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32가지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반 고흐 이야기
최연욱 지음 / 소울메이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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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를 묻는 질문에는 늘 두 명의 화가가 후보에 올랐다. 장 프랑수아 밀레와 빈센트 반 고흐. 이전에는 두 사람이 팽팽했으나 요즘엔 고흐가 우위를 차지하는 느낌이다. ‘이발소 그림’의 대명사였던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기」가 화려한 색깔과 율동적인 터치의 고흐 그림에 밀리고 있으며, 몇 년 전 《러빙 빈센트》영화에 이르러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나는 자주 생각한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할까?’ 『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32가지』는 그런 알쏭달쏭 가운데서 고른 책, 어떻게 (전기도 아닌데) 반 고흐 하나로 책 한 권이 나올 수 있지?라는 궁금증도 포함해서.


『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32가지』는 반 고흐의 삶을 32개의 꼭지를 잡아 좁고 깊게 파들어간 책이다. 이런 책 제목과 내용이라면 32개의 꼭지를 상위 목차 없이 흐름만 고려해서 나열했을 것 같은데 의외로 잘 세분한 목차를 보고 놀랐다. 하긴, 얇은 미니북도 아닌데 목차가 너무 구분 없어도 안되는 게 맞다.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고흐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배워온 내게 이 책의 80% 이상은 낯설지 않았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나의 반 고흐 나무는 가지가 더 붙고 이파리가 더 무성해졌다고나 할까. 특히 이 책의 진수는 뒤쪽 20%다. 뒤로 갈수록 내가 잘 몰랐던 테오의 죽음 원인, 일본인들의 반 고흐 사랑 정보가 나오는데, 우키요에에 미쳤던 반 고흐를 역으로 일본인들이 사랑해 준다는 게 참 좋았다. 사랑을 주고 나중에는 받게 되는 사랑의 순환이 내게는 너무 좋았다. 물론 고흐가 살아생전에 누군가가 고흐 그림의 가치를 알아주면 더 좋았겠지. 그러나 그리되지 못했기에 지금 받고 있는 고흐의 사랑은 더 기쁘고 애틋하다. 누군가가 (가족이었던 테오와 요한나 봉어) 고흐를 철석같이 믿어주었기에 이 그림의 가치가 묻히지 않았다는 것. 이것 역시 사랑 말고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세상천지 외면한 것 같은 고흐에게 사랑 하나는 남아있었다.

고흐가 사랑받은 이유가 꼭 그림 때문일까? 나는 고흐가 남긴 기록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다량의 스케치와 더불어 900통이 넘는 편지는 고흐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좋아하는 누군가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을 충족한다. 그래서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아가 고흐를 사랑하게 된다. 고흐는 살아생전 사랑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토록 간절하게 사랑받을 씨앗을 뿌려두었다. 그의 씨앗이 봄을 맞아 싹트고 꽃 피고 열매를 맺고 다시 봄을 맞고. 그리하여 무성한 사랑을 거두고 또 거두는 것이다. 이런 책 한 권이 나올 정도로. 누가 뭐래도 기록이 이긴다. 고흐가 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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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게 말을 걸다 - 난해한 미술이 쉽고 친근해지는 5가지 키워드
이소영 지음 / 카시오페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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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을 쓰셨군요.”

미술책 작가 슈퍼셀럽 이소영 작가의 신작 『미술에게 말을 걸다』를 읽으면서 내 입에서 나온 감탄은 다름 아닌 칭찬 of 칭찬. 344페이지에 이르는 두꺼운 책에 대충 들어간 내용이 없이 실한 읽을거리에 깜짝 놀랐다. Part 1과 Part 2로 구분한 간결한 목차와 함께, 미술과 친해지는 ‘일상’, ‘작가’, ‘스토리’, ‘시선’, ‘취향’ 다섯 가지 키워드가 한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책은 목차를 숙지하는 것이 필수, 이 다섯 가지 키워드를 잘 숙지한다면 『미술에게 말을 걸다』가 아무리 두꺼워도 페이지를 술술 넘길 수 있을 것.

