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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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이 압권이었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제목을 따온 책이라 그닥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책은 순식간에 페이지가 지나갔다. 맨 뒤의 책장을 넘기며 또다른 젊은 한국 작가의 책 생각을 했다.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두 책 역시 분홍색 표지를 하고 있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후루루 읽힌다. ‘읽힌다’는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읽힌다’는 비문이 어울릴 정도로 노력 없이 읽을 수 있다. 재미있어서, 읽기 쉬워서.

작가의 프로필을 보지 않아도 파랗게 젊으리라는 걸 잘 알겠다. 30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 여성들이 늘상 겪는 일상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약간의 냉소가 섞여 울적하나 코믹하게 보인다.

“빛나 언니에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 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에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P.28)

첫 번째 에피소드 《잘 살겠습니다》에서는 결혼 청첩장 가운데 오가는 머릿속 계산이 실감났다. 나 역시 몇 년 동안 연락이 없다가 필요할 때 연락이 오는 사람들을 마뜩찮아했고, 더 오래 연락이 없다가 결혼한다며 연락이 오는 사람들을 불편해 했으며, 더 심각하게는 결혼식 이후로 연락을 딱 끊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데 ‘그녀’의 머릿속에는 청첩장 줄 때 썼던 식비까지 계산이 되더라.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사회생활하는 어른이지. ‘당근마켓’을 연상시키는 ‘우동마켓’과 거기 유명한 셀러 ‘거북알’의 이야기는 사회생활의 더러움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지우지 못할 거다. 거북알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분노를 금치 못했고 대표의 비열함과 그 결과의 상징인 ‘포인트’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역겨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 먹고사는 게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거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의 후반부는 나의 소개팅 흑역사를 그대로 상영하는 것 같은 착각까지. 아아… 이 작가 정말 포인트를 잘 찝는다.

“진짜 모르겠어요? 내가 지유씨 좋아하는 거잖아요. 저 여자 만날 만큼 만나봤어요. 그런데 여태까지 이렇게, 진짜, 뭔가, 통한다는 느낌이 드는 여자는 단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것 때문에 지유씨 좋아하는 거라고요.”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 (P.96)

《도움의 손길》 역시 강렬했다. 맞벌이 부부, 혹은 싱글 생활자에게 꼭 필요한 도우미서비스를 소재로 하여, 각자 자기 생각만 하는 이기심과 은근히 서로를 간접-직접 착취하는 모습. 우아한 척 우악스러운 척하는 모습이 뒤섞여 괴이했다. 《새벽의 방문자들》은 어떠한가, 혼자 사는 여성의 공포를 그토록 직접적으로-그러나 있을 만한 사건을 대입해서 만든 에피소드라니. 반대편 오피스텔이 성매매 오피스텔일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가 진행되기 전까지 나는 ‘구남친’이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한 요량으로 인터넷 남초 사이트에 그녀의 주소를 올려놓은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물론 있을 법한 상상을. 그리고 바로 그 장면, 머릿털이 쭈뼛 서는 장면. 그녀의 ‘무난해서 완벽한’ 구남친이 성매매를 위해 찾아온 남자들 중의 하나였던 것. 너무나 평범하고 순해 보이는 내 주변 남자들이, 내 소중한 남자친구가 성매매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이건 여성에게 무릎까지 찬 두려움이다.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알고나면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갈 수 없어 더 무서운 두려움. 여성 입장에서야 늘 가진 불안을 글로 읽는 거지만, 이 소설을 읽는 남자들은 엄청 불편했을 것 같다. 그 불편함을 여성인 나로서는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수 없는 불편함이라 또 달리 괴롭고...

항상 수능 5등급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라는 조언을 받는데, 여기 참 좋은 모델이 있었다. 한편 이 정도는 돼야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겠구나 싶어 주눅이 들기도 하고. 세상이 너무 달라졌는데 나는 너무 느리게 올드한 자리를 지키는 건가. 재미있게 읽고 나서도 생각이 많다. 현실이 원래 그런 것처럼, 너무 현실적인 건 너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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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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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키’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라는 네이버 카페 이야기를 듣고 황당함을 넘어서 분노한 적이 있다. 안아키의 운영자 김효진 한의사는 백신이 아이를 병들게 한다며 예방접종을 거부하고, ‘자연 치유’를 해야 한다면서 앓는 아이를 그대로 방치한다. 그걸 몸 공부라고 부르면서 아이를 그대로 둔다. 한편 종교 때문에, 수혈을 하면 안 된다는, 부모의 신념 때문에 수술을 못 하는 아이를 TV에서 본 적도 있다. 아이는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며 수술을 하게 해 달라고 울부짖었지만 부모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기도만 했다. 이건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아이에게 고통을 주는 거다. 분명 아동학대다. 그런데 이걸 결정할 수 있는 건 왜 부모뿐인가? 누군가가 여기에 개입할 수는 없는가. 아니... 좀 더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뭐지? 대체 무엇이 부모를 그렇게 만든 걸까? 혼란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 잊고 있었던 그때의 감정이 『면역에 관하여』를 읽으면서 치솟아 올랐다.

