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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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중략)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중략)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_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남자와 여자는 사건을 만들지만 이야기의 깊이를 만드는 건 ‘여자’다. 『대설주의보』의 모든 단편들을 읽고 난 후 든 생각. 모든 이야기 가운데 남자와 여자가 얕거나 깊거나 비밀스럽거나 막장인 사랑을 한다. 평범한 남녀의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한편, ‘평범한’ 이야기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각자 기막힌 부분을 품고 있는 것을.

『눈의 여행자』를 읽고 고른 『대설주의보』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전작처럼 장편소설일 줄 알았지,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같은 이야기일 줄 알았지. 눈 이야기인줄 알았더니 눈 이야기는 하나뿐이다. 역시 내 기질에는 한 권짜리 장편이 더 맞다. 그리고 표제작인 ‘대설주의보’는 참 좋은 이야기였다. 참, 좋았다. 과하지 않고 담담하니 참 좋았다. 그리고 해피 엔딩인 것 같아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일곱 개의 이야기 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세 개의 에피소드, 《보리》, 《대설주의보》, 그리고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다. 여기 등장하는 남녀들은 그들의 입으로 말한 대로 ‘남들처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관계’다. 그래서 더 처절하고 더 우스꽝스러워져버린 관계들. 그런데 실은,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가 정말 있다. 꼭 만나지 않아도 이어진 관계. 나이가 들수록 사람과 삶의 면면을 알아갈수록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진다. 목숨은 이상하다. 어떻게든 이어진다. 의도와는 상관없다. 남자와 여자는 사건이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이어진다. 이어지지 않은 듯 보일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는 내뱉는 것이다. “왜 우리는 늘 비석 없는 무덤들처럼 공허한 것일까. 여름 한낮 햇빛에 뜨겁게 타고 있는 빈 마당을 볼 때처럼. 다만 혼자일 뿐인데, 실은 나도 그게 견디기 힘들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남자와 여자인가보다. 누가 그랬더라 일본 소설가였는데,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주름살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있다고. 꼭 눈 덕분(德分)이 아니더라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이는 경우가 있다. 분명 일어나고야 마는 ‘사건(事件)’, 그것을 확인하려고 우리는 계속해서 소설을 읽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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