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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
김종윤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00년 2월
평점 :
절판
통째로 뒤집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가려진 진실을 파헤쳐 놓으신 내용과 그 노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서문을 직접 워드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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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
김종윤 지음.
초판1쇄발행일 2000년2월29일
책이있는마을 발행
책머리에
서세동점을 알면 백년전 조선이 보인다
1997년 가을, 필자는 『고대조선사(古代朝鮮史)와 근조강역연구(近朝彊域硏究)』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이 책은 먼저 고대조선의 강역을 서술하고 이어 근세조선의 강역을 밝힘으로써 우리 민족의 활동공간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 왔던 상식처럼 현재의 한반도가 아닌 대륙 中原중원 전역임을 밝혔다.
요컨대 우리 민족이야말로 中朝중조(중국)의 나라, 즉 지금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큰 틀의 문화민족이요 유구한 역사민족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임진왜란 등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굵직굵직한 대형사건들도 일일이 열거하며, 그것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 '대륙의 사건'임을 분명히 했다.
사실 필자의 이러한 연구는 필수적으로 '지명地名 고찰'이라는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어차피 난해한 문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필자의 기우였는지, 책이 발간된 뒤로 문의를 해오거나 필자의 연구실로 직접 찾아오는 독자가 꽤나 되었다. 그들은 역사학을 전공했거나 공부를 하고 있던 사람들도 아닌 평범한 사회인들로서, 우리의 뿌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맥史脈이나 정황을 살피다 보면 한결같이 강역彊域(또는 지명)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허다할 뿐만 아니라, 보학譜學(족보)에서도 윗대로 거슬러올라가면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정황'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의아했다고 한다. 그들이 필자에게 던진 질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어떻게 해서 대륙에 있던 조선이 한반도로 편입·이식되었는가?
이 땅의 많은 유물과 유적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씨족사인 족보는 믿을 수 있는 것인가?
각종 조상의 문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등등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 여기에 이르자 필자는 손에 잡히는 역사를 써보고 싶었다.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의 '역사'라는 것이 이 땅에 너무도 잘 짜맞추어져 있어, 그것을 허무는 일이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역사를 공부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그것을 다만 '지금·현재'라는 관점에서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다. 예컨대 6·25전쟁 직후 궁핍했던 시절을 오늘날 세대에게 아무리 설명해 보았자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이 태반이었다'고 하면, '왜 라면이라도 끓여먹지 않았는냐?'고 하는 식이니 말이다.
바로 이럴 때에 자칫 역사는 우매한 자들을 위해 만들어지기 쉽다. 일찍이 카(E.H.Carr)가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역사는 인간세계의 생성원리를 가르치고 철학과 문화라는 것도 낳지만 때에 따라서는 치명적인 독소도 품고 있는 것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오는 1세기 동안 서구세계의 기적 같은 문명의 발전은 인류가 지난 1만년 동안 이루어 놓은 것보다도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16~17세기 영국의 석탄산업을 중심으로 한 관련산업의 획기적인 산업혁명(제1차 산업혁명)은 면공업으로 이어져 의류혁명을 가져오고 잇달은 기계의 발명은 방적공업의 혁신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토머스 와트(Tomas Watt,1736~1819)의 증기기관 발명은 각 산업에 파급되어 이 동력을 모체로 유사 이래 전무후무한 제2차 산업혁명을 도래케 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동력의 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화'에 의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으로써 부의 극심한 편중, 잉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적 병폐의 초기단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세계자본제국주의의 팽창을 가져와 이들의 패권과 이데올로기 경쟁이 지구 곳곳을 약육강식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버렸다.
다시 말해 산업혁명에 의한 독점대량생산이 자국내의 수요를 훨씬 초과하게 되자, 그 막강한 경제력의 배출구 겸 소비시장으로서 해외 식민지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또 새로운 식민지 건설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 쟁탈전에 앞장선 것이 영국·프랑스·포르투갈·네덜란드 등 서구 열강이다. 그 중에서도 영국은 선두주자로서 일찍이 일곱바다에 군림했던 '대영제국'의 깃발아래 호주·뉴질랜드·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명실공히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 지난 1979년까지만 해도 영국은 전세계에 42개의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지 않은가!