저자 율라 비스는 첫아이를 낳으면서 자궁내반증을 겪고, 그 과정에 타인의 피를 받아들이고, 타인의 손이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건강의 천신만고 끝에 생명을 건지고 아이를 품에 안은 후, 어머니로서의 작가의 고민은 깊어진다. 모든 초점이 건강에 가닿았다. 자기의 몸은 이미 경계가 없이 세계와 뒤섞인 경험을 한 어머니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이에게 백신을 접종할 것인가, 아이가 이 백신을 감당할 만큼 강인할 것인가. 게다가 그녀가 아이를 낳은 2009년은 신종플루가 세계를 휩쓴 해이기도 했다. 더욱 고민의 양상이 다르고 깊을 수밖에. 그녀는 “모든 의심의 오솔길을 직접 걸어본 뒤” 결론을 내린다. 백신은 꼭 필요한 것이라고. 현대의학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라면 순수한 자연의 몸이라고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다고. 의학 덕분에 우리의 몸은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거라고. 우리 몸은 수많은 생물이 기생해 함께 살아가는 전쟁터라고. 무엇보다 우리 몸은 서로의 면역에 기대어 안전할 수 있는 연대된 공간이라고.

사실, ‘백신 찬성’은 책을 고를 때부터 예상한 결론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면역에 대한 이야기인데.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의 면역 필드는 구멍이 나는데. 다만 『면역에 관하여』의 탁월한 점은, “모든 의심의 오솔길을 직접 걸어본” 저자의 고민의 흐름을 따라, 백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 역시 (앞서 있어 온 신화, 역사상의 문제를 통해 ) 살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신을 접종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또한 다양한 비유를 통해 아름답게 서술한 것이다. 같은 정보를 전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어떤 모양으로 강약을 다르게 해서 전달하는지는 또 다른 차원의 능력이다. 그것이 아마 우리가 늘 고민하는 평범과 비범 사이일 것이다. 단언컨대, 이 책의 여러 면면은 아름다웠다. 이토록 아름다운 과학책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나는 『면역에 관하여』에서 강조하는 ‘몸’의 이야기에 목하 동의했다. 그것도 여러 번 손뼉을 치면서 몸의 이미지를 다시 그리고 또 그렸다. 의학의 혜택을 입은 인공적인 사이보그로서의 몸이 아니라, 침투성이 높은 불완전한 경계로서의 피부로 둘러싼 몸 말이다. 이 피부의 개방성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다른 몸들과 이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이미 스킨십의 힘을 경험해 알고 있지 않은가. 바이러스와 세균의 침투뿐이 아니라, 몸의 온도와 인간적인 교감, 감정의 교류가 가능한 피부 접촉의 힘을. 이 몸의 개방성 덕분에 우리는 아프기도 하지만 타인과 연결되고 세계와 연결된다. 그러니 우리가, 나 혼자의 몸뿐이 아니라 연대한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는 감정적으로뿐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뭐, 제대로 고민했다면 결론은 동일하겠지만. 서로의 몸에 빚진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서로의 몸에 연대한 공간이 면역이라는 건 더할 나위가 없고. 이 공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몸을 가지고 한 몸이 된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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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 - 조현병 환자의 아들들이 들려주는 열두 가지 이야기
수잔 L. 나티엘 지음, 이상훈 옮김 / 아마존의나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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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가면서 배운 건 다른 사람들이 너를 해치기 전에, 네가 먼저 해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널 존중받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극복하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좋은 상담치료사를 만나고 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저의 삶은 파괴되었을 겁니다. 나는 지금의 인터뷰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 치료사는 저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아무도 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그만큼의 충분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아 두려웠었어요. 아마 6주나 8주 정도 그녀와 만날 수 있겠지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2~3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수잔 나티엘, 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 아마존의 나비, 2020, P.117

