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안 수업 -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는가
윤광준 지음 / 지와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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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 아닌 전공자’, 미술을 전공해놓고 석사나 박사 학위는 없지만, 그래도 미술로 밥 먹고 사는 나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건데, 뭔가 아는 것 같은데, 말로 명쾌하게 설명하기는 약간 희미한 소양 수준은 ‘전공자’ 타이틀을 달기에 늘 불안하다. 저자가 자신을 빗대 설명하는 ‘딜레탕트’ 같은 사람이 나다. “딜레탕트란 좋게 말하면 예술 애호가지만, 나쁘게 말하면 예술에 관심은 많지만 많이 알지는 못하는 사람, 어딴 분야를 깊이 탐구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심미안 수업』은 이런 내가 “나만 알고 있으면 좋겠네.” 생각으로 여러 번 읽는 책, 너무 어렵지 않게 설명한 예술을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는 수준 있는 예술 교양서다.

예술 입문자를 위한 책이 쏟아지고 있다. 꼭 미술 뿐 아니라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미술, 음악, 건축, 사진, 디자인 같은 모든 영역에서 자기 영역의 매력을 알리기 위하여 달콤한 말로 쉽게 자신을 드러내는 책이 쏟아진다. 온라인 세계가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이 예술 영역은 더 치열하다. 자기를 드러내기는 더 쉽지만 그만큼 자기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너무 넓어진 온라인 세계에서 쓰레기 정보와 알곡 정보가 뒤섞여 오해받기 더 쉽다. 세상이 좋아졌지만, 이 책의 키워드인 ‘심미안’을 갖기까지는 더 험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저자 윤광준은 ‘심미안’을 ‘가치를 알아보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를 인간의 욕망 차원에서 해석하여 인간이 최종적으로 추구하게 될 욕망이 ‘예술의 욕망’임을 이야기한다. 인간의 최초 욕망이 예술의 욕망임을 기억한다면, 인간의 원초적이고 최종적인 욕망이 예술이며, 예술의 욕망은 생을 지탱하는 에너지이며 목적임을 이해하게 된다. 예술 제일주의가 아니라, 예술이 우리 삶에 필요한 에너지의 공급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책의 핵심 아이디어는 Part 1의 《우리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일 테지만, 이 책을 ‘수업’답게 하는 구성은 Part 2,3,4,5,6을 구성하는 아름다움의 과목이다. ‘미술’, ‘음악’, ‘건축’, ‘사진’, ‘디자인’ 과목은 저자가 고른 예술의 대표과목일 테지만, 일반인 입장에서 이 정도만 잘 알아도 예술을 보는 눈이 밝고 선명해질 것. 이 책을 누군가에게 소개한다면 나는 이런 가이드라인을 덧붙이고 싶다. 일단 이 책의 첫 파트를 꼼꼼하게 읽자, 자칫 어렵게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난 후에는 ‘미술’, ‘음악’, ‘건축’, ‘사진’, ‘디자인’ 중에서 관심이 가는 분야를 먼저 읽자. 그 다음 두 번째 관심이 가는 분야를 읽고, 조금 어려워진다 싶으면 다시 Part1로 돌아가 예술의 의미와 힘, 심미안의 기쁨을 상기하자. 그리고 다시 먼저 관심 있는 분야를 한 번 더 읽거나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려보자. 『심미안 수업』은 후루룩 읽으면서 덮어버리기엔 너무 귀한 책이다. 두고두고 펼쳐봐야 할 책이다. ‘심미안’의 힘을 돋우는 책이기 때문이다. 특히 프롤로그에는 저자가 자기 과거의 경험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미적인 가치를 아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삶을 통과한 경험이 『심미안 수업』을 쓰게 한 이유이며, 『심미안 수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같은 결의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심미안(審美眼)’이라는 단어는 지금은 고풍스럽지만, 과거 우리 세대에서는 매우 익숙한 말이었다. 인간이 가진 어떤 능력보다 우월한 능력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는 단어였다. ‘아름다움을 살피는 눈’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는 심미안을 갖게 되는 건 결국 ‘마음의 눈’을 뜨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적인 가치를 느끼는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무기가 된다. 그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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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100% 활용법
요한 이데마 지음, 손희경 옮김 / 아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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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찰총장이 유명해진 데는 그 자신의 일도 있었지만, 12살 차이 나는 ‘*십억 자산가’ 아내의 이야기가 한몫, 아니 두 몫을 했다. 그렇게 귀에 꽂힌 아내의 직업은 내가 너무나 잘 아는 회사의 대표이사. 사람들은 놀랐을 것이다. 미술 전시회를 기획하는 회사가 그렇게 많은 돈을 운영한다는 걸. 이걸 다른 말로 풀자면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사람들이 미술 전시회에 어마무시하게 관심을 가지고 모인다는 의미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돈이 쌓인다는 의미다.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미술품 전시 소식이 들릴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가봐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이제 미술관은 무엇보다 힙한 장소다. ‘인싸’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사진이 잘 나오는 미술관’이라는 ‘Instagram-ready Museum’ 신조어가 생길 정도이니.

