.
[그러나 서울에 비가 내렸다.] 중

이 시를 읽으며, 서울에서의 몇개월 안되는 자취생활 중에 지친 내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듯 했다. 우리가 소리내어 외치고 싶은 것들, 터뜨리고 싶은 분노를 시인이 우리 앞에 서서 소리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격하게 하는 시가 박용하의 전부는 아니었다. [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은 그의 섬세하고 화려한 감수성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바람이 알맞게 불고 봄 저녁이었고
포구에는 배가 불빛에 지치고 있었다
자작나무 숲 너머 사람들이 아름다운 저녁이 있고
그 숲을 지나 지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있는 자전거가 아름다운 날이다
나는 바다로 가는 길 위에 있고
그대는 내가 가는 길 끝에 있다
나는 그 길을 가장 낮은 천국으로 가는 첫번째 길이라고 불렀다.

폭발적이면서도 아름다운...미칠듯한 격정을 지니고 있는 이 시집은 갑갑한 서울 생활의 갈증을 느낄 때 꼭 어울리는 책이다. 제목처럼 바다로 가고 싶어질 때...확 트인 넓은 하늘과 땅을 우러러 보며 행복해지고 싶어질 때...몸안의 묵은 때를 확 벗어 던지고 싶을 때...이 시집을 펼쳐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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