사실 영국은 처음 네덜란드와 함께 16세기 후반 뉴욕을 점거하면서 미 대륙 개척의 꿈을 가졌으나 미국의 급격한 성장에 의해 포기하고 대신 아프리카와 중동지방을 겨냥해 왔다. 그후 두 차례에 걸친 산업혁명으로 영국은 비약적인 경제력의 성장을 가져왔고, 이러한 산업혁명의 영향은 오스트리아·독일·이탈리아·러시아 등 주변 유럽젝구에도 파급되어 새로운 열강의 한 축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 후 세계는 영국을 중심으로 이들 신흥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장이 되고 만 것이다. 지구 곳곳이 이들에 의해 모조리 분할되었고, 열강의 구도가 바뀔 때마다 강역의 분할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유사이래 인류가 체험한 가장 큰 변란이라는 제1차세계대전이다.각 대륙에 산재해 있던 각국의 영토는 영토 따로, 민족은 민족따로, 타의에 의한 이합집산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겪어야 했고, 그것은 1939년에 이르러 제2차 세계대전으로 더욱 처절하게 전개되었다. '말을 타면 장가 가고 싶다던가!', 당초 대량생산의 소비시장으로서 식민지 건설이 목표였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영토 찬탈로 이어진 것이다. 1765년 영국은 인도의 벵골에 영유권을 확보했다가 1858년에 와서는 직접통치로 들어갔고,네덜란드가 점령한 인도네시아는 1814년 영국과 프랑스의 쟁탈장이 되었으며,프랑스는 1858년 다낭을 거점으로 삼았다가 결국 베트남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또 말레이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가 1786년 영국에 되빼앗기게 되었으며,태국은 1855년 보링조약이라는 강권에 눌려 영국과 프랑스에게 치외법권으로 내주었고,프랑스의 보호국이던 캄보디아(캄푸차)는 1863년 인도차이나가 프랑스로 넘어가면서 자동으로 식민지가 되었고,파키스탄 역시 1850년 인도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영국령이 된 것은 모두 열강들의 '보호령'이라는 미명 아래 영토를 찬탈한 것이었다.
이들 열강들의 관심은 아시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아시아의 황무지, 서쪽의 광활한 투르크(Turk)땅으로 들어가 풀어놓은 망아지 떼처럼 이리저리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마음대로 선을 긋고 말뚝을 박고 다녔다. 지금 카자흐스탄·키르키스탄·우즈베키스탄·타자키스탄·투르크스탄 등이 모두 이때 열강들에 의해 그어진 것이다. 후에 러시아가 다시 강대해지면서 이곳 중앙아시아의 대부분 땅은 러시아의 영역권으로 편입되었다가 지금은 분리독립되고 있으나,170여개에 달하는 현재의 지구상 국가들은 태반이 19세기 열강들의 강제점령에 의해 분할되었던 땅이다.
투르크의 분할이 끝나자 이번에는 '아시아의 병든 대국'이었던 대륙의 분할이 마지막 목표가 되었다. 이때는 미국도 열강에 끼어들어 그들의 신식무기인 대포를 쏘아대며 아시아의 해양에 군함을 배치해 놓고 양자강揚子江(장강)등 수많은 물줄기를 통해 들어와 조선의 요새에 굉음을 울렸던 것이다.
이 시기를 우리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말로 쓰고 있다. 인류의 오랜 여정속에 너무도 혹독한 변란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서구세력에 의해 고요하던 동방의 땅에 포성이 울리고, 왕조가 무너지고, 곳곳의 땅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인종들이 들어와 '자기네들 땅(租借地)'이라 하여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니 백성들은 갈피를 못 잡고 울부짖게 되었다.
이때 조선의 조정에서는 태평천국의 소용돌이와 애로우(Arrow)호사건('제2의 아편전쟁'이라고도 함)에 자극을 받아 쇄국을 버리고 근대화를 이룩하자는 이른바 '중체서용中體西用'즉, 서양의 과학문명을 도입해서 부국강병을 일으키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이렇듯 내부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즈음, '운양호雲揚號'라는 일본군함이 강화도로 들어오고(1875년) 다음해에는 다시 이곳에서 '수호조약'이라는 이상한 조약이 이루어져 조선정부는 12개항으로 된 문서에 두말 없이 도장을 찍는다.