 

지인 하나가 울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묵묵히 듣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이는 자기 삶이 너무 어렵고 버거워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곤 했다고 했다. 그렇게 불꽃처럼 불타오른 후 한동안 도망쳐 있기를 반복했다고. 자기를 재처럼 소진한 후에 자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 하는 행동을 통제할 수 없었다고. 그러면서 자기 가정의 어려움과 결혼 후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살기 위해 상담을 받았고, 상담을 공부했다고. 자기 문제가 양극성 장애임을 알고 나서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조증(존 가트너, 살림비즈)을 읽었던 후라 그이의 행동이 조증과 일치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고, 이후 낙차 증상도 받아들여졌다. 내가 그에 대해 느낀 마음은 무엇보다 존경심이었다. 자기 어려움을 인식하고, 증상에 휘둘리면서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러다가 상담을 만나고, 신뢰할 수 없는 상담자를 신뢰해 보려고 노력하고, 하기 싫어도 믿을 수 없어도 꾸준히 상담을 받고, 결국에는 상담을 공부하고 대학원을 진학한 그 사람의 삶이 무엇보다 진솔하고 존경스러웠다.

 

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은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에게 다가가 그들의 삶을 진솔하게 묻고 기록한 인터뷰집이다. 특히 그들의 아이가 부모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과 생경함과 고통을 날것의 언어로 기록한다. 부모의 증상이 발현될 때 아이에게 가하는 충격은 가히 파괴적이다. 그 간극 때문에 큰 상처를 남긴다. 그런데도 상처를 입은 아이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극복해 나간다. 저 돌변은 병 때문임을 인지하고 부모의 본성은 다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이들은 부모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은 삶을 꿈꾼다. 물론 순순히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는다. 부모로 인해 그들이 보고 들은 것 때문에 삶은 그야말로 고통스럽다. 선선히 건강하게 성장하는 게 불가능한 게 더 자연스럽다. 사실 나의 눈에도 그런 케이스가 현실에서는 더 많이 보이고. 이 책에서 나온 인물들은 약간의 행운 덕일까? 긍정적인 성장도 비교적 많이 이루어냈다. 그러나그들이 부모를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받아들인 후, 자기 상처를 인정하고 자기 성장을 위해 발버둥을 친다는 면에서 삶은 가치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지만, 아이 역시 부모에게 영향을 미친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생명의 본능으로 삶을 투쟁한다. 그게 대단한 것 아닐까.

 

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은 대상자 인터뷰이에 대한 인터뷰, 대상자에 대한 인터뷰어 수잔 나티엘의 고찰 및 이 이야기를 통해 새로이 배워야 할 점, 거기에 옮긴이 이상훈의 후기로 구성된다. 이러한 흐름은 인터뷰를 마무리를 짓는 역할을 하면서, 저자의 의도를 집중감있게 전달한다. 옮긴이의 후기 역시 깊이 있고 진중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구성이 무척 좋았고, 읽는 이를 배려하는 편집이라고 느꼈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정신적 고통을 겪은 화가의 컷도 세련되었으며, 보라색을 기조로 한 편집 디자인이 세련되어 읽기가 좋았다. 편집 디자인에 민감한 독자로서 편안함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조현병 화가 리처드 대드의 강렬한 삽화 선정이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세상이 지켜주지 못한 아이들은 낯선 주제 때문에 어렵게 느낄 수 있지만, 일단 읽기로 결심하고 나면 무척 쉽게 책장이 넘어가는 책이다. 주제의 낯섦을 넘어선 나놈에게 쓰담쓰담을. 편견과 선입견은 벗겨내면 그만인 셀로판지일 뿐. 이제 정신질환 분야에 대해 아주 약간의 이해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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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왕의 사회학 -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
최종렬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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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born 서울내기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지역 학교를 졸업했고 직장 역시 서울에서 잡았다. 사는 곳은 서울 안팎을 왔다 갔다 했지만 삶의 80퍼센트 이상을 서울에서 살았다. 지금도 사는 지역보다 서울지역 지리가 더 익숙하다. 상대적으로 지방은 내게 낯설고 어려운 곳이다. 비교적 가까운 강원도나 충청도는커녕 지금 살고 있는 경기지역마저도 한두 정거장만 더 가면 낯설기 그지없다. 그 말은 내가 서울의 지리뿐 아니라 서울의 문화와 인간관계 분위기에 익숙하다는 의미다. 사실 구직할 때 서울 외 다른 지역에 지원할 생각을 못 해본 건 그 낯섦을 극복할 요만큼의 용기도 의지도 없어서였다. 서울 밖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으니까. 연고도 없지만 아는 것이 없다는 건 두려움이기도 하고 머나먼 거리감이기도 하다.

