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기독교
프란시스 쉐퍼 & 한스 로크마커 지음, 김진선 외 옮김 / IVP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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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시스 쉐퍼 & 한스 로크마커, <예술과 기독교>

 

 

[자유와 아름다움을 향한 여정]

 

1. 예술과 성경 (프란시스 쉐퍼)

 

p9-10

(그리스도의 주재권)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예술을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생활의 나머지 영역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그 범위를 매우 협소한 삶의 영역으로 축소시켜 적용해 왔다. 우리는 인간의 전 영역과 우주의 전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잘못 이해해서,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의 삶과 문화에 성경이 제공하는 그 부요함에는 아직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삶의 전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재권이란 의미는, 기독교는 이상적인 영역이 따로 존재할 수 없으며 육체와 영혼에 대한 위계나 이분법이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창조하셨고 그분의 구속 사역은 전인(the whole man)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영혼이 구원을 받고 천국으로 간다는 데 지나치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인간의 전인성에 대해서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종종 받아왔다. 그러한 비판은 타당성이 있다

 

p13

  예술에 대한 관심에도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적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예술들을 단순한 삶의 한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도구로 보고 이러한 예술들을 사용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 예술 작품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될 수 있다.

   

p19

  “또 솔로몬은 보석으로 전을 꾸며 화려하게 했으니”(대하3:6). 성전은 아름다움을 위해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성전을 보석으로 꾸밀 실용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어떤 실리적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성전 내부가 아름답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미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p37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주인이시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진리뿐 아니라 아름다움도 창출해야 한다

 

p39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의미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p73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은 상상과 환상의 위협을 받을 필요가 없다. (..)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자유로운 인간이다. 다시 말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존재다. 이것 역시 우리의 유산이다.


2. 예술과 그리스도인 (한스 로크마커) 

 

p29

  교회의 후퇴로 말미암은 두 번째 결과는 기독교계 내에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를 단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거나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려 함에 있지 아니하고, 우리를 구속하셔서 참 인간이(이 말이 지니는 충만한 의미에서) 되도록 하심에 있음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함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충만하고 자유롭고 인간다운 능력을 발휘하며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p34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현대의 풍요가 어디까지 복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혹은 어디까지 저주로 변해 버린 복에 해당하는가 하는 것이다.

 

p42

  복음 전도의 틀에 맞추기 위해서는 자주 타협을 해야, 즉 예술을 팔아야 한다. 그런데 헨델의 메시아”, 바하의 마태 수난곡”, 렘브란트의 부인한 베드로”, 그리고 시토 수도회의 건물들은 복음 전파의 수단도 아니며 복음 전파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작된 것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예술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적 선전, 혹은 거룩한 광고를 위한 수단을 제작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심오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 작품들은 영혼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고, 그 자체로서 목적이었으며 의미가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무엇인가 호소하려 하거나 원래 예술이 전달할 내용이 아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바로 그러한 노력 속에서 예술이 비정직해지고 이류로 속화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p42-43

  참으로 예술가에게 복음 전도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예술의 의미,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다른 활동의 의미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는, 자든지 먹든지 혹은 열심히 일하든지 항상 그리스도인이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다. 우리 기독교는 경건한 순간들, 종교적 행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목적도 복음 전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인 것이다.

 

p45

  몇몇 토론회에서 나는 종종 그리스도인으로서 작업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여기에서 받는 느낌은 흔히 이러한 질문들은 율법주의적 틀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마치 기독교적 요소는 몇몇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인데, 그 규칙도 대개 부정적인 것들이다. 예컨대, 내가 이것을 해도 괜찮을까? 그것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영성을 너무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라 불리는 특별한 것이 부가된 인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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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쉐퍼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분의 구속 사역은 전인(the whole man)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그분 밖에 있는 것을 명백하게 구분하거나 배제시킬 수 없다. 모든 것은 그분 안에 있다. 아무리 세속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분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율법주의’ 혹은 문화 예술기독교 전통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일 것이다. 이 투쟁은 사실 기원전후부터 시작되었다. 구약과 신약,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방인), 할례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믿음이냐 계명이냐 등. 그러나 자유는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율법을 완성한다. 율법이 자유를 끌어안을 수는 없지만, 자유는 율법을 끌어안을 수 있다. 여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의의가 있다.

 

 우리는 견고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세상 모든 만물을 누릴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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