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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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事物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

 

현세대 인류는 과잉정보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스마트폰 스크린 속 소통을 위해 발악하는 우리는 '지금, 여기' 에 있는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이루는 세계사물에 관해 잊어가고 있다. 현실 속 가늠할 수 없는 타자의 존재를 외면하고 스마트폰 세상 속으로 눈을 돌린 우리는 정보화된 이미지를 통해 타자를 대상화하고 '처분'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세계를 처분 가능한 정보화된 디지털 그림으로 만들고, 그렇게 제작된 (디지털화된) 세계는 과도현실적 실재와 다름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쓰다듬으며 우리 자신을 생산한다. 끊임없이 정보를 생산하며 <좋아요> 라는 '디지털 아멘' 을 받고자 애쓴다. 타자를 쫓아내기 위해 SNS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꾀기 위해 글을 쓴다. 오늘날 디지털 인류의 구호는 '공유' 이며 우리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자 우리 자신을 내보이고 연출한다. 디지털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공고화하고 절대화시키기 위해 '지금, 여기' 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마저 지운다.

 

그런 우리는 진정 '소통' 을 통해 '공허함' 을 채울 수 있는가. 한병철 교수님은 스마트폰을 통한 과도소통이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존재론적 이유는 다름 아닌, 타자를 '너' 라는 존재가 아닌 '그것' 으로 만들어 사라지게 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즉 스마트폰은 '지금, 여기' 에 존재하는 타자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론적 공허를 채우지 못한다.

 

이에 대해 <사물의 소멸> 은 인간에게 (1) 무언가를 할 능력과 (2) 아무것도 하지 않을 능력이 있음을 주지시키며, 과도활동에서 탈피하여 고요하고 관조적인 방식으로 하염없이 머무를 능력을 강조한다. "네게 장미가 소중한 이유는 네가 장미를 위해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라는 <어린 왕자> 속 여우의 말처럼 삶의 어떤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고, 누군가를 다른 이와 구별하는 무언가는 <지금, 여기> 에서 <함께> 머무르는 시간의 차이임을 이야기한다.

 

한편으론 공감이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갸웃하게 되는 책이었다. 손글씨를 쓰는 게 타이핑을 하는 것보다 좋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공감이 가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를 수기로 쓸 때면 내 생각을 온전히 다 잡아내어 표현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타자를 치면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그때 표현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인공지능에 관련해서는 이전에는 나 또한 컴퓨터가 인간이 제공하는 정보의 상관성만을 파악할 뿐 인과성을 파악할 능력까진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전 현세대 인공지능은 이제 막 세상을 '인식' 했을 뿐이라는 말을 듣고 다소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영상 속 교수님에 따르면 "정보의 양이 늘어나니 컴퓨터가 세상을 '인식' 하기 시작했다" 는 것이다. 여기서 정보가 더 늘어나면 세상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처리하고 생산해내는 단계까지 갈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속 세상보다는 내가 직접 만지고 접할 수 있는 존재 및 물체를 자각하며 살아야겠다는 반성이 든다.

 

 

읽던 중의 기록.

 

<사물의 소멸> 이 생각보다 술술 읽힌다. (물론 타자의 추방 때처럼 뒤에 이해 못 할 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놀랐냐면 처음 샀을 때만 해도 첫 페이지에서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었기에. 본디 논문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대중을 고려한 친절한 책은 아니기에 다른 저서들을 읽으면서 쌓아온 관련 지식이 없으면 뇌가 계속 뱉어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이 저자의 다른 저서와 다른 점이 뭐냐 하면 인터뷰가 있다. 역자 후기도 아니고 한병철 교수님의 말. 새삼 '구어' 의 힘을 느꼈다. 이 인터뷰가 정말 쉽게 읽히는데 중요한 건 저자의 저서 대부분에 관한 방향성이 녹아 있기에 한병철 교수님의 철학에 관심이 있지만 읽기가 너무 버거우신 분들은 <사물의 소멸> 뒤에 수록된 인터뷰를 꼭 챙겨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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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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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다양성' 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와 다른 존재가 가진 부정성을 부정한, 체제가 '허락' 하는 다양성은 아닌가? 신자유주의의 도래 이후 자아는 줄곧 자신을 생산, 실행, 상품화하도록 하는 판매 논리에 따른 진정성의 논리를 펼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 (잡다함) 만이 허용된다.