미술관 매니아로서는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하다. 미술 전시회의 즐거움을 아무리 말해도 몰랐던 예전보다 미술 전시를 이야기하며 맞장구를 칠 사람이 많아져서 좋지만, 한편 항상 한산하던 미술관이 북적거리고 시끄러우니 굉장히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나…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미술 전시회의 관람객 여럿은 작품을 진지하게 감상하기보다 작품을 좋은 배경으로 하여 ‘인생샷’ 찍기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도 정말 좋은 현상이다. 일단 미술관에 와서 사진을 찍어야 기분좋게 작품을 볼 것이고, 또 미술관에 오고 싶어서 여러 번 오다 보면 작품을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또 보게 될 거니까. 그리고 그게 감상의 깊이가 된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사실, 미술 감상은 얕은 게 아니니까. 사실 미술 감상은 어렵다면 너무 어려울 수 있는 고차원의 세계니까. 그걸 처음부터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다. 사실 나도 아직 멀었고. 미술 감상에 관한 책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미술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백이라면 그림 감상에 연관한 책은 열 정도라고 할까. 더 접근성이 좋은 책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미술관 100% 활용법』은 전자책으로 구매해 읽었다. 전자책의 간편함이 좋아 가능하면 전자책을 사는 나지만, 요즘 다시 종이책에 대한 갈망이 올라온다. 집중도의 차이도 문제지만, 물성의 차이도 크다. 표지나 내지의 질감을 만져볼 수는 당연히 없고, 표면의 광택이나 묵직한 두께와 무게감을 상상하려면 구글링을 열심히 해야 한다. 책의 내용을 담기에 마땅한 몸이어야 균형 있는 책일 테니. 가장 큰 낯섦은 후루룩 전자책을 넘겼는데, 의외로 금방 끝이 보였다는 것. 『미술관 100% 활용법』은 미니북이었다. 구글이미지를 검색해보니 비스듬하게 찍어 두께를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 하나 나오는데, 하드커버였다. 작지만 무게감 있으며 권위 있는 디자인이다. 내용 역시 사실 그러하다. (전자책을 보는 사람은 이렇게 실물감을 알 수 있는 북디자인 사진을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저자 요한 이데마는 30개 이상의 짧은 꼭지를 통해 미술관에 가기 전 염두에 둬야 할 얼마간의 조언을 자유롭게 펼친다. 사실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이 바로 이 (목차 없는) 32개의 꼭지다. 이 개념만 제대로 이해해도 이 책의 알짜배기를 다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한 이데마는 틀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무엇보다 자유롭게, 자율성을 드높여서 미술관의 모든 환경을 즐기면서. 미술 감상은 정답이 없고, 작품이 자기 자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라고 권유한다. 경험을 쌓아가는 것, 그것이 미술 감상이다. 책의 구성과 형식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번역서로서의 어려움, 대한민국의 미술관에서는 적용이 가능할까 싶은 낯선 분위기가 아쉬웠다. “그저 미술관 안에 있다고 해서, 위대한 미술 작품 앞에 서 있다고 해서, 또 그것을 감상한다고 해서 당신의 미술 경험이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아무튼 그 작품을 이해하거나 그것에 감동함으로써 미술과 개인적인 연결고리를 가져야만 한다.”

