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삶 - 살면서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
류대성 지음 / 현암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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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없는 삶”


오랫동안 나의 삶을 지배해 온 개념이다. 무얼 시도해도 깡그리 실패하고, 누구에게 다가가도 번번이 거절당했다. 세상은 늘 나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가 바라던 문제를 모두 ‘노답’으로 내놓았다. 그러다 보니 가능한 둔감해져야 했다. 어디에도 답하지 않고 어디에도 다가가지 않는 삶이 편했다. 『질문하는 삶』의 저자는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적당히 비겁하게, 때때로 흔들리며 주어진 길을 걷는다.” 고백하지만, 흔들린다는 건 고민한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몇 번 흔들리지도 않았다. 초지일관 비겁했으니까. 나는, 오래 꾸준히 고민하지 않았다.


『질문하는 삶』은 무엇보다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것인가 하는. 모든 사람이 목숨을 살지만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지는 않는다. 이 비싼 목숨 값을 치르고 하루하루를 사지만 같은 밀도로 하루를 살지 않는다. 제대로 산다는 건 무엇인가? 『질문하는 삶』을 읽으며 내가 물은 것은 내내 그것이었다.


삶은 그 삶을 살아내는 주체로 인해 결정된다. 누가 주인이냐에 따라 삶의 밀도나 성격이 달라진다. 제대로 된 주인은 누구인가. 이 책의 저자가 ‘인간다움’으로 제시한 것은 ‘질문’이다.


『질문하는 삶』에서 제시하는 열두 개의 질문은 지극히도 간결하다. 돈, 소유, 놀이, 사랑, 학교, 리더, 정치, 인권, 편견, 관점, 죽음, 행복을 주제로, 《행복은 얼마면 살 수 있을까?》 묻기 시작해 《나만의 길을 걷는 행복》으로 다시 의문을 갖게 한다.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책을 덮은 순간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 질문을 연쇄하는 방식이 세련되기 그지없다.


책을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질문하는 삶』의 완성도가 높다는 데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열두 개의 질문을 풀어가는 방식이 모두 비슷한 밀도와 무게를 지녔다. 그러나 텍스트의 무게는 읽는 각자에게 다른 법이다. 내게 특히 묵직했던 챕터는《죽으면 고통도 사라질까?》였다. “죽음에 대한 관심은 삶에 대한 열정이다."라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저자가 제시한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죽음을 합리적으로 대면하기에 인간의 심장은 너무 조그맣다. 이 질문에 ‘훌륭하게’보다 ‘소소하고 따뜻하게’로 대답한 사람들이 나와 같은 피를 가진 책 친구들이리라 믿는다.


“죽음은 삶의 종착역이자 지극히 정상적인 자연의 질서다. 이 질서에 순응하면서 ‘죽으면 정말 모든 게 끝날까?’라는 질문을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바꿔보자. 그래도 아버지를 여읜 윤수에게 죽음은 여전히 불편하고 두려운 대상이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도대체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질문하며 살아가는 윤수에게 뚜렷한 목표, 세속적 성공을 향해 달리기보다 따뜻하고 작은 행복이 더 소중해 보인다. 아버지가 그립지만 자신도 언젠가 아버지 곁으로 간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그때까지는 후회 없이 살 생각이다.”(류대성,『질문하는 삶』, P.283)


내 ‘노답 인생’은 삶에 답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러나 ‘질문하는 삶’은 삶에 답이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 이 개념의 차이, 삶의 태도가 나와 저자와의 머나먼 차이를 만든다. 이 책의 부제는 ‘살면서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 삶의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내가 딛는 길이 어떤 풍경인지, 어떤 방향인지, 어떤 각도인지 때때로 멈춰 점검해야 한다는 걸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나도 누군가의 곁에 갈 때까지 천천히, 후회 없이 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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