『미술에게 말을 걸다』의 가장 큰 장점은 쉽다는 것. 책표지를 넘기고 책장을 넘기며 읽어봐야 쉬운지 안 쉬운지 알 수 있는 책이 아니라, 그냥 책표지만 넘기면 바로 읽고 싶은 쉬운 책이다. 이건 이소영 작가의 최고 장점, 뭘 쓰고 만들어도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나로서는 아무리 바라도 따라잡을 수 없는 부러운 자질이다. 하루 만에 두꺼운 책 한 권을 훌렁 읽어버릴 정도로 문체도 쉽고 설명 역시 구체적이다. 구석구석 들어간 이미지를 보면서 생각이 많았다. 이런 신식 이미지는 저작권료가 많이 들었겠다. 이 화가와 어쩌면 안면이 있을까. 고화질 이미지를 구하느라 힘들었겠다. 다양한 이미지를 구하느라 고생이 많았겠다. 그런 잡다한 생각들. 그 다양한 이미지 중에 내 마음에 쏙 든 그림은 「법순과 푼수의 수표」, 1910, LH 토지주택 박물관. 모댁의 하녀인 병든 김푼수를 아내로 데려가려고 보통 여자 노비의 여섯 배인 300냥을 주인에게 지불한다. 이 사랑의 거래(?)를 두 남녀의 손을 그려 기록하는데. 나 역시 동일하게 믿는다. 모든 시각 예술은 예술 작품이며, 내 마음에 와 닿는 의미를 정확히 알 때 마음에 오래 남는다고.

이소영 작가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확고히 갖춘 것 같다. 접근성. 개인적으로는 짧을 수도 있는 Part 1이 가장 좋았다. 다섯 개의 키워드로 구성된 Part 2는 이미 미술 전공자인 내게 낯익어서 그럴 것이다. ‘일상’, ‘작가’, ‘스토리’, ‘시선’, ‘취향’ 키워드를 어찌나 잘 잡았던지 부럽부럽 감탄감탄. 미술에 관심 많은 고2학생이나 미대생이 아닌 대학생에게 딱 좋은 책. 또 다시 완성도 높은 좋은 책을 하나 손에 쥐어 반가웠다.

“그러므로 책을 읽다가 저와 생각이 맞닿은 부분, 반대인 부분에 밑줄을 긋고, 귀퉁이를 접고, 사색 속에서 저와 논쟁하세요. 그러면 자기만의 관점으로 미술을 감상하는 힘이 생기고, 사유가 역동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미술로 세상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익숙해지실 겁니다. 한마디로 미술과 좀더 친해지실 수 있을 거예요.”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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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알면 옛 그림이 재밌다 - 쉽게 재밌게 읽는 옛 그림 길라잡이
윤철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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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옛날 동네 서점에는 늘 자습서가 있었다. 자습서 중에서도 핵심개념만 정리한 서브노트형 참고서를 나는 무척 좋아했는데, 머릿속에 나무를 키우듯이 목차로 가지를 그리고 핵심 키워드를 달아 두면 공부하는 데 너무 유용했기 때문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중학교 시절 내내 교과서 아닌 책을 읽고 만화책을 달고 살던 내가 공부를 꽤 했던 이유는 바로 이 개념나무 때문이었다. 『이것만 알면 옛 그림이 재밌다』를 읽으며 내가 떠올린 건 그때의 서브노트, “아, 이 책 참 마음에 든다.”

평이한 제목 때문에 큰 기대 없이 집은 책, 옛 그림에 대한 지식을 정리할 요량으로 펼친 『이것만 알면 옛 그림이 재밌다』는 ‘알찬’ 책이었다. 한국의 옛 그림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쉬운 책’을 추천해 달라 한다면 나는 아마 이 책을 건네리라. 어쩌면 너무나 단순하게 1장 《옛 그림의 용어》, 2장 《붓과 먹 쓰는 법》, 3장 《화론과 화론서》, 4장 《중국의 화파》, 5장 《조선의 화파》, 6장 《옛 그림의 종류》로 구분한 목차가 개성 없어 보였다. 그 아래로 줄줄이 이어진 미술사의 기본개념들이 너무나 보통스러웠다. 그러나 책의 진가는 늘 알맹이다. 목차가 책의 80%라고 생각하는 나마저도 이 책의 알맹이를 보고는 감탄할 수밖에. 솔직히 너무 좋아서 저자 정보를 찾아봤다. (대단한 분이시구나! 역시!)