작은 책 이야기가 나왔느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자면, 이렇게 작은 책일수록 구체적인 책의 내용을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온라인상에 포스팅하는 건 신중해야 한다. 개인이 책을 잘 읽은 것은 좋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포스팅을 보고 책의 좋은 내용에 감탄하고, 정작 책을 안 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이렇게 작은 책일수록! 온라인의 자료가 가볍다는 건 아니지만 책은 그만큼 정제된 정보이고, 책이라는 틀로 묶여 세상에 나왔기에 접근하는 데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직접 돈을 주고 책을 사는 금전적인 대가일 수도 있고,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기다려 빌려 보는 노력의 대가일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책을 만든 저자와 번역한 역자와 출판사에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 가장 중요한 걸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삼천포로 빠졌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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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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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이 압권이었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제목을 따온 책이라 그닥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책은 순식간에 페이지가 지나갔다. 맨 뒤의 책장을 넘기며 또다른 젊은 한국 작가의 책 생각을 했다.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두 책 역시 분홍색 표지를 하고 있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후루루 읽힌다. ‘읽힌다’는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읽힌다’는 비문이 어울릴 정도로 노력 없이 읽을 수 있다. 재미있어서, 읽기 쉬워서.

작가의 프로필을 보지 않아도 파랗게 젊으리라는 걸 잘 알겠다. 30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 여성들이 늘상 겪는 일상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약간의 냉소가 섞여 울적하나 코믹하게 보인다.

“빛나 언니에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 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에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P.28)

첫 번째 에피소드 《잘 살겠습니다》에서는 결혼 청첩장 가운데 오가는 머릿속 계산이 실감났다. 나 역시 몇 년 동안 연락이 없다가 필요할 때 연락이 오는 사람들을 마뜩찮아했고, 더 오래 연락이 없다가 결혼한다며 연락이 오는 사람들을 불편해 했으며, 더 심각하게는 결혼식 이후로 연락을 딱 끊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청첩장 줄 때 썼던 식비까지 계산이 되더라.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사회생활하는 어른이지. ‘당근마켓’을 연상시키는 ‘우동마켓’과 거기 유명한 셀러 ‘거북알’의 이야기는 사회생활의 더러움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지우지 못할 거다. 거북알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분노를 금치 못했고 대표의 비열함과 그 결과의 상징인 ‘포인트’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역겨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 먹고사는 게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거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의 후반부는 나의 소개팅 흑역사를 그대로 상영하는 것 같은 착각까지. 아아… 이 작가 정말 포인트를 잘 찝는다.

“진짜 모르겠어요? 내가 지유씨 좋아하는 거잖아요. 저 여자 만날 만큼 만나봤어요. 그런데 여태까지 이렇게, 진짜, 뭔가, 통한다는 느낌이 드는 여자는 단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것 때문에 지유씨 좋아하는 거라고요.”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 (P.96)

《도움의 손길》 역시 강렬했다. 맞벌이 부부, 혹은 싱글 생활자에게 꼭 필요한 도우미서비스를 소재로 하여, 각자 자기 생각만 하는 이기심과 은근히 서로를 간접-직접 착취하는 모습. 우아한 척 우악스러운 척하는 모습이 뒤섞여 괴이했다. 《새벽의 방문자들》은 어떠한가, 혼자 사는 여성의 공포를 그토록 직접적으로-그러나 있을 만한 사건을 대입해서 만든 에피소드라니. 반대편 오피스텔이 성매매 오피스텔일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기 전까지 나는 ‘구남친’이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한 요량으로 인터넷 남초 사이트에 그녀의 주소를 올려놓은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물론 있을 법한 상상을. 그리고 바로 그 장면, 머릿털이 쭈뼛 서는 장면. 그녀의 ‘무난해서 완벽한’ 구남친이 성매매를 위해 찾아온 남자들 중의 하나였던 것. 너무나 평범하고 순해 보이는 내 주변 남자들이, 내 소중한 남자친구가 성매매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건 여성에게 무릎까지 찬 두려움이다.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알고나면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갈 수 없어 더 무서운 두려움. 여성 입장에서야 늘 가진 불안을 글로 읽는 거지만, 이 소설을 읽는 남자들은 엄청 불편했을 것 같다. 그 불편함을 여성인 나로서는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수 없는 불편함이라 또 달리 괴롭고...