 

세계화는 모든 것을 같게 만든다. 그 동일화의 폭력 속에서 맥락은 소멸되고 오직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를 받들기 위한 정보 · 소통 · 자본의 순환만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거슬리는 타자들은 잡초 뽑듯 제거되고 배제의 반옵티콘banopticon 이 형성된다.

 

타자에 대한 항체는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그 부정성이 존재하도록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자기 파괴의 결말을 낳는다. 갈등을 처리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 사회에서 자신의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해 에고로만 가득 찬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이 지나쳐진 나머지 상상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 가상의 적을 만들어 상상적 면역성을 획득한다. '적' 이란 사실 자신에 대한 문제가 형태화 된 것이다.

 

시선 없는 매체이기에, 역설적으로 어디에나 존재하는 시선을 내포한 디지털 매체는 자아 속에 자아가 가득 차도록 만들고 타자가 들어설 공간을 없앤다.

 

에고ego 라는 집의 밖으로 나오기 위해, 자아는 문턱을 넘어야만 한다. 자아는 전에 겪어본 적 없던 새로운 차원과 삶을 문턱을 넘으며 경험한다. 문턱은 부정성을 내재하며, 자아는 고통을 겪음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다.

 

낯섦, 부정성, 수수께끼를 전제한 예술은 이런 세상 속에서 나와 다른 부정성을 가진, 다른 존재로서의 타자를 마주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한다. 우리는 타자의 고유성이 머물러 있는 타자의 시간을 인정하며 타자와 만나 대화하고, 타자를 향하고, 타자를 대신해 주기 위해 지각을 열어 타자를 인식해야 한다. 낯선 것을 일상으로 편입시키는 자기 초월을 보여야 한다.

 

환대란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 의해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 (p. 32)" 로 타자를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으로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라 볼 수 있다.

 

 

드디어 다 읽었다. <심리정치> 와 병렬 독서용으로써 함께 시작했음에도 이제야 완독 한 이유는 '음성' 파트 때문이다. 아직도 그 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아마도 이후에 다시 읽어야 할 듯하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만 결국 귀결되는 질문은, 제목인 "'타자의 추방' 을 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다. 이는 곧 자신밖에 모르는 공허한 메아리, 타자의 부정성이 두려운 나머지 '소멸' 시켜버리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아마 최근에 리뷰를 쓴 영향 때문이지 싶은데, 문턱의 장에서는 영화 <듄> 이 타자의 생각 및 경청하기의 장에서는 <나의 해방일지> 가 떠올랐다. 드라마는 일평생 사회의 반옵티콘banopticon 속에 머물러 온 '타자' 인 구자경에게 염미정이 '환대하라' 는 말을 건네는 장면을 보여준다. 염미정은 세간의 사람들은 부정하고 말았을 그가 가진 거스를 수 없는 부정성을 포용하고, 자신의 논리에 맞추어 그를 변화시키기보다 그의 말을 경청하고 환대하자 이야기한다. 평생을 에고라는 단단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해 이별 후 염미정의 이름을 부르짖을 때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구자경은 그제야 자신을 둘러싼 단단한 막을 깨고 환대를 실천하며 염미정의 손을 잡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세상을 헤매며 방황했던 돌아온 탕자가, 추방되었던 타자가 한 사람의 '환대' 로 다시 세상 속으로 스며들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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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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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이랑 병렬 독서 했는데 이전에 읽은 저자의 다른 어떤 책 보다 훨씬 더 잘 읽혔다. 물론 내 착각일지도. 주말에 다시 정리를 해봐야겠지만 일단 까먹기 전에 기록해 두자.

 

한병철 교수님의 <심리정치> 는 '자유(의지)' 의 허구성을 의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어떻게 스마트 권력에 지배당하고 있고, 그 권력이 어떻게 시스템적 '친절한' 빅 브라더로 기능하고 있는지에 관해 주장한다. 벤담과 푸코로 이어진 파놉티콘은 이제 개인 안에 내재화되어 개인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며 '소통' 하지만, 그 소통 또한 강제된 것이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감성이 주입된 자리는 필히 이성이 밀려난 자리일 것이다. 효율적 착취를 위한 성과사회의 성과주체 형성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는 삶과 노동을 게임화 시켜 개인이 '자발적' 자기 착취를 이루도록 한다. 힐링healing 을 강조하나 이는 곧 킬링killing 을 야기할 뿐이다. 과잉남발된 정보는 빅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질식시키나, 빅데이터는 삶의 사건성에 꼭 필요한 인과성이 없고 그럴듯함의 개연성만 존재한다.

