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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달인이 되려면 잘못된 문장부터 고쳐라 - 우리가 몰랐던 명문장의 진실
박찬영 지음 / 리베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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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쓰다가 확 꽂힌 책! 논리력이 딸릴 때 가장 만만한 것이 지시어로 땜빵하기! 10쪽짜리 논문에 ˝여기서˝가 무려 9번이나 검색됐다. 책 읽자마자 죄다 고쳤다. 충고를 듣고나니 저절로 수정이 된다. 나머지 지시어도 마저 ..... 공대출신이라 글 못쓴다는 뻔뻔한 거짓말은 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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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학개론 1 고전적정리이론총서 3
왕요남 지음, 신승운 옮김 / 한국고전번역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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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즈닷컴 강의듣다가 고전번역원에서는 어떤 교재를 쓸가? 궁금증에 찾다가 검색된 책이다. 시리즈 전권 주저없이 구매해버렸다. 아직은 목차 보면서 급한 부분 찾아서 읽는 중이다. 번역서이지만 이런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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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글 바로쓰기 3 오늘의 사상신서 172
이오덕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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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 쓰기1」은 ‘바로 잡은 한국어 표현사전’이다. 「우리 문장 쓰기」와 내용에 차이가 많지는 않지만, 자세한 보기를 들고 있어 언제고 읽어 보고 싶은 책이었다.

  우리글을 바로 쓰기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들어온 말 걸러내기이다. 들어온 말을 쓰면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깨뜨린다.

  또 말이 어려워 이해가 어렵고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 이유는 들어온 말이 거의 중국글자말, 일본말, 서양말인데 지배층이 피지배층과 차별을 꾀한 말이기 때문에 말이 권위적이고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중국글자말은 쉽게 쓸 수 있는 말을 굳이 어렵게 하거나, 우리말이 된 중국글자말 이더라도 틀리게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적’, ‘-화’하는 식으로 뜻을 대충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아 이해가 힘들다. 일본말은 우리말법과 비슷하여 이상한 토씨를 써서 무늬만 우리말로 만들고 피동형동사를 써서 의미를 애매하게 한다. 서양말은 번역투말을 우리말법처럼 쓰고 서양말을 일상으로 쓰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러면 우리말 바로 쓰기는 어떻게 실천할까? 해결방법은 크기 세 가지로 요약하여 실천할 수 있다.

  1. 입으로 하는 말로 글을 쓰자.

  2. 진실하게 쓰자.

  3. 모든 사람이 글을 쓰자.

  첫 번째 주장은, 되도록이면 쉬운 말로 글을 쓰자는 얘기다. 글을 대부분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쓰고, 다른 사람들과 차별되는 특성을 만들기 위해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글들을 쓴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영향력으로 입으로 하는 말과 글로 하는 말에 많은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번째 주장은, 머릿속에서 지어낸 글이 아닌 삶 그 자체를 솔직하게 쓰자는 말이다. 억지 문장을 쓴다거나 상투적인 문장으로 멋을 내서 자신의 정직한 목소리를 잠재우지 말자.

  세 번째 주장은, ‘글 쓰는 일은 배운 사람만 하는 것이다’하는 고정관념을 버리자는 얘기다. 글도 말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책상 앞에만 앉아 관념에 물든 사람보다 노동현장에서 삶을 느낀 사람들의 글이 더 마음 와 닿는다.

  결국 세 주장 모두 편의상 구분에 놓았지만 연관된 얘기들이다. 글을 일부 계층만 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쓴다면 글이 평등해져 쉬워지고, 글이 쉬워져 농민․노동자 계층도 글쓰기에 참여한다면 말법과 글법이 다르지 않고 글이 깨끗해져 바른 글쓰기로 이어진다하는 말이다. 
  이오덕씨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 책장이 정말 빨리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순수한 우리말이 해석이 안 될 때 빼고는. 문장이 쉽고 길게 늘어지지 않아서 이해하기 편했지만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어려운 말은 쉽게 풀이말로 써놓아서 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글쓰기를 생각하고, 책을 읽으면서 글쓰기를 생각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문제인지 책이 문제인지 책장이 넘어가지 않은 경우가 있다. ‘-화’, ‘-적’ 하는 말은 전문서적에 많이 나오는데 읽어도 기억도 안나고, 나 또한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설명할 때 이런 투로 글을 쓴 기억이 난다. ‘-에서의’와 ‘-에서’의 차이가 뭔지 고민하다가 그냥 잔적도 많았다. 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이런 식의 글쓰기는 대상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억지로 늘려 쓰기, 내 생각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본 내용을 무작정 베낄 때 대충 얼버무릴 때 쓴다. 이오덕씨의 말대로 쓸 말이 없으면 쓰지 말 일이다. 글을 쓸 때 가끔 생각하는 것이지만 ‘지침’과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남들이 못알아들을가 걱정이 들기도 하고 잘못된 말들이 오히려 익숙해서 바른 말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영어를 우리말인 것처럼 쓴다던가 하는 사람을 보면 똑같이 써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될 때도 있다. 우리말 특성에 맞게 맞춤법을 고치듯이 우리말 쓰기에도 바람직한 글쓰기 연구가 계속 되었으면 한다. 이 책은 사전처럼 끼고 볼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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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문의 길
조동일 / 지식산업사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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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학문의 길』에서 우리 학문의 길을 여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리 학문을 살리고, 교육도 학문의 목적에 맞게 살리자고 하는 것이다. 우리 학문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화를 통한 발상의 전환이 필수적인데 그 역할은 철학, 문학, 역사를 아우르는 인문과학이 담당할 수 있다. 우리 학문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외래사조로 인한 발상과 표현의 사대주의이다. 원인은 식민지 시대와 분단의 시대를 거치면서 전통학문이 현재와 단절된데 있다. 그 공백을 서양과 일본에서 들어온 학문이 자리를 메웠다. 그러나 외래 사상의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를 것이다. ‘현재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것 아닌가.’, ‘왜 우리 것이어야 하는가.’, ‘이것이 국수주의적인 발상은 아닌가.’라고 하는 문제를 제기 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근거로 요약하여 우리 학문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현재 우리 학문은 서양의 학문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서양 학문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로 학문의 유입경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중국문화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듯이, 초기에는 서양문화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흘러들어왔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일본식 사고로 바뀌어 들어온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는 서양에 대응되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없기 때문이다. 개별적이고 실증적 학문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철학에 해당하는 이론적 토대가 마련될 길이 없었고 대신 문학이 철학의 구실을 했다. 일본의 학문이 뒤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비교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우리 학문은 일본이 공리공론이라는 트집을 잡아 경시할 정도로 총괄적이고 이론적인 학문이 발달하였다.

