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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위상학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김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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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외부 표출이 곧 권력이었던 고대 원시 사회. 국가의 성립 이후 형벌 시스템의 형성에 따라 이러한 폭력은 곧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죄악시된다. 시스템은 곧 감시자인 권력자의 힘이 되는데 전근대사회 및 규율사회에서 시스템은 감시자로서 기능하며 개인은 이러한 대타자를 내면화하여 스스로 초자아의 복종주체가 된다. 그러나 규율사회까지만 해도 부정성(다름)으로서 존재했던 대타자는 후기근대사회에 들어서 이상주체로 변모한다. 규율사회의 복종주체는 후기근대사회에선 성과주체가 되어 이상주체가 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기획하고 예속시킨다. 문제는 이 과정이 자기착취를 기반으로 하나 성과주체 자신은 스스로가 자유롭다 착각한다는 점이다. 폭력은 이제 외부에서 내부로 위상이 이동된다.

 

자기착취를 기반으로 한 굴레 속에서 자아를 빼내려면 타자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려면 나와 다른 존재인 타자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 즉 우의 혹은 부정성의 긍정이 필요하다. 타자의 의지를 박살 내버리는 폭력과 달리 권력은 타자의 의지를 마치 일반의지인 것처럼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데, '규범'을 받아들인 개인은 그 기저의 시스템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고 내면화시킨다.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측면에서 리좀의 폭력 장이 재미있었는데 끝없는 '또 ··· 또 ··· 또 ···' 의 양산으로 공허한 쓰레기 더미가 생성된다는 말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2023년 1월을 맞이하여 읽기로 한 책, 다행히 1월이 다 가기 전에 완독했다. 지독하게 어렵고 불친절한 책이었고, 읽는 내내 밀도 있게 꾹꾹 눌러 담긴 한 문장 한 문장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내 잘못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를 생각해보곤 했다. 그럼에도 개념적 사유와 도구어를 되새겨주었다는 점에서 곱씹을 만하다. 저자가 말하는 성과주체인 나는 자기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분명한 건, 알면서도 이 쳇바퀴에서 내려가기가 더 두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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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 (스페셜 에디션, 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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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김정운 교수의 강연에 빠져 있을 때가 있었다. 시사 콘서트 시리즈, 명작 스캔들, 김정운 특강쇼, 힐링캠프 등 나오는 건 다 챙겨볼 때쯤 이러다 이 교수님의 인생 레퍼토리를 외우는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뭔가 방송에서 듣지 못한 새로운 에피소드를 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던 때였다. (사실 명작 스캔들은 조영남이 싫었던 것과는 별개로 꽤 흥미롭게 보던 쇼였는데 종영되어서 정말 아쉬웠다.) 여하튼, 그런 맥락 속에서 읽게 된 이 책은 내 인생의 패러다임을 180도까지는 아니더라도 90도쯤은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책이다. (개정판이 나왔던데 언젠가 전자책이 아닌 실물 도서를 사서 읽어보고 싶다.)

 

창조는 편집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서 나만의 것으로 만드느냐가 관건이라는 논지인데, 실제로 이 책을 읽은 후로 나는 더 이상 정보 가치가 있는 기록물은 노트에 수기로 기록하지 않고 무조건 디지털화시켜서 블로그나 삼성 노트에 저장해 둔다. 언제든지 검색해 볼 수 있고, 태그를 통해 형성된 메타데이터로 새로운 맥락을 재창조해낼 수 있다는 게 매력적으로 와닿았으니까. 책에서 언급된 대로 "편집 가능성이 있어야 좋은 지식" 이라는 말을 믿게 된 셈이다. 그게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종합이든 아니면 실제 물리적인 정보의 결합이든 간에.

 

챕터 2 와 3 이 특히 좀 재미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원근법의 발견으로 인한 서구 합리성 및 객관성의 발달에 따라 공간 심리의 이야기로까지 확장되는 게 흥미로웠다. 전자는 미디어 미학 시간이나 예술사 시간에 배웠던 개념이라면 공간 심리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흥미를 느꼈던 것과는 별개로 그다지 공감은 가지 않았는데, 살아보니 그렇다. 내가 어떤 공간을 설계하고 '나에게 맞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공간에 대한 통제권이 있다는 거고 그에 상응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소실점에 위치한 권력이 자신의 시야에 아름다운 구도를 보이게 하려고 풍경을 '편집' 하듯 공간은 그 공간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이의 통제권에 있기 마련이다.

 

공간에 대한 편집이 편집된 개인이라는 개념으로까지 확장되는 게 재미있었는데, '나' 는 내가 살아온 기억, 내가 살아온 문화권이 편집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얼마나 살지 알 수 없는 인생, 얼마나 오래 정상적으로 작동할지 알 수 없는 소모품 같은 내 몸뚱이를 소중하게 여겨서 살아 있는 동안 좋은 걸 많이 읽고 보고 듣게 해 주고픈 욕심이 생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편집을 할 수 있는 나만의 데이터베이스 소스를 많이 비축하고 싶은 욕심과 함께 요약의 중요성 또한 깨닫게 된다. 내가 읽고 처리한 정보를 내 언어로 간결하게 핵심만 정리할 수 있는 능력. 그렇게 데이터를 쌓고 쌓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나만의 메타데이터가 형성되어 또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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