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1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아니 에르노의 글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칫 놓칠 수도 있는 작은 것을 통해 영감을 받아 그의 색깔을 입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른 작가의 글을 읽었을 때는 색다름을 많이 못 느끼는 편이다. 하늘 아래 <오리지널>한 것은 이제 없다고 하지 않는가. 어디에선가 읽어본 것 같고, 내용이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글은 다르다.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주제와 전개로 나의 눈과 생각을 사로잡는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무언가를 구하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시도 아니다. 그가 글이라는 매체로 남기고 싶은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둔 <기억 조각 모음집>이다. 신기한 건,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여백이 말해주고 있듯, 분명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이 무작위로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읽고 나서 책을 덮었을 땐,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하나의 대서사를 읽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책의 첫 문장이다. 시작부터 굉장히 강렬했다. 첫 문장에 사로잡혀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과연 모든 장면들은 사라지는 것일까?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내가 내린 결론은 <모든 장면은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온 날들만 봐도 그렇다. 100%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속에 강하게 박혀있는 기억의 조각들이 아직도 살아 숨 쉰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 창피했던 기억, 그리고 눈물 나게 행복했던 기억까지 다. 

그때의 냄새, 사람, 날씨, 촉감, 그리고 주변에 있던 것들마저 기억이 난다. 따라서, 모든 장면들이 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또한,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영화나 책, 그리고 글로써 남는다. 

한번 지나간 장면을 다시 경험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사라지는 것과는 별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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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빠르게 등장하는 것들은 과거를 밀어냈다. P.109

-90년대에 태어난 세대는 아날로그와 현재의 시대, 두 개의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점점 빠르게 등장하는 것들은 과거를 밀어낸 것에 동의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봐도 그렇다.

음악을 사랑하는 내가 이 부분을 읽고 생각난 내 삶의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음악을 즐겨 듣는 방식이다. 

예전에 즐겨 듣던 쏘니 시디플레이어와 카세트는 나의 아이폰에 의해 밀려났다. 그로 인해 내가 소유하고 있던 수많은 시디들과 카세트들은 버려졌고, 더 이상 나의 손때가 묻은 음악의 조각은 내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나의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꽤나 씁쓸하기도 하지만, 이미 새로운 것에 익숙해진 나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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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늙지 않았으나, 주변이 너무 빠르게 변해서 우리도 늙는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P.248

-책 제목이 <세월>인 탓일까. 유독 시간과 세월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에 기꺼이 공감했다. 이제 30대 초반인 나지만, 10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어느새 30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을 때가 있다. 특히 학생들이 자주 쓰는 줄임말이나 새로 데뷔한 아이돌을 내가 모를 때 그런 느낌이 든다. 나는 나 스스로가 KPOP 덕후라고 자부할 정도로 아이돌에 대해서는 빠삭하다고 생각했는데 -- 실제로 내 또래의 사람보다 아이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 요즘은 빠릿빠릿하게 못 따라가겠다. 예전엔 음악방송을 틀면 내가 거의 다 아는 아이돌들이 나왔는데, 요즘 들어선 팀 이름과 센터 이름까지는 알아도 다른 멤버들은 난생처음 보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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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장면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아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글 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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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시간도 누군가는 기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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