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수스 The Snowman (Board Book) - Bright & Early Board Books
레이먼드 브릭스 지음 / Random House / 200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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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는 눈이 퍽도 많이 내렸다.

어스름한 어느날 새벽, 창호지 문살에 환한 기운이 비쳐 잠에서 깨어나 방문을 열면 마루까지 흩뿌려져 있던 하얀 눈가루들. 백열전구를 켜고 처마 너머로 내리던 그 소복함에 젖어 한없이 바라보다 다시 들어와 까무룩 깊은 잠에 빠지고, 그러다 늦잠이라도 잘라치면 부지런한 아빠의 지청구를 듣고 오빠와 싸리 빗자루로 눈쓸기 내기를 하곤 했다.

쓸기보다는 눈 굴리기에 정신이 팔려 오슬오슬 추위는 금새 땀으로 바뀌고 우리는 금세 커다란 눈사람을 뒤안 장독대 위에 올려놓곤 했다. 빗자루며 양동이며 장갑이며 숯덩이까지 동원된 제법 멋진 눈사람을 말이다. 집에 들어와서도 눈사람이 잘 서있나 커텐을 들어 확인해 보고 아침을 먹었는데 그 맛은 정말 꿀맛이었다.

눈사람을 만들어본 사람은 잘 알리라. 오후 무렵이 되었을 때의 그 허무함을... 오전에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 나른함으로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오전이 지나갈 무렵 창밖을 내다보면
'어라∼'
거인 눈사람은 그새 난쟁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어릴적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겨울날의 동화를 담아놓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리고 난 이 책을 1996년 여름. 춘천에서 만났다. 교대에 다니며 인형극회 활동을 할 때 춘천 인형극제에 참가했는데 좋은 책 전시회에서 발견하고는 지금껏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소년은 어느 날처럼 저녁 10시쯤 부모님과 인사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밤 12시쯤 깨어 밖을 내다보니 커다란 눈사람 아저씨가 문밖에 서서 인사를 하지 않는가? 소년은 손님을 맞아 집안에 들여 여러 가지 신기한 체험을 하게 해 준다. 아빠의 양복도 입게 하고 놀이기구도 보여주고 사진도 보여주고 말이다.

눈사람은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소년을 데리고 밤하늘을 날아 더 넓은 세상을 맘껏 보여준다. 짧지만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 시간은 지나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소년은 다시 방으로 들어와 잠을 자게된다. 아침에 되어 식사를 하다 화들짝 놀란 듯 소년은 깨어나 밖을 내다보지만 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빠의 모자 아래 녹아있는 질퍽한 얼음부스러기들...

소년과 눈사람의 아기자기한 우정이 화면 가득 펼쳐지다 마지막 장을 열었을 때 하얀 여백 가운데 덩그랗게 놓인 눈사람의 결말이 어찌나 허무하게 느껴지던지... 내 어릴적 느꼈던 그 느낌을 종이에 그래도 재현해 놓은 작가의 구성력에 나는 갈채를 보낸다.

세상사에 지쳤을 때, 어릴 때로 돌아가고 싶을 때 꺼내들고 찬찬히 읽어가다 보면(읽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보는 것이다.) 마음이 어느새 깨끗해지고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글자가 없다. 그런데도 표정이나 주변 묘사로 글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주고 있다.

가끔 나는 아주 마음 좋은 사람을 만나면 어른이든 애든 이 책을 선물하곤 한다. 얼마 전에는 비디오테잎으로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는 테잎을 사서 우리반 아이들과 교실에서 봐야겠다. 이 겨울. 아이들도 티없이 맑은 상상을 하며 아름다운 추억 하나씩 만들어가으면 하는 바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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