  둘째로 서양학문이 직접 수입이 되었더라도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해 줄 수 없다. 그 이유는 사상사적인 위치에서 살펴볼 수 있다. 중세의 암흑기를 거친 서양철학은 그 과정에서 이성과 경험이라는 이분법을 만들어내어 감성이 빠진 이성을 강조하는 학문론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적 고뇌를 거친 적이 없기 때문에 굳이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다. 서양의 사고 법칙을 발전시킨 테카르트, 칸트, 헤겔의 철학은 점차 이전 이론의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발전하였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결함과 제1세계의 우월성만을 합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서양의 학문론은 각 학문의 대등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과학을 윗전에 모셔놓고 인문학은 경시하는 불균등한 형태로 왜곡된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 문제점으로 나타났고 그 대안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전통 학문이다. 우리 선인들의 철학은 바로 그 자체가 학문학이고 전체가 세부를 포괄하고 세부는 전체를 뒷받침하는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즉 이론과 실제가 따로가 아니다. 실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문의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학문이 필요하다. 우리 학문을 잊었기 때문에 학문이 제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사실정리에 그쳐 제대로 된 이론을 이끌어내지 못하거나(국내 소재), 외국학설을 소개하는데 치중하여 남을 뒤쫓는 데만 급급한 현 학계(외국 소재)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그러면 외산인 유․불․도교를 우리 학문이라고 떳떳이 말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글쓴이는 동양의 철학도 각 나라별로 분류하여 검토할 것이 아니라, 서양 철학사처럼 동양철학사로 통합시켜 생각해 보자고 한다. 이렇게 뭉퉁그려 볼 경우 철학의 맥은 우리나라로 이어져 무르익었다. 인도를 거쳐 들어온 불교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원효와 같은 독자적 불교를 만들어 냈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조선후기는 유교의 원조인 중국을 사상 면에서 훨씬 앞섰다. 제3세계의 학문의 화두인 민족성, 주체성의 문제는 조선후기 철학이 고민하던 근대의 문제와 연결이 되기 때문에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글쓴이의 주장은 한마디로 전통사상의 발상을 통해 학문을 재창조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족학문의 길이요, 세계학문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의 학문으로 발전 가능성을 지닌 우리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개념을 명확히 하고 다양한 유형의 글쓰기 개발이 필요하다. 곧 이론 지침을 세우고 수단인 표현방법 가꾸어야 한다.

  책제목에서 많은 기대를 했었는데 읽어나가면서 실망도 많았던 책이다. 글쓴이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우리 학문의 길’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문학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여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보고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글이 어수선했다. 급하게 쓴 글인지 논리적 비약이나 억지 논리를 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막연함과 ‘우리 것만’이라는 자격지심에서 나온 발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인문학적 근거를 가지고 문제점을 다루고 있어 감정적 대응으로 흐르기 쉬운 문제에 대해서는 잘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생각하게 된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우리 사상을 학문론으로 접근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서양학문의 영향과 주입식 교육의 탓인 듯 한 데, 학문의 근본이 철학이고 이것이 역사발전을 통해 나온 산물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우리철학을 윤리이상으로 대해본 적은 없다. 전통사상으로 학문한다는 것이 아직은 생소하다. 학문방법론으로 접근 한 것이 아니라, 색다른 아이디어 제공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이해가 잘 안간다. 이 점은 더 많은 공부를 통해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둘째, 현재 학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용어개념이 명확하지 못하고 정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표현수단인 언어가 뒷받침되지 못하여, 단어가 부족하거나 뜻이 혼동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한자어를 받아들여 어휘수를 늘리자고 하는데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안는다. 내 입장은 중립적이다. 순수한글을 쓰자니 익숙하지 않아 못쓰고, 한자어를 쓰자니 어려워서 못쓰는 곤란함이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순수한글을 한글연구기관에서 보급하고, 한글로 표현하기 어렵거나 설명이 늘어지게 되는 경우에 한자어를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화학자 르 샤를리에는 평형이동의 법칙에서 ‘모든 물질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평형 이동한다.’고 했다. 서구에서는 학문의 구심점을 잃자 동양사상에서 길을 찾았고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연구가 시작되어 엘리트들의 학문이 되었다. 서구 사상을 먼저 시작한 이들이 서구 사상의 한계를 깨닫고 방향을 바꾸어 우습게 보던 것을 오히려 높이 평가 하고 있는 실정이다. 7,80년대 유학생들이 서구학문을 배우러 갔다가 오히려 동양학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제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 우리 입장에서는 오히려 우리학문을 역수입해 오는 날을 맞게 되지나 않을가 하는 걱정이 든다.

