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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칼 세이건이 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
칼 세이건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12월
평점 :
지난 1일,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서 ‘혁신의 세기’란 주제로 두 차례의 대중 강연이 있었다. 강연의 강사는 ‘우주과학 대중화의 선구자’라 불리는 세계적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 강연을 선채로 끝까지 해냈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강연을 마친 후, 강연장에는 십여 분간 박수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그 강연이 너무나 무리였는지, 그는 강연을 마치고 이틀 후인 3일, 시애틀의 허치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병세가 악화가 됐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이내 호전이 되었다고 하여 그가 입원해 있는 병실을 찾아가 보았다.
병실에 들어서자, 먼저 그의 아내 앤(앤 드루얀)이 우릴 맞아 주었고, 그는 쿠션에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그의 안색은 얼핏 봐도 지난번 강연 때 보다 안 좋아보였지만, 표정만큼은 밝게 살아있었다.
- 먼저,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소문에 의하면 지난번 강의 때 너무 무리하셔서 병세가 많이 안 좋아지셨다고 하던데, 좀 괜찮으세요?
“뭐 그냥 그렇죠.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웃음)”
- 그래도 안색이 좋아 보이시네요.(웃음) 2주전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서의 강연은 정말 멋졌습니다. 한마디로 감동의 물결이었습니다. 많이 힘드셨을 텐데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오시는지 대단하십니다.(웃음)
“처음 강단에 섰을 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니 저절로 힘이 나더군요. 게다가 이거 대충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부쩍 들더라고요. 그래서 젖 먹던 힘까지 내서 했죠.(웃음)”
혁신의 세기
- 지난 강연에서 ‘혁신의 세기’라는 주제 아래, ‘인간 생명의 구조와 연장과 증진’과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군사기술’, 그리고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 세 가지를 말씀하셨죠. 그 중에선 이 말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과학기술은 빼앗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우리에게 준다’ 선생님 말씀대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 등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더라고요.
“졸지 않고 열심히 들으셨군요.(다같이 웃음) 사실이 그렇잖아요.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평균 수명의 증가일 것입니다. 1901년 미국과 서유럽의 평균 수명은 약 45세였으나 오늘날에는, 남성과 여성의 편차가 있긴 하지만 거의 80세에 접근하고 있죠. 평균 수명은 단연코 삶의 질을 측정하는 가장 효과적인 지표입니다. 사망한 사람은 더 이상 좋은 시절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억 명의 인구가 식량 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매일 4만 명의 어린이가 별다른 이유 없이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 부분이 바로 앞으로의 우리 과학이 해결해야할 과제이지요. 제가 한 말은 분명 과학이 빼앗는 것보다 많은 것을 주지만, 그 빼앗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부분이 앞으로의 과학이 해결해야할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 되고요.”
- 20세기가 지나는 동안 과학의 모든 분야는 놀라운 진보를 거듭했는데요. 그중 가장 큰 업적이라 할만한 게 무엇이 있을까요?
“음……. 글쎄요. 일반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 등 많은 진보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과학적 개가를 들자면 DNA의 성격과 기능을 발견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디옥시리보핵산의 약어인 DNA는 인간과 동식물의 유전을 담당하는 핵심 분자입니다. 우리는 유전 정보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갈수록 많은 유기체들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해 가고 있으며 각각의 유전자들이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지를 알아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전학자들은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고 있고요.”
- 그 문제에 있어선 상당히 많은 논란이 예상되겠는데요? 윤리적 문제에서도 그렇고, 악용이 될 시에는 엄청난 해악이 될 수도 있고요.