새삼스레 이때 이루어진 12개항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순간부터 조선의 주권은 사라지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일본의 화폐는 조선 내에서 자유로이 통용되어야 했으며, 일본의 물품은 관세가 면제되고, 제포濟浦, 감포 浦,염포鹽浦등 절강浙江 지방항구는 일본상인이 마음놓고 드나들 수 있도록 열어놓아야 함은 물론 그들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지역은 조차지로 내주어야 했다.
기록상으로는 1910년 8월 조선조정이 막을 내린 것으로 서술되고 있으나, 1876년2월 조선의 실체는 숨을 거둔 것이다.
조선의 식민권이 한 발 앞서 일본에게 넘어가자 서구 열강들은 이를 놓칠세라 물밀 듯이 조선 강역으로 들이닥쳤다. 영국·프랑스·미국·이탈리아·독일·러시아 등이 조선땅에 와서는 일본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라고 윽박지른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1894년 조선이 쓰러지자 청나라마저 조선 강역을 탐내 발을 디밀었다. 청일전쟁이 그것이다.결국 마지막까지 조선을 놓고 판을 벌인 것은 일본·영국·청, 이 세 나라라고 압축해 말할 수 있다. 여타의 열강들은 조차지로 무마하고 셋이서 대륙을 나누어 먹어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찬란한 문화민족을 하루아침에 잘라 없앤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기서 그들 식민주의자들이 착안한 것이 '조선을 다른 땅에다 옮겨주자'는 것이었다.
조선이 오늘날 한반도에 이식되면서 대륙 땅에서는 민중봉기의 연속이었다. 갑오경장(중국에서는 '갑오웅혼甲午雄魂'이라 함)이 그러하고, 동학난이 그러할 뿐 아니라, 도처에서 일어난 독립운동들이 모두 그래서 일어난 것이다. 지금은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중국사에 편입되어 있으나, 여원홍·손문·원세개 등이 일으킨 신해혁명도 사실 처음에는 '조선 부활'이 주목적이었다.
어쨌든 일본도 서구열강도 민족의 대봉기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중국(중화민국)으로 옷을 갈아입었으며, 한반도에 조선이 이식됨과 때를 같이하여 중국도 새로운 민족, 새로운 나라로 변신을 도모했던 것이다.
서세동점을 설명하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아시아 대륙, 그것도 조선 강역 침투를 설명하려면 광주廣州(廣東省)에서 일어난 아편전쟁(1840~1842)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전쟁은 영국이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차려 거점으로 삼고 상인들로 하여금 아편을 공급하자 당황한 조선정부에서 금지조치를 내린 것이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이것을 역사는 청국과 영국간의 대립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사실 그때까지는 조선의 맥박이 살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조선이 소멸된 후 조선 땅에는 '대한제국'으로 부활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지만(1897년) 모두가 일장춘몽이었고, 한반도에서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쥐도새도 모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해온 일본은 대륙 남방을 내어주고 '열도'라는 새로운 황무지를 개척하는 한편, 스스로의 역사를 정비함과 동시에 한반도로 이식된 조선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일본의 역사라는 것은 그 실체가 없었다. '일본'이라는 국가개념이 시작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 단행된 메이지(明治)유신, 즉 그 이전 에도(江戶)막부幕府 시대를 청산함으로써 왜倭의 무리를 정비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근대적인 통일국가로 발돋움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영유하고 나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막대한 규모의 토목공사와 역사 이전작업이었다. 토목공사가 앞서야 했던 까닭은 '만주'라는 주인 없는 땅을 소유하는 데는 자원수송과 인력송출에 절대적으로 용이한 철도의 부설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역사 이전작업은 보다 직접적인 총독부 사업이었다. 총독부 직속으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라는 것을 두고 대륙조선에서 가져온 사서史書, 이를테면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서 및 각종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 지리지地理志등을 바로잡는다는 구실 아래 한반도의 지명을 전고典故(典例와 故史)에 의해 꿰맞춰 놓고 사서에 고쳐서 써넣는 이른바 '교열校閱'을 하여 '중간重刊'이라는 이름으로 찍어낸 것이다.