  인간의 역사는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깨져가면서 발전했다. 새로운 진리가 나올 때마다 편협한 감정적 대응으로 흐르거나 주댓없이 일방적 찬성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출판된 지 10년 가까이 되는 책이라 글쓴이의 주장이 이미 식상해 버린 면도 없잖아 있지만 ‘왜’라는 질문에 충실했고 생각의 조각들을 연결시켜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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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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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현재’, ‘이 땅에서’ 동양학을 하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출발한다. 우리가 우리말을 우리글로 표현한 역사는 그리 길지가 않다. 중국에서 들어온 문화를 우리글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한문표기 하여, 순수한 우리말이 점차 사라지고 오랜 기간 소수의 특권층만이 정보를 누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개화기를 맞이하여 한문 문화권에서 한글 문화권으로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이 기간에 각국에서 들어오는 여러 문화를 자기말로 바꿔주는 작업이 부재하여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다. 더불어 수 백 년을 이뤄온 문화는 명맥만 유지한 채 한글화 되지 못하고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수단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여타의 학문도 마찬가지이지만, 동양학을 하기 위해서는 한글화작업 곧 한문번역사업이 필수적이다. 그 동안의 학문수단이었던 한문은 언어체계와 문화체계가 우리말과 달라 우리문화가 녹아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동양학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문헌의 해석이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글쓴이가 주장하는 해석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완전번역’을 말한다. 이는 한문에 토씨나 달아주는 불성실한 번역이 아니라, 주어와 술어의 문법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 언어로 바꾸어 주는 작업을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영구번역’이다. 이는 ‘현재’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번역이란 늘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기 때문에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자에 의해서 끝임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곧 고전을 쓴 이의 일상어로 생각하고 현대어로 바꾸는 것이다.

  말을 옮기는 과정에는 항상 문제가 따른다. 글쓴이는 서로 다른 언어의 인식구조 차이로 생기는 긍정적, 부정적 번역의 오류를 역사 속에서 찾아 올바른 번역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예시, 중국에 『천주실의』를 번역해 천주교를 전파한 마테오 릿치는 『사서』의 번역을 통해 터득한 유교문화를 배경으로 천주교를 포교할 수 있었다.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해서 대응되는 말을 찾기 힘들었지만 중국인의 인식 도구를 통하여 서양문화를 소개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예시, 서양인의 동양관은 3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엿볼 수 있다. 일자무식의 상인, 마르코 폴로의 눈에는 종합적인 중국문화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물질적 측면만을 부각시켜 풍요로운 비단의 나라로 비춰져 있다. 2단계 제수이트 선교단은  중국을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실현되는 유교적 이상주의 나라로 인식하여 연구하였고, 정신적인 면을 높이 평가해서 중체서용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 3단계는 헤겔의 정체사관이다.

  이러한 오류는 문화의 ‘상대적 인식’이라는 관점을 무시하고, 부분으로 전체를 파악했기 때문에 생긴다. 번역할 때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문화를 받아들여 자기화 시키는 것이 관건이 된다.

  세 번째 예시, 중공에서 중국철학을 기술하는 관점이다. 중국공산당은 맑시즘이 변형된 마오이즘이다. 이 마오이즘은 소련과 다른 중국의 사회상과 언어의 개념차이를 이용해 만들어낸 새로운 공산주의이다. 마오이즘의 유물론은 중국정통의 유물론에서 끌어와 정치적 합리화에 이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동양학을 하는데 필요한 선결작업인 번역은 방대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하고 이런 성과를 밑거름으로 해서 자기화 시켜나가야 한다. 특히 주의해야할 것은 동일어의 개념혼동과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류이다. 번역작업은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을 위한 재창조 작업이다.


  얼마 전 주간지에 영미 고전 문학의 번역이 절반이상이 표절이고 엉터리 번역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고 여기면서도 역시 씁쓸하다. 이것은 우리 고전의 번역뿐 아니라 우리학계 전반적인 현상임을 입증하는 기사였다. 도올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제기된 문제는 아직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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