『복학왕의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대구 경북 지역은 거리감을 가늠하기도 힘들 만큼 먼 지역이다. 딱 한 번 KTX를 타고 출장 간 길에 들른 대구는 고속기차를 타고도 세 시간이 걸릴 만큼 멀고도 멀었다. 이렇게 멀기만 한 ‘지방’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복학왕’이라는 구수한 키워드로 나의 흥미를 끌었다. 귀여운 제목과 아기자기한 삽화는 묵직한 책을 가뿐하게 만들며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의지를 자극했다. 그러나 묵직한 책은 무게 값을 한다. 진짜 진짜 길었다. 후반부에는 지루해서 책장을 휙휙 넘길 만큼 체력이 달렸다.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명확한데 사회학적 ‘질적연구’가 그렇듯이 예시가 많고 길어서, 아주 충실하지만 집중력이 축나는 책이기도 했다.

『복학왕의 사회학』은 반(反)자기계발서 같다. ‘서울내기’인 내게 “바쁨”과 “열심”이 혼합된 자기계발서적 삶은 너무나 익숙하다.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되고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하고 잠을 줄여서 공부하고 라이벌을 이겨야 하고 미래를 위해 오늘을 한순간이라도 낭비하면 안 되는 삶. 그것이 내가 알아온 대학생과 직장인의 보통 삶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 정말, 너무나 낯설다. “경쟁의 장”이 아닌, “가족의 장”에서 사는 사람들. 그들이 지방의 사람들이었다.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최종렬 교수는 2017년, ‘복학왕의 사회학 :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 분석’이라는 논문을 써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복학왕의 사회학』은 그 논문에 내용을 덧붙여 발간한 책이고. 제목 자체가 논문의 그것이라기에는 친근하고 귀에 쏙 들어온다. “지방대생은 이렇게 산다”는 논문의 부제 그대로 내용이다. 최종렬 교수는 지방대 재학생, 졸업생, 지방대 부모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데, 핵심은 계속 반복되는 키워드에 있다. “성찰적 겸연쩍음”“적당주의 집단 스타일”“가족만이 최고”라는. 열심히 하고 잘 될 거라 확신하기엔 뭔가 부끄러운 겸연쩍음, 큰 욕심을 낸 적도 없고 욕심내야 할 필요성도 못 느끼는 적당주의, 내 주변 가족들과 친구들만 잘 챙기면 되고 연줄로 인해 많은 것들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가족주의가 이 책을 가득 채우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다만 이들 역시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잘 사는 것” 늘 고민하는 것이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를 “복학왕”의 잘 살기는 “평범”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모두의 아주 다른 모습이다. 정말이지 사람 사는 게, 소망과 목적은 다 똑같다.

솔직히 몰랐다기보다는 피상적으로 알았다는 게 정확하다. 나는 지방의 이야기를 아주 몰랐던 건 아니지만 굳이 알려고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서울에서 태어났으니까, 서울에서 직업을 가졌으니까, 내가 서울에서 월급을 받고 사니까, 내가 서울에서 노니까. 사는 게 급하다 보니 그랬다는 것 역시 너무나 자기계발서적이다. 왜 모든 담론이 서울 및 수도권 중심인지, 지방민들이 왜 서울에 정착하기가 어려운지, 임금과 부동산 등 서울과 지방의 생활 격차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미처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복학왕의 사회학』은 신선한 책이다. 지나치게 길고(두껍고), 그로 인해 흥미롭던 이야기가 재미 없어져 버렸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팩트의 감각』에 이어 최근 읽은 책들 몇몇이 편협한 내 시각을 계속 깨우쳐준다. 그냥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내가 선 발밑만 보게 된다. 나와 그들이 늘 그리하듯이 “잘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잊으면 안 된다. 제대로 살려면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계속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도끼같은 책”도 계속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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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의 감각 - 믿음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법
바비 더피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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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j는 가장 파악이 잘 안되는 MBTI 유형이라고 한다. 성질 자체가 상황 혹은 상대방의 맞춤형 변신을 잘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의 장점을 잘 흡수하기도 하고, 가장 T를 잘 활용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고 한다. 20대 초반 나에게 처음 MBTI를 가르쳐 준 MBTI 연수원 오빠는 “너는 전형적인 INTJ 여성이야”라며 “우리 같이 T가 발달한 인간은 왕따 중의 왕따라 외로워도 슬퍼도 꿋꿋이 살아야 해”하며 나의 T 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꿋꿋한 T 인간이 아니었다. 인생의 질곡을 굽이굽이 넘어서자마자 나는 본성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흐트러진 실같은 F형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꽂히는” 데 약하다. 자료를 분명 보고 분석하지 않는 건 아닌데, 결정적인 순간은 내 감정이 가는 곳이다. 마음 가는 대로 해 댄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많고 불안도 크다. 『팩트의 감각』은 이런 나의 F 력 단점을 지그시 바라보며 시각의 전환을 요구했다. 책의 이야기는 한 줄로 요약된다. “FACT를 가지고 현상을 찬찬히 알아보면, 느낌이나 감정으로 받아들였던 것보다 실제는 훨씬 다르다는 것.” 그러니 제대로 인식하자는 것. 잘못된 인식을 발견하자는 것.