내용은 전혀 어렵지 않다. 한 페이지 절반도 차지 않을 듯한 단편적인 내용은 짧지만 핵심을 담고 있고, 짝해 나온 이미지도 적절하다. 그러나 이 수많은 개념어들은 한편 이 책의 품질을 보증한다. ‘배관기’라던가 ‘홍운탁월’, ‘황자구 수법’ ‘예황식 산수’ 등은 그간 내가 전혀 몰랐던 용어였다. 두꺼운 미술 임용고사 교재를 달달달 외웠던 나에게 이건 꽤 신선한 경험이다. 미술 임용고사를 공부해봤던 사람에게 이런 책은 또 다른 의미로 소중하다.

개인적으로는 미술 임용고시 생들이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전에 읽어보라고 꼭 권하고 싶다. 가장 중요한 건 부담스럽지 않게, 기쁘게 기분 좋게 지식을 만나는 것이다. 미술의 몸과 혼을, 그걸 설명하는 용어에 소중한 감정을 가진다는 건 미술 지식을 달달 외우고, 소화하고, 생활에서 찾아내고 적용하면서 기뻐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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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내고 도망친 스물아홉살 공무원
여경 지음 / 들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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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이렇게 제목을 잘 뽑을 수 있을까.”

책 을 볼 때면 이 책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을까, 첫인상을 생각한다. 『사표내고 도망친 스물아홉살 공무원』은 바로 그런 ‘혹하는’ 책이다. 제목만 그렇게 당기는가 하면 그도 아닌 것이, 내용 역시 가볍지 않고 충실한 것이 책장을 넘기는 나를 만족시켰다. 좋은 제목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밀도 있는 내용 역시 그냥 나오지 않는다. 둘 중 하나는 나올 수 있어도 두 가지 다 나오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이 책은 두 가지 다 충실한 책이다. 어디 내놓기에 부족하지 않은 책.

나날이 ‘공무원’이 좋은 직업이 되어가고 있다. 시대의 불안정이 커질수록 안정을 추구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다.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는 나쁘기도 하고 한편 좋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은 본능대로 살지만, 한편 본능대로만 살고는 못 견딘다. 그래서 ‘이 좋은 직장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사기업으로 들어가거나, 자영업을 하거나,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는 사람은 의외로 아주 많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자기에게 공무원이 안 맞는다는 걸 알았을까, ‘그 좋다는’ 직장에 들어가기까지, ‘그 좋다는’ 직장을 그만두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일단 세상에 나가고 나면 내 삶이 오롯이 내것이 되기 어렵다. 어른이 되면 될수록 원하는 대로 살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공무원 생활을 할 때는 늘 내일이 불투명하고 나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내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조직이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는 사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갈수록 더욱 확고해져갔꼬,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근무하는 생활 패턴을 고수해야 할까? 각자에게 맞는 패턴대로 살 수 없을까?’ 그 의문은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배움을 구하면서 서서히 해소되어갔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과 정말 그렇게 되도록 이뤄가는 일 사이의 간극은 매우 컸다.” (P.173)

한편, 나이가 더 들면 이 우물 안에서 밖으로 나가기가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이 책을 덮으며 생각난 건, 뮤지컬 《모차르트》의 노래, 「황금별」이었다. 황금 별을 보고만 있으면 뭐하겠나, 이 성벽을 넘어야 나답게 살 수 있는걸. 『사표내고 도망친 스물아홉살 공무원』의 저자는 마지막 기회를 가뿐히 넘은 똘똘한 사람이라고나 할까. 한편 나라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는 용기를 가진 사람. 말로만 나불나불 현실에 불평 많은 나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일. 열 말 할 것 없다. 결국, 용기는 행동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35KliysB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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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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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학을 했다. 교사는 직접 수업을 가르치지 않고 EBS만 연결해 놓고 ‘논다는’ 사람들의 시선이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들린다’ 근데, 정말 그들 말대로 좀 ‘놀았으면’ 좋겠다. EBS 서버가 멈췄다. 로그인이 안 된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다. 아이디를 여러 개 만들어서 중복 가입이 되었다. 선생님이 승인을 절대 안 해준다. (알고 보니 클래스 수강신청을 안 했다.) 화면이 클릭이 안 된다. (알고 보니 매뉴얼 pdf를 보고 클릭하고 있었다.) 결국 학생 몇 명보고는 학교에 오라고 한다. 내가 예상했던 바로 그 문제다. 이 부분을 하라고 매뉴얼 캡처까지 해서 보내주지 않았냐 하면, 그냥 안 열어봤다고 한다. 단 1분 숨돌릴 틈 없이 계속 울리는 전화와 팝업 메시지에 에너지는 쭉쭉 내려간다. 뉴스에서까지 이 아수라장을 ‘콜센터’라 표현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나만 그렇게 힘든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근데, 이 아수라장을 겪은 후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의외의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행복하다.” 일상과는 다른 모양으로, 일상을 시작하게 되어 감사함이 들었다. 고생해도 행복했다.