항상 수능 5등급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라는 조언을 받는데, 여기 참 좋은 모델이 있었다. 한편 이 정도는 돼야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겠구나 싶어 주눅이 들기도 하고. 세상이 너무 달라졌는데 나는 너무 느리게 올드한 자리를 지키는 건가. 재미있게 읽고 나서도 생각이 많다. 현실이 원래 그런 것처럼, 너무 현실적인 건 너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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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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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키’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라는 네이버 카페 이야기를 듣고 황당함을 넘어서 분노한 적이 있다. 안아키의 운영자 김효진 한의사는 백신이 아이를 병들게 한다며 예방접종을 거부하고, ‘자연 치유’를 해야 한다면서 앓는 아이를 그대로 방치한다. 그걸 몸 공부라고 부르면서 아이를 그대로 둔다. 한편 종교 때문에, 수혈을 하면 안 된다는, 부모의 신념 때문에 수술을 못 하는 아이를 TV에서 본 적도 있다. 아이는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며 수술을 하게 해 달라고 울부짖었지만 부모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기도만 했다. 이건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아이에게 고통을 주는 거다. 분명 아동학대다. 그런데 이걸 결정할 수 있는 건 왜 부모뿐인가? 누군가가 여기에 개입할 수는 없는가. 아니... 좀 더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뭐지? 대체 무엇이 부모를 그렇게 만든 걸까? 혼란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 잊고 있었던 그때의 감정이 『면역에 관하여』를 읽으면서 치솟아 올랐다.

저자 율라 비스는 첫아이를 낳으면서 자궁내반증을 겪고, 그 과정에 타인의 피를 받아들이고, 타인의 손이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건강의 천신만고 끝에 생명을 건지고 아이를 품에 안은 후, 어머니로서의 작가의 고민은 깊어진다. 모든 초점이 건강에 가닿았다. 자기의 몸은 이미 경계가 없이 세계와 뒤섞인 경험을 한 어머니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이에게 백신을 접종할 것인가, 아이가 이 백신을 감당할 만큼 강인할 것인가. 게다가 그녀가 아이를 낳은 2009년은 신종플루가 세계를 휩쓴 해이기도 했다. 더욱 고민의 양상이 다르고 깊을 수밖에. 그녀는 “모든 의심의 오솔길을 직접 걸어본 뒤” 결론을 내린다. 백신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현대의학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라면 순수한 자연의 몸이라고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고. 의학 덕분에 우리의 몸은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거라고. 우리 몸은 수많은 생물이 기생해 함께 살아가는 전쟁터라고. 무엇보다 우리 몸은 서로의 면역에 기대어 안전할 수 있는 연대된 공간이라고.

사실, ‘백신 찬성’은 책을 고를 때부터 예상한 결론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면역에 대한 이야기인데.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의 면역 필드는 구멍이 나는데. 다만 『면역에 관하여』의 탁월한 점은, “모든 의심의 오솔길을 직접 걸어본” 저자의 고민의 흐름을 따라, 백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 역시 (앞서 있어 온 신화, 역사상의 문제를 통해 ) 살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신을 접종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또한 다양한 비유를 통해 아름답게 서술한 것이다. 같은 정보를 전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어떤 모양으로 강약을 다르게 해서 전달하는지는 또 다른 차원의 능력이다. 그것이 아마 우리가 늘 고민하는 평범과 비범 사이일 것이다. 단언컨대, 이 책의 여러 면면은 아름다웠다. 이토록 아름다운 과학책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나는 『면역에 관하여』에서 강조하는 ‘몸’의 이야기에 목하 동의했다. 그것도 여러 번 손뼉을 치면서 몸의 이미지를 다시 그리고 또 그렸다. 의학의 혜택을 입은 인공적인 사이보그로서의 몸이 아니라, 침투성이 높은 불완전한 경계로서의 피부로 둘러싼 몸 말이다. 이 피부의 개방성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다른 몸들과 이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이미 스킨십의 힘을 경험해 알고 있지 않은가. 바이러스와 세균의 침투뿐이 아니라, 몸의 온도와 인간적인 교감, 감정의 교류가 가능한 피부 접촉의 힘을. 이 몸의 개방성 덕분에 우리는 아프기도 하지만 타인과 연결되고 세계와 연결된다. 그러니 우리가, 나 혼자의 몸뿐이 아니라 연대한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는 감정적으로뿐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뭐, 제대로 고민했다면 결론은 동일하겠지만. 서로의 몸에 빚진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서로의 몸에 연대한 공간이 면역이라는 건 더할 나위가 없고. 이 공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몸을 가지고 한 몸이 된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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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 - 조현병 환자의 아들들이 들려주는 열두 가지 이야기
수잔 L. 나티엘 지음, 이상훈 옮김 / 아마존의나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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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가면서 배운 건 다른 사람들이 너를 해치기 전에, 네가 먼저 해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널 존중받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극복하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좋은 상담치료사를 만나고 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저의 삶은 파괴되었을 겁니다. 나는 지금의 인터뷰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 치료사는 저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아무도 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그만큼의 충분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아 두려웠었어요. 아마 6주나 8주 정도 그녀와 만날 수 있겠지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2~3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수잔 나티엘, 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 아마존의 나비, 2020, P.117