저자 바비 더피는 《1장 건강: 나 정도면 비만 아니야》, 《2장 섹스: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 《3장 돈: 은퇴 비용, 얼마가 필요할까?》, 《4장 이민과 종교: 외국인 노동자가 정말 내 일자리를 위협할까?》, 《5장 범죄와 안전: 전 세계 테러는 정말 급증하고 있을까?》, 《6장 선거: 정치인들의 말에 속지 않으려면》, 《7장 정치: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이 말하는 교훈》, 《8장 온라인 세계: 거품 가득한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법》, 《9장 전 지구적 이슈: 세상은 나빠지고 있다? 나아지고 있다! 》, 《10장 어느 국가가 가장 많이 틀렸을까?》, 《11장 팩트 감각을 살려주는 열 가지 방법》의 열한 장의 구성으로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하고 팩트 감각을 기르는 법을 요약하여 알려주는데, 각 장마다 제시하는 일상적 주제와 통계들이 피부에 와닿아 매우 흥미롭다. 물론 《11장 팩트 감각을 살려주는 열 가지 방법》만 읽어도 『팩트의 감각』의 주제를 파악하는 데 무리가 없겠지만, 1장부터 9장까지 삽입된 이민자 수, 10대 임신율, 범죄율, 비만율, 세계적 빈곤 문제의 동향, 페이스북 이용자 수 등의 주제별 여론과 통계와의 간극은 지극히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나라마다 다른 인식의 갭, “평균 추측 값과 실제 비율의 차이”를 분석한 10장이 흥미로웠는데, 1) 감정 표현의 정도, 2) 교육 수준, 3) 미디어와 정치 수준 중 ‘1) 감정 표현의 정도’, 즉 자신감을 표현하는 민족성에 대한 정도만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2)와 3)에도 몇 개의 끈이 연관을 찾을 수는 있지만 지나친 자신감만큼은 아니다. 이것 역시도 “내가 보는 것이 전부”라는 인식의 오류가 ‘팩트의 감각’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책을 읽으며 내내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떠올랐다.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지만, 곧 세상의 종말이 다가올 것 같지만, 사실 세상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으며 더욱 희망적이라는 것. 스티븐 핑커 역시 바비 더 피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논증했다. 이제 나는 자신 있게 『팩트의 감각』을 추천한다. 무엇보다 술술 읽히고 재미있다. 책에 있어 이보다 더 좋은 덕목이 또 있나 싶다.

특히『팩트의 감각』은 내 인식의 부족분을 살짝 괴어주는 듯한 좋은 책이었다. 그동안은 대개 ‘하트의 감각’으로 세상을 살아갔다면 이제는 ‘팩트의 감각’을 먼저 사용하도록 바로 오른손 위에 오른 눈 위에 두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봤는데, T와 F의 간극에서 나는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어떤 문제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세상과 타인의 인식에 대한 문제라면 ‘팩트의 감각’에 최선을 다해 선택하겠지만, 나 자신에 대한 문제라면 ‘하트의 감각’을 믿을 수밖에 없으리라. 가능한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 순간에는 ‘팩트의 감각’과 ‘하트의 감각’이 꼭 같은 방향을 가리키기를, 적어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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