“네, 맞습니다. 그 성과는 인류에게 큰 이익이 될 수고 있고 엄청난 해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DNA 연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생명의 근본 과정을 이제는 물리학과 화학의 관점에서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20세기에는 생명의 기원을 이해하고 확인하는 분야에서 상당한 진보가 이뤄졌습니다. 생물학은 화학으로, 화학은 생물학으로 치환될 수 있음이 확인 되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약간이라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수십억의 수십억(billion & billion)
- ‘칼 세이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있죠?(웃음) ‘수십억의 수십억(billion & billion)’ 이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결코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요. 정말입니다. 물론 은하는 천억 개 정도이고 별은 백억 조 가량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주를 이야기하면서 큰 수를 사용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텔레비전 시리즈 ‘코스모스’에서 여러 차례 ‘십억(bill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절대로 ‘수십억의 수십억’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것은 너무 부정확해요. 십억이 얼마나 모여야 ‘수십억의 수십억’이 될까요? 수십억 개? 이백억 개? 천억 개? ‘수십억의 수십억’은 참 막연한 수입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조니 카슨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몇 년에 걸쳐 그가 진행하는 ‘투나잇 쇼’에 거의 30회 출연했었죠. 그는 내 흉내를 내기 위해 코르덴 자켓과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성긴 더벅머리 가발을 쓴 채 심야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 유령놀이를 하듯이 ‘수십억의 수십억’을 되풀이 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며)나를 가장한 어떤 환영이 제멋대로 배회하다니 나로서는 조금 괴로운 일이었죠.”
- 조금 괴로운 정도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다같이 웃음)
“그런데 놀랍게도 ‘수십억의 수십억’이 유행어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발음을 좋아했죠. 심지어 요즘에도 거리에서나 비행기에서 혹은 파티에서 나를 붙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수십억의 수십억’을 한번만 말해달라고 청하곤 한답니다. 지금도 여러 곳에서 나를 이 천진난만한 표현의 주인공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선 컴퓨터 잡지들이 그렇고, 신문지상에 소개되는 경제학 입문서, 프로 스포츠 선수들의 연봉에 관한 토론회 등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어린아이처럼 토라져 그 표현을 글로 쓰거나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누가 부탁하든 소용없었죠.(웃음)”
- 그렇다면 이 말이 왜 그렇게 유명해졌을까요?
“저도 상당히 궁금하더군요. 그래서 어느 날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았죠. 왜 그렇게 유명해졌을까 하고 말이죠. 과거에는 ‘백만(million)이란 단어가 아주 큰 수의 대명사였습니다. 엄청난 부자는 백만장자라고 불렀죠. 예수가 살던 때 세계인구는 십억 단위에 못 미치는 2억 5,000만(250 million)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무렵 인구는 1억 3,200만(132 million)이었습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는 9,300만(93 million) 마일, 혹은 1억 5,000만(150 million) 킬로미터입니다. 아주 쉽게 확인 할 수 있는 것으로서, 1년은 3,170만(31.7 million) 초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습니다. 이제 세계는 ‘억’만장자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지구의 나이는 46억(4.6 billion) 년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인구시계는 60억에 이르렀고요. 또한 미국과 러시아가 전면적인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단순 사상자는 약 10억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됩니다. 4인치는 약 10억 개의 원자가 나란히 배열된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주에 떠 있는 별과 은하의 개수도 수십억이죠.”
- 그렇다면 시대적 변화에 동반한 숫자적 개념의 변화에 의한 것이라는 건가요?
“1980년 텔레비전 시리즈 ‘코스모스’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미 수십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백만이란 말은 왠지 규모가 작고 구식이며 인색하게 여겨지던 터였습니다. 사실 이 두 단어는 발음이 아주 흡사해서 진지하게 들어야 구별이 가능합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코스모스’에서 ‘수십억(billion)’을 발음할 때 파열음 ‘b'를 강하게 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특이한 억양이나 언어적 결함으로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 그런데 이런 숫자적 개념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500만 년이건 50억 년이건 개개인의 생활은 거의 달라질 것이 없지 않은가요?
“그렇죠. 지구의 운명처럼 흥미 없는 이야기에 불과할 수가 있죠. 그러나 밀리언과 빌리언의 차이가 훨씬 심각해지는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국가 예산이나 세계인구, 핵전쟁의 사상자 수 등이 그러합니다. ‘수십억의 수십억’의 인기가 완전히 가신 상태는 아니지만 이미 이표현은 다소 규모가 작고 편협하게 느껴집니다. 훨씬 더 강한 바람을 일으키는 숫자가 출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그 다음의 의미도 나올 수 있다는?
