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여성의 존재는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항상 놀라다 못해 분노하는 대중이 존재한다. 여성의 내면을 활자로 보는 행위를 영원히 낯설어 할 작정인지 매번 충격을 받고 매번 거부의 논리를 외친다. 거기에 성소수자라는 정체성도 드러나면 귀신보듯 혼비백산한다. 『악녀서』를 둘러싼 과거의 논란도 다를 것이 없다. 당연하게도 살아 숨쉬는 사람은 행동할 수 있다. 그러니 여자가 글을 쓰는 것, 성소수자가 본인의 삶을 글로 드러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냥 살아가는 것일 뿐이니까. 그런데 일부는 누군가의 정체성을 모욕하며 타인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다. 질리지도 않는지 존재하지 않는 자격증을 내밀며 아직도 난리를 치고 있다. 책이나 유튜브, 각종 SNS에서도 찾을 수 있는 성수자들의 이야기가 그들 눈에는 언제나 처음과도 같은 지 반응이 한결같다. 여러분, 여자끼리도 관계를 맺습니다. 심지어 그걸 글로도 쓸 수 있습니다. 당신들처럼요. 욕정을 서슴지 않게 드러내고 환락에 빠진 채 방황하는 캐릭터, 갑자기 등장하는(실재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과거의 연인 등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성별이 여성이라면?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다. 심지어 현대에서조차도. 천쉐 작가가 열어놓은 이야기의 문을 우리는 이제야 볼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출간될 다른 글을 생각하면 축제라고 부르고 싶다. 다른 이야기 보따리가 빨리 도착하길 빌어본다. *** 출판사 도서 협찬을 받고 쓴 리뷰입니다
타인의 타고남을 조작할 자유가 있는가.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시대에 따라 조작은 ‘고치다’로 둔갑하기도 한다. 『남성 과잉 사회』에서는 ‘치료’라는 단어로 불린다. 다른 단어들이 자리를 꿰차더라도 이것이 비윤리적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가부장주의의 유산인 성별감별낙태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까지도 특정 성을 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아시아권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책에서 거론한 미국을 들여다보자. 자본주의의 화신과도 같은 미국 사회 답게 성별 감별이라는 의료기술은 자본주의와 결합한다. 또한 미국인들은 상업화된 맞춤식 의료 서비스도 싫어하지 않는다. “성별 선택은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에요. 싫으면 사지 않으면 됩니다. -본문351쪽 이 맞춤식 의료 서비스를 옹호하는 미국인들은 아시아권과는 달리 가부장적 사고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본인의 선택은 다르다고 얘기한다. (본문352쪽) 성별선택을 행한다는 점에서 다를게 없음에도 자기합리화에 빠지고 만다. 시대마다 나름의 성별선택 기법은 거의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보다 더 위협적이다. 유전자 단위에서 건드릴 수 있는 첨단 의료 기술은 치료라는 이름 아래 접근성이 낮아졌고, 비도덕적 행위는 개인의 기호로 탈바꿈됐다. 유전적 질병을 물려주지 않기 위한 의료 기술은 이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영화속 상상처럼 지식이나 외모를 유전자 단위로 선택해 아이를 낳는 시대도 멀지 않았다. 그러한 자본과 기술을 현재 존재하는 아이들에게, 아직까지 정복하지 못한 수 많은 난치병 치료에 쏟았다면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성 과잉 사회를 만들어낸 욕망 과잉 사회에서 언제나 도덕적으로 행동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적어도 의학 기술만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위험한 기술엔 반드시 높은 도덕성과 엄격한 책임감이 뒤따라야 한다.***출판사 도서 협찬을 받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