 

조지 오웰의 '1984' 와 애플의 '1984' 를 비교하는 장면과 마지막 장의 백치 파트가 특히 재밌다. 애플은 맥킨토시가 인류를 빅 브라더의 '1984' 로부터 해방시켜 주리라 장담하지만, 저자는 애플의 1984 이후 인류가 한층 더 은밀하고 철저한 빅 브라더 체제에 돌입했음을 지적한다.

 

읽다 보면 과연 누가 '바보' 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다른 시각으로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 그는 바보가 되지 않는가. 하지만 저자는 적극적 바보 되기를 권장하며 빽빽하게 들어찬 정보의 나열을 비집고 나올 (인간다운) '이야기' 를 기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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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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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이란 무엇인가? 안과 밖의 경계를 기준으로 타자성(부정성)을 띤 낯선 것을 막아내기 위해 공격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라는 서두에 따르면, 21세기 이전의 시대는 '면역학적 시대' 였다. 면역은 부정성의 변증법을 기본 특징으로 하는데, 면역학적 시대에서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없애려(부정하려) 하는 부정 분자이다. 자아는 타자가 가진 부정성 때문에 파멸하는 일이 없도록 먼저 타자를 없애야(부정해야) 한다. 즉 자아는 부정(타자)의 부정(없앰)을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면역학적 특징이 21세기 또한 설명할 수 있는가? 필자는 세계화 과정 속 '탈경계화' 에 따라 이질성과 타자성이 사라지면서 '차이' 로 변모되고, 이렇게 형성된 차이는 자아와 면역학적으로 동일한 것이기에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가능하나 짐스러운) 대상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과잉 생산, 과잉 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 등의 각종 과잉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긍정성(같은 것)의 과잉 현상' 이 생기게 된다. 과도해진 긍정성은 개인에게 폭력으로 다가오게 된다. 문제는 개인은 '같은 것' 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개인이 긍정성 과잉 현상에 대해 느끼는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닌 신경증적 거부 반응으로 나타나게 된다. (대표적 예시가 소진, 피로, 질식 등의 현상) 긍정성의 폭력은 세계라는 시스템 자체에 내재되어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면역 저항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심리적 경색(막힘)이 일어난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전 사회와 어떻게 다른가? 필자는 푸코의 규율 사회와 대비하여 오늘날 21세기 사회를 '성과사회' 로 규정하고, 성과사회 속 개인을 '성과주체' 로 정의한다. 부정성을 근간으로 한 규율사회 속 복종주체는 시스템의 "해야 한다should" 혹은 "하면 안 된다shouldn't" 라는 명령을 따르며, 금지 · 명령 · 법률의 형태로 위반한 개인을 광인이나 범죄자로 분류한다. 한편, 긍정성을 근간으로 한 성과사회 속 성과주체는 시스템의 "할 수 있다can" 혹은 "할 수 없다can't" 의 명령을 따르고, 계획 · 주도성 · 동기부여 등의 형태를 띠면서 이를 따르지 못하는 개인을 우울증 환자나 낙오자로 분류한다.

 

규율사회와 성과사회의 접점은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적) 열망" 이다. 규율사회의 규율에 따라 돌아가던 생산성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에 따라 생산성 향상이 가로막힌다. 이때부터 능력can의 긍정성이 당위should의 부정성을 능가하게 된다. 할 수 있으니 하자는 시스템의 폭력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타자의 강요가 아닌 자기착취가 존재한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착각을 동반하기에 타자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인간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하나, 자아는 이에 대한 면역학적 항체가 없다. 원자화된 사회 속 타자와의 유대도 결핍된 개인은 심리적 경색을 느끼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즉 우울증이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발발하는 것이다.