이 총독부 안에는 또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라는 것도 있었다. 문집류나 씨족사 등 역사서는 아니나 그 전고가 밝혀져서는 안될 문헌은 역시 이곳에서 '교열'과 '중간'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하였다. 지금 우리가 원서니 원전이니 하는 책들이나, 규장각에 있는 대개의 책들은 모두 이런 절차를 거친 것들이다.'교열'과정에서 한반도에 전혀 배치되는 부분은 완전히 지워버리거나 땜질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륙의 팔역八域이 한반도에 들어갈 수 없는 부분은 모조리 삭제(『세종실록지리지』의 경우)해 버렸다. 특히 지명의 경우는 '원原'을 '주州'로 바꾸고, '주州'를 '천川'으로, '천川'을 '성城'으로 바꾸어 후대인들이 전혀 알아볼 수 없게 했다. 심지어 '경도京都'니 '경사京師'니 하는 것들은 원元이나 명明의 수도라고 짐짓 주석까지 달아놓았던 것이다!
그들의 역사왜곡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20년대에 와서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와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라는 것을 만들고는 세종 때의 정음正音만을 떼어내 그것을 이땅의 글이라 가르쳤다. '가갸거겨'와 'ㅏㅑㅓㅕ', 이것을 조선문학이라 해서 조선의 역사와 얼과 정신을 어문語文에서 가로챘던 것이다.
대륙의 朝鮮史脈과 한반도의 朝鮮國은 이렇게 해서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일제가 만들어 놓고 간 역사물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고 또한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머리와 꼬리가 바뀌어 달렸는데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교단인校壇人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일그러진 역사의 틀을 감당하기 힘들어 필자는 아예 역사의식을 버리고 싶었으나, 자주 문의를 하거나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있어 몇 개의 항목을 가려 붓을 들게 되었다.
이번 글을 모으는 데는 적지 않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역 부분에 있어서는 대체로 제천의 정용석 선생의 것을 활용한 바 컸고, 어문 쪽에서는 최명재 선생, 임진왜란 부분에서는 최두환(해군 충무공수련원 교수)선생이 자료를 보내주어 글을 쓰는 데 감초 같은 구실을 했다.
특히 이 책은 여러 사안을 고찰하는 데 있어 지명에 대한 고증이 핵심이었는데, 최찬동선생이 그 어려운 작업을 맡아주셔서 이 책은 명실공히 전고를 밝히는 데 부족함이 없어졌다고 생각된다, 네 분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여러 곳에서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필자의 문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니 이해를 구할 뿐이다.
이 땅의 역사가 잘못되었다는 것만 짚어놓았을 뿐, 역사는 인간의 족적을 살펴서 미래지향을 제시해 놓아야 하는 것인데 필자는 그것을 보여주지 못한 점 부끄럽게 생각한다.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역사를 꾸밀 인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1999년 초겨울 역삼동 연구실에서
김종윤
차례
1. 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
2. 이 땅의 지명은 짜깁기 된 것
3. 지명이 가짜면 문헌도 가짜
4. 물은 생명,지명을 낳는다
5. 이 땅의 땅이름 이야기
6. 서울은 근세조선의 오백년 왕도인가
7. 경도한성부는 경기도 서울인가
8. 아사달과 조선
9.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10. 서울의 어원
11. 장안이 어찌 이 땅의 서울인가
12. 하남 위례성을 찾는 한심한 사람들
13. 동해물과 백두산과 무궁화
14. 태극사상과 태극기
15. 고려 강역의 실체
16. 압록강과 위화도는 어디인가
17. 이성계 조선과 한반도는 무관하다
18. 이성계의 고향은 어디인가
19. 용의 눈물
20. '중국'이란 무엇인가
21. 해동과 동국
22. 훈민정음과 중국
23. 중국어는 조선어의 방언
24. 조선의 영광
25. 이 땅에는 문자가 없었다
26. 명나라는 누구인가
27. 조선과 변방의 구도
28. 금강산 이야기
29. 금강산은 대륙의 황산을 말했다
30. 한국인 씨족사는 믿을 만 한 것인가
31. 족보를 만든 사람들
32. 임진왜란이 한반도 싸움인가
33. 임진왜란은 항주만 싸움이었다
34. 상해는 조선의 대문이었다
35.이해할 수 없다는 임진왜란 사료들
36. 이순신과 유성룡은 동향이라는데
37. 노량진 사육신 묘비는 가짜
38. 엉터리 사적 삼전도비
39. 유인석의 격고문으로 본 조선강역
40. 외규장각 도서들은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가
41. '몽유도원도'는 꿈을 그린 그림인가
42. 『표해록』의 진위에 대하여
43. '대동여지도'는 과연 김정호가 그린 것일까
44. '대동여지도'가 허구인 까닭
45. 서구인이 본 조선강역
46.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