 

지인 하나가 울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묵묵히 듣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이는 자기 삶이 너무 어렵고 버거워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곤 했다고 했다. 그렇게 불꽃처럼 불타오른 후 한동안 도망쳐 있기를 반복했다고. 자기를 재처럼 소진한 후에 자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 하는 행동을 통제할 수 없었다고. 그러면서 자기 가정의 어려움과 결혼 후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살기 위해 상담을 받았고, 상담을 공부했다고. 자기 문제가 양극성 장애임을 알고 나서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조증(존 가트너, 살림비즈)을 읽었던 후라 그이의 행동이 조증과 일치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고, 이후 낙차 증상도 받아들여졌다. 내가 그에 대해 느낀 마음은 무엇보다 존경심이었다. 자기 어려움을 인식하고, 증상에 휘둘리면서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러다가 상담을 만나고, 신뢰할 수 없는 상담자를 신뢰해 보려고 노력하고, 하기 싫어도 믿을 수 없어도 꾸준히 상담을 받고, 결국에는 상담을 공부하고 대학원을 진학한 그 사람의 삶이 무엇보다 진솔하고 존경스러웠다.

 

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은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에게 다가가 그들의 삶을 진솔하게 묻고 기록한 인터뷰집이다. 특히 그들의 아이가 부모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과 생경함과 고통을 날것의 언어로 기록한다. 부모의 증상이 발현될 때 아이에게 가하는 충격은 가히 파괴적이다. 그 간극 때문에 큰 상처를 남긴다. 그런데도 상처를 입은 아이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극복해 나간다. 저 돌변은 병 때문임을 인지하고 부모의 본성은 다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이들은 부모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은 삶을 꿈꾼다. 물론 순순히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는다. 부모로 인해 그들이 보고 들은 것 때문에 삶은 그야말로 고통스럽다. 선선히 건강하게 성장하는 게 불가능한 게 더 자연스럽다. 사실 나의 눈에도 그런 케이스가 현실에서는 더 많이 보이고. 이 책에서 나온 인물들은 약간의 행운 덕일까? 긍정적인 성장도 비교적 많이 이루어냈다. 그러나그들이 부모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받아들인 후, 자기 상처를 인정하고 자기 성장을 위해 발버둥을 친다는 면에서 삶은 가치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지만, 아이 역시 부모에게 영향을 미친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생명의 본능으로 삶을 투쟁한다. 그게 대단한 것 아닐까.

 

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은 대상자 인터뷰이에 대한 인터뷰, 대상자에 대한 인터뷰어 수잔 나티엘의 고찰 및 이 이야기를 통해 새로이 배워야 할 점, 거기에 옮긴이 이상훈의 후기로 구성된다. 이러한 흐름은 인터뷰를 마무리를 짓는 역할을 하면서, 저자의 의도를 집중감있게 전달한다. 옮긴이의 후기 역시 깊이 있고 진중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구성이 무척 좋았고, 읽는 이를 배려하는 편집이라고 느꼈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정신적 고통을 겪은 화가의 컷도 세련되었으며, 보라색을 기조로 한 편집 디자인이 세련되어 읽기가 좋았다. 편집 디자인에 민감한 독자로서 편안함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조현병 화가 리처드 대드의 강렬한 삽화 선정이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은 낯선 주제 때문에 어렵게 느낄 수 있지만, 일단 읽기로 결심하고 나면 무척 쉽게 책장이 넘어가는 책이다. 주제의 낯섦을 넘어선 나놈에게 쓰담쓰담을. 편견과 선입견은 벗겨내면 그만인 셀로판지일 뿐. 이제 정신질환 분야에 대해 아주 약간의 이해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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