 

흔히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 노동정보사회를 사는 인간이 가진 능력이라 착각하나, 필자에 따르면 실상 원시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가져야 했던 멀티태스킹 능력은 인류의 진보가 아닌 퇴화로 볼 수 있다. 너무나 많은 자극과 정보는 인간의 지각을 파편화시켜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심심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개인은 끝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필자는 이러한 산만함을 과잉주의hyperattention 라고 정의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근대사회가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킨 노동사회라고 주장하며 '활동적 삶' 을 옹호했다. 그에 따르면 근대의 인간은 수동적이며 사유하기보다는 계산하는 동물에 불과했고,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행동'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아렌트를 비판하며, 후기근대 '노동하는 동물' 은 노동을 통해 익명의 무수한 삶 속에 용해되어 버릴 만큼 몰개성적이진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집단적 노동사회는 개별화되어 '성과사회, 활동사회' 로 변모하고, 노동하는 동물은 '자아' 가 되어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증적인 특성을 보이게 된다.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는 직역하면 '(벌거벗은) 신성한 인간' 이나 그 의미는 인간 사회에서도 신에게도 버림받아 그 누가 죽여도 처벌받지 않지만, 희생물로는 가치가 없는 존재이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전쟁 포로들, 불법체류자들, 추방 난민들, 식물인간 등) 그러나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죽일 수 '없는' 존재들, 아니 죽지 '않는' 존재들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따라 계속해서 타자의 지배 없는 자기착취를 일삼는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강제성에 자신을 묶는다.

 

필자는 아렌트가 활동성을 강조하면서도 활동성이 가진 변증법을 알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활동성 첨예화가 지속되다 보면 활동과잉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 라는 환상 속에서 개인은 스스로를 옥죌 새로운 구속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환상 속에서 벗어나려면 "중단" 이라는 부정성이 필요하고, 인간은 현재 상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분노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분노는 막혀 있는 현대 사회 속 짜증과 신경질적인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될 수 있게 해 주는데, 이를 위해선 '사색적 삶' 을 살 필요가 있다. 사색적 삶을 위해서는 특별한 교육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니체에 따르면 인간이 고상한 문화를 즐기기 위해 다음 세 가지를 교육받아야 한다고 한다: (1) 보는 법 (2) 생각하는 법 (3) 말하고 쓰는 법.

 

공포란 특정 대상에 대한 것이나, 불안은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이다. 폭력의 위상이 외부(공포)에서 내부(불안)로 이동하여, 무력하고 능력이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개인은 긍정적 힘(할 수 있는 힘)과 부정적 힘(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상실한 채 피로라는 시스템적 폭력 속에 잠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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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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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재독 철학자인데 독일의 투명성 있는 사회에 대한 화두가 어떻게 던져지고 있는지는 모른다만, 분명한 건 필자가 '투명사회' 를 만들기 위한 과정과 그 결과물을 결코 긍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내가 결코 부인할 수도 고칠 수도 없는 나와 다른 어떤 것을 부정성으로 명명하고 그러한 부정성이 존재해야 사회가 정반합의 변증법성에 의해 올바로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투명사회는 사회를 '투명' 하게 만들기 위해 눈에 띄고 거슬리는 모든 것들을 동일하고 긍정적으로 바꾸어 버리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투명사회에 존재하는 개인들은 스스로를 성과주체로 바꾸어 '전시'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전시된 자아는 맥락 없는 포르노처럼 소비되는데, 전시를 위해서는 매끄러운 아름다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자아는 자기착취를 통해 부정성이 되는 굴곡을 없애려 애쓴다. 투명사회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디지털 파놉티콘panopticon 과 같은데 그 속의 개인들은 자발성이라는 이름 하에 스스럼없이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하면서 자신의 자유와 통제를 동일시시킨다.

 

이전에 읽은 책과 논지는 비슷하다. 필자의 사상이 집약된 개론을 읽고 각론을 읽은 기분. 반복되는 핵심 논지는 "투명사회는 곧 시스템에 의한 감시사회다, 부정성(다름, 차이)이 제거된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라는 것.

 

<폭력의 위상학> 및 <투명사회> 를 비록 필자의 국내 번역된 도서 중 여섯 권을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김태환 교수님이 번역하셨네. 역자 해설도 풍부하고 해설을 읽음으로써 이해가 안 되던 부분이 해소되기도 하는지라, 읽기 전 가이드로써 읽고 본문에 진입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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