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첫사랑도 공부 한댄다
장정일의 공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1월
요즘의 신간 정보는 집게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한 번 꾹 누르기만 하면 뚝딱 알게 된다. 의자에 앉아서 모니터 화면을 보며 신용카드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만이다.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이 전지전능한 카드는 다음 달 내 가슴을 쓰리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책벌레들, 그 중에서 탐서광에 참여하고 싶은 욕망으로 부글대는 독자는 마법의 주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에 책은 많고, 신간은 우박덩이보다 더 많이 쏟아져 나온다. 우라질! 이번 달도 파산을 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책을 사기 위하여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 하지만 내 직업은 축산업+초보 농사꾼이다.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간신히 입에 풀칠하고 연명한다. 연봉이 얼마라는 물음은 금기사항을 넘어 참혹한 말이다. 삼가 달라. 하지만 신간 안내는 구렁이처럼 능글맞게 이젠 이메일까지 타고 넘어 왔다. 매일 아침 요술방망이처럼 신간의 홍수를 만난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글을 쓴다. 글만 써서는 먹고 살 수 없으므로 책을 만들어 판다. 그토록 많은 신간이 지구를 계속 덮고 있다. 신간은 마법을 넘어 나처럼 무일푼의 탐서광에게는 마약 같은 존재다. 마약은 가진 자와 없는 자, 둘 다 필요하다. 가진 자는 인생이 심심해서 필요하고 없는 자는 인생이 고달퍼서 필요하다. 중산층이 결국은 모범생이다. 하지만 가진 자에게 책값은 쓸데없는 일에 돈 낭비하는 일이다. 없는 자에게 있어 책값은 슬픈 꿈의 샘이다. 샘물이 말라가기 전에 한 끼 밥을 굶고 책을 산다. 그러다가 굶어 죽은 19세기 철학자 장 밥티스트 보디의 이야기는 어떤가. 마지막 푼돈으로 책을 사고 굶어 죽은 그처럼 책에 미치면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그의 이름이 ‘밥티스트’인 것은 우리말로 어감이 꼭 밥을 연상한다. 우연이란 동서고금을 넘나든다.
먹이를 찾는 늑대처럼 신간에 눈독을 들이면서 올 해 마지막이라는 결심으로 카드를 꺼냈다. 참나무 서가로 으리번쩍 만든 헌팅턴의 서가는 아니지만 탐서광의 기본자세는 준비되어 있다. 간신히 서가라고 부르는 이 신생서가에 파산의 그림자가 검은 망토를 드리운다. 어쩜 좋누. 미래에 어떤 생계관련 사건이 나를 비참하게 짓밟을지 모른다. 보험이 두 개나 있으니 안심하라는 말은 설계사의 입발린 소리다. 보험금을 내기 위해 수집의 열망을 접고 밤 새 킁킁 울면서 책상자를 꾸릴지도 모른다. 최악의 상상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돈이 있다고 해서 훌륭한 서가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 분야에 전문성을 키우면 된다고 말한다. 이봐요! 대리인조차 구할 수 없는 장발쟝에게 몬테크리스토 백작처럼 변신 할 것을 요구하지 마시라. 펜으로 씌어진 그 책값 때문에 이번 달, 내 저금통장 잔고는 곤두박질치고 있다오. 그러니 이쯤해서 올 해 마지막 카드의 수고를 덜어주기로 주먹을 꽉 움켜쥔다. 진정한 가치는 카드인가, 책인가 하는 논의는 그러므로 나 같은 빈털터리 탐서광에게는 시간 낭비뿐!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애독하다보니 ‘독서일기 7권’을 기다렸다. 1권 초판 인쇄가 1994년 11월 30일에 나왔으니 벌써 12년이 넘어간다. 매직으로 그린 오리그림이 꽥꽥 나불대는 1권의 표지가 재미있어 구입했다. 책을 읽지 않고 살아온 삶인데 어떡하다보니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꾸준히 읽게 됐다. 한 작가의 독서일기를 연속 만나면서 그 작가의 성장을 본다. 장정일이라는 이름이 주는 아이덴티티는 내게 대단했다. 나와 같은 또래의 한 인간이 어떤 책을 읽으며 살고 있는지 엿보기는 신세계로 창문을 여는 일이다. 인생의 항해는 계속된다. 책도 노를 저어 나간다. 지겹고 지루한 바다위에서 창문을 열고 새로운 지평선을 두리번거리는 맛. 분명 이 작가에게서는 맛이 달랐다. 시스터후드(자매애)로 표출되는 여성 작가들을 까발리는 솜씨가 탁월하다. 가차 없는 독설과 직선화법. 공지영과 신경숙을 제단위에 희생물로 받쳤다. 김훈의 마초정신과 '~~다'로 싹둑 잘라버리는 문체와 또 달랐다. 세월이 흘러 그도 나도 마흔을 넘었다. 제2의 마광수가 될 것처럼 보였던 장정일은 삼국지로 방향을 틀었다. 엉덩이에 묻히는 대신에 무림의 숲으로 들어 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독자인 나도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이번에는 장정일의 책만 읽은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인간들이 수 없이 많은 글을 쓰고, 책까지 뚝딱 만들어 낸다. 선택은 자유다. 자유의 찬가를 부르면서 활자에 기웃거리기 시작하면서 다시 장정일의 ‘생각’을 만났다. 애증의 감정이 든 책이다. 젠장, 언젠가 시인 김승희가 ‘서른셋의 팡세’가 어쩌고 하는 산문 모음집을 펴내면서 나를 실망시키더니 이젠 당신마저! 하지만 생각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 생각은 그랬다. 한 번 준 정(情)이 그렇게 뿌리가 단단할 줄 몰랐다. 그래도 첫사랑에 관한 몽롱한 환상은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첫사랑을 다시 만나 불륜의 불꽃놀이로 사고를 치는 어른들이 왜 줄어들지 않는 것인가. 첫사랑이 무슨 죄냐. 환상을 간직하고픈 불나방에게 행복을 빌어주자. 장정일은 내게 여전히 첫사랑이다. 내 가슴속에 뿌리내린 그의 이름을 악마가 사포로 박박 문질러 버린다해도. 무림계로 들어가 칼잡이가 될 줄 알았더니(그의 독설이 충분히 그럴만하다)이번에는 공부를 하셨다. 오, 그러니까 이젠 인생의 공부, 세상을 보는 초점을 조절하는 공부를 하셨단다. 마흔이 넘으면서 그도 나도 공부를 하는 공통점이 있다니! 황홀하다. 세상은 이것을 늦깎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나처럼 중구난방의 뻥쟁이는 삼 일간 유효한 말이다. 여하튼, ‘공부’라는 말은 지겹지만 공부는 피할 수 없다. 신간 안내 메일을 확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매번 실패하는 것처럼. 이것은 화두다. 모질고 끈덕진 놈. 질기기가 삼 년 동안 된장독에서 묵힌 쇠심줄보다 더하다. 공부, 공부, 공부. 공부하기 싫은 자 ‘공부’ 책으로 대신해 볼까 해서.
*그나저나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은 왜 언능 출간되지 않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