미국 콜로라도 가상의 마을 홀트에서 오랫동안 철물점을 경영해 온 대드 루이스, 온몸에 암이 퍼졌다고 한다. 루이스는 치료를 포기하고 죽음이 올 때까지 편안하게 살을 헤아리도록 한다. 그런 대드 루이스를 가운데 두고, 작가는 그의 아내, 딸과 아들, 홀트 마을의 이웃의 오래된 이야기와 현재 이야기를 서술한다. 켄트 하루프의 작고 얇은 책 『밤에 우리 영혼은』만 알고 있던 나는 묵직한 하드커버의 『축복』을 보고 적지 않이 당황했다. 긴 시간의 참 많은 이야기가 드라마틱 하게 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덮을 때까지 감정의 고조와 희한한 사건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저 과거와 현재의 일상, 그것이 이 책의 처음과 끝이다. 그리고 이 일상이 저자가 전하고 싶은 축복이다.

대드 루이스와 그의 가족, 이웃들은 번지르르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상처도 많고 부끄러운 일도 많으며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알리기 어려운 비밀도 많다. 원하지 않게도 그게 알려질 때면 견디기 힘들도록 괴롭다. 대드의 50대 딸은 자기가 낳은 딸을 교통사고로 잃었고, 이제는 형편없는 남자친구만 그냥 만나고 있다. 그냥 자기를 만나러 오니까 사람이 그리워서 개념 없는 남자라도 만나보는 것 같다. 아들은 동성애 성향으로 말 못 할 고민을 가지고 여장을 하는 일로 학교 친구들에게 린치를 당한다. 이런 트러블로 인해 아버지와 등을 돌린 프랭크는 집을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대드가 죽어가는 걸 알았어도 프랭크는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옆집 윌라와 에일린 모녀도 외롭고 쓸쓸하다. 에일린은 오래전 교사로 일할 때 유부남 교장 선생님과 벌인 사랑 말고는 변변한 따스함도 없다. 열 살 앨리스는 엄마를 잃고 갈 곳이 없어 버타 메이의 집으로 온다. 흔히 말하는 조손가족이다. 라일 목사는 홀트에서 쫓겨나게 생겼다. 아내는 바람이 나서 남편을 버렸고, 아들은 사랑의 실패로 방황하다가 자살 소동을 벌인다. 홀트를 떠나야 하는 라일 곁에는 아무도 없다. 과거 대드는 철물점 직원 클레이턴의 횡령을 발견하고 그를 해고했는데, 클레이턴은 자살을 했고 아내는 대드를 원망했다. 대드는 조건 없이 클레이턴 가족을 금전으로 지원한다. 대드뿐 아니라 각자 말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지고 그럴듯하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이런 사연이 아름답게 회복되는 건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라는 걸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이런 사연을 끌어안고 하루를 견디는 게 현실 임도 너무 잘 안다. 그러나 이런 일상을 하루 이틀 더해가고 그 가운데 무언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지속하는 일이 축복임을 우리는 자꾸 잊는다.

켄트 하루프는 대화를 표현할 때 대상의 이름을 반복해서 드러내지 않고 ‘그는’ 혹은 ‘그녀는’을 주어로 사용한다. 대사에는 따옴표를 쓰지 않고 줄줄이 이어 쓴다. 읽기에는 불편하지만 보기에는 부드럽고 심심하다. 이것 역시 저자가 의도한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었지만 저자의 의도라면 수긍할 수 있을 만큼 고요한 효과가 있다. 드라마틱 한 전환 하나 없는 이 밋밋한 소설 『축복』은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삶이 가장 확실한 축복임을, 그중에 가장 빛나는 축복은 사랑임을 잊지 않고 강조한다. 그냥 사는 일,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죽음을 앞두고야 우리는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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