“네, 맞습니다. 이른바 ‘조(trillion)'의 시대가 임박한 것입니다. 전 세계의 연간 군비 지출은 거의 1조 달러에 달하고, 개발도상국들이 서구 은행에 진 부채의 총액은 (1970년 600억 달러에서) 현재 2조 달러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의 무게는 1조 톤이다. 별과 ‘조’는 본질적으로 친밀합니다. 지구와,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별 알파켄타우르스까지의 거리는 25조 마일, 약 40조 킬로미터입니다. 이런 거대한 수들은 현대 과학의 핵심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렇기에 단지 ‘숫자적 개념의 변화일 뿐’이라고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콘택트(Contact)
- 영화 얘기를 좀하죠. 선생님께서 85년도에 쓰신 ‘콘택트(Contact)’란 소설이 동명의 영화로 제작 중인데, 선생님께서도 직접 제작과정에 함께 참여하신 다고 들었습니다. 잘돼가고 있나요?
“감독(로버트 저메키스)이나 배우들이 워낙 다들 훌륭해서 별무리 없이 잘 돼가고 있습니다. 다만 표현의 방식에 있어서 작가와 감독의 시각이 달라서 약간의 혼선이 있긴 했지요.”
-일테면요?
“소설에서 보면 엘리가 수신기로 들으며 일정 주파수의 채널을 통해 우주인을 탐지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을 만들면서 로버트가 헤드폰을 이용하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 영역은 20㎑를 넘지 않는데 반해, 망원경은 20㎒이상의 주파수를 다루기 때문에 헤드폰으로 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전 반대를 했죠.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결국엔 로버트의 말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 그 밖에 다른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원작과의 차이점이라든지…….
“대부분의 내용이나 소재가 소설에 가져온 것이기에 소설과는 별다른 차이가 없고, 영화라는 매체가 영상기술을 다룬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오감에 있어서 상당히 자극적이죠. 뭐, 그래서 소설보다는 덜 지루하고, 실감이 나겠죠.(다같이 웃음) 아마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개봉된다면 꼭 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빨리 쾌유하셔서 같이 봤으면 하네요.
“그렇다면 우리 기자양반께서 보여주시는 건가요?”(다같이 크게 웃음)
- 뭐, 그러죠. 그 대신 꼭 완쾌하셔서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야 합니다.
“네, 꼭 그러죠. 참고로 전 중간의 통로 쪽 자리를 좋아합니다.(웃음)”
- 마지막으로 과학에 대한 전반적인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이라든가 보완해야 할 부분 등 아무 말씀이나 좋습니다.
“과학기술의 힘은 이미 막강한 수위에 이르렀기 때문에 인간은 의도적으로든 부주의하게든 자기 자신을 해칠 수도 있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지금까지도 수십억의 생명을 구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복지를 증진했고, 지구 전체를 거대한 하나의 물줄기로 합류시켰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 급격하게 변화시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서 편안함을 빼앗았습니다. 인간은 광범위한 재해를 새롭게 탄생시켰습니다. 더구나 그것들은 눈으로 보기에도, 머리로 이해하기에도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막대한 힘에는 막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이에 우리는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사고방식을 묻고, 창출하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이 일에 있어서는 과학의 대중적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 이 정도로 인터뷰를 마치죠. 몸이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꼭 쾌유하셔서 지난번 강연에서와 같은 멋진 모습을 다시 한번 뵀으면 합니다. 건강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병실에서 만난 칼은 환자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정신이 또렷했다. 그는 병석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낙천적이었다. 인터뷰 내내, 오히려 그가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웃음을 보이며 분위기를 주도해가고 있었다. 말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처음 과학을 배워나가는 호기심 많은 아이의 모습처럼 설레어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이틀 후, 그의 병세가 다시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닷새 후인 어제(20일), 그는 골수성 백혈병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 강연에서와 같은 열정적인 모습을 이젠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는 모든 사회적 문제를 과학으로 끌어들여와 과학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우주에 대한 꿈과 희망을 일구며 평생을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힘썼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과학의 대중화를 전하였다. 이런 그는 인류의 과학에 대한 의지가 끊이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