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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1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5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평점 :
<특성 없는 남자>, 격변하는 근대 이행기 속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여러 갈등을 직면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 울리히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전에 포스팅을 한 바 있듯, 작품은 지상이 아닌 상공을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도입부는 유럽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구절 중 하나라고 하는데,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서양 상공에서 전지전능한 어느 초월적 존재가 근대 불특정한 어느 한 도시를 굽어 살피듯 시작이 된다. 전지적 시점에서 시작한 내러티브는 투시법의 소실점을 찾듯 지상의 어느 한 존재, 즉 울리히에게로 꽂히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입을 빌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도대체 특성qualities 이란 게 뭘까 초반부 내내 아리송했다. 번역가의 말씀에 따르면 "현실을 살아가면서 의도치 않게 나에게 달라붙는 속성들, 현실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들" 이라고 한다. 나는 이 점에 고개를 끄덕였고, 1권을 완독 한 후 개인적으로는 '선천적이고 고유한 것이라 착각하나, 사실 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한 어떤 스테레오타입적 굴레' 라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다. 울리히는 자타공인 특성 없는 남자이다. 그는 외부에서 주입하는 특성을 거부한다.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필요한 인정욕구 및 소유욕구 또한 없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가능성' 의 세계를 물색한다.
작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세계인식> 을 위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특성 없는 남자 울리히는 자신의 세계를 찾아 나서기 위해 군인에서 공학자로, 공학자에서 수학자로 직업을 변경한다. 상명하복의 위계에 따라 정해진 규율에 맞추어 '특성 있게' 살아야 하는 군인의 삶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자연을 연구하나 결국 종교재판에 설 수밖에 없었던 갈릴레이처럼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묘하게 자유로울 수 없는 공학자의 삶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 이성이 발명한 고도의 추상 세계인 수학을 탐구하기로 한다.
그의 직업 변천은 근대 이행기 서구 사회가 나아가는 사회 변천의 과정이기도 했다. 군주 혹은 교황과 같은 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삶의 방향성은 자연과학의 세계로 방향을 바꾼다. 그 기저에는 모든 것을 수치로 환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 통계학 및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모든 개별적 삶은 맥락이 제거된 채 점점 수치로 환원되었다. 고도로 추상화되고 관념화되었다. 점점 실존하는 개인이 설 자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울리히는 그렇게 추상화되고 관념화된 개인에게 부여되는 평균적 전형성 또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작품 속 각각의 인물은 당대 어떤 상징을 나타내는데 울리히를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인물은 세 사람이다. 디오티마, 아른하임, 그리고 모스부르거. 당시는 20세기 초 1차 대전 직전으로, 당대 유럽의 중심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봉건제가 몰락하고 자본주의 및 민주주의가 부상하는 급변하는 시대 속 혼란을 겪고 있었다. 위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혼이 파편화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라이벌 의식을 느끼던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2세가 즉위 30주년을 기념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위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무려 70주년인데! 이러한 생각에 오스트리아는 <평행 운동> 을 기획하기에 이르고 그 중심에는 울리히의 사촌인 디오티마가 있었다. 디오티마는 당대 고위 관료의 부인으로 평행 운동을 통해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애국심은 물론 위대한 전통, 그간 이룩해 온 진보, 번영과 행복 등을 전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울리히의 눈에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개인을 옭아매는 특성에 불과했다.
디오티마는 프로이센 출신의 아른하임에게 빠지는 모습을 보인다. 아른하임은 프로이센 출신의 자본가인데 그 어떤 것의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그 어떤 분야에서도 발을 빼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어떤 말을 하면 전문성이 보장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언론은 그의 말을 주목한다. 디오티마는 상징적으로나 개인적(이성적)으로나 그의 존재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그가 평행 운동 위원회의 중심에 있음으로써 평행 운동이 오스트리아 내부만의 일이 아닌 국제성을 띨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디오티마와 아른하임의 영혼적 결합은 마치 당대 유럽의 애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과 같은 양상을 보이며, 아른하임을 둘러싼 미디어의 행태는 본질은 꿰지 못한 채 이슈만 찾아 특종화시키는 오늘날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모스부르거는 살인자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티안 모스부르거로 목수였다. 그는 외로운 인간이었으며 사회는 그를 정신이상자라 불렀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에게 '들러붙는다' 는 이유로 한 창부를 살해한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울리히를 제외한 작품 속 모든 인물들이 <현실 감각> 에 따라 현실 속 주어진 틀에 맞추어 사는 반면, 모스부르거는 울리히가 이야기하는 <가능성 감각> 의 현현과도 같은 인물이다. 외부 세계는 그를 정신이상자로 낙인찍고 그의 삶을 사회의 변두리로 밀어내려 한다. 그러나 사실 그가 사는 그의 삶은 수많은 가능성의 연속일 뿐이며, 이런 모스부르거의 삶을 '음악적' 이라 칭하며 매료되는 등장인물도 생긴다. 당대 이해받지 못했지만 가능성의 세계를 꿈꿨던, 핍박받던 예수Christ 를 은유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그의 범죄가 역겹고 희생자가 가여워지기에 그 생각은 보류하기로 했다.
울리히는 자신의 세계로부터 1년간의 휴가를 내 현실 세계에 뛰어든다. 디오티마를 중심으로 한 빈의 각 분야 주요 인물들에 의해 정교하게 계획된 성대한 '국제 평화 축제' 인 <평행 운동> 은 그가 세상을 체험하기에 적절한 사건인 것처럼 여겨지나, 끊임없는 의견불일치와 탁상공론식 모호한 '위대한 이념들' 에 다소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평행운동 밖, 젊은이들은 아리안족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목소리에 경화되어 간다. 1913년 평행운동을 목표로 했던 운동. 그러나 점점 맹목적 애국심을 기반으로 한 1914년 그날 일어난 제국주의 전쟁의 전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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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몸이 계속 아팠다. 몸도 피곤한데 인물들의 사유를 따라갈 수 없는 부분도 더러 있고 해서 50%가량 읽었을 때쯤 읽는 걸 포기할까 싶었다. 그러다 문학동네에서 마련해 주신 번역가와의 줌 토크 영상을 보게 되었다. 줌 토크는 퇴근 전 시간에 이루어져 실시간으로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감사하게도 다시 보기 영상을 올려주셔서 시청이 가능했다. 그리고 작품을 다시 읽을 용기가 생겼고, 토요일 내내 읽은 덕에 1권을 완독 했다.
2권을 언제 시작할지는 모르겠지만, 1권을 읽고 들었던 생각은 "나 자신에게 어떤 삶을 언약할 것인가" 라는 토지의 서문이었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소 수동적으로 보이나 삶을 가능성이란 맥락에서 열어둔 울리히가 부러우면서도 비현실적으로 여겨졌고, 맥락은 제거된 채 고도로 수치화된 빅데이터 세계에 사는 존재로서 관념화된 존재라는 게 마냥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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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초반까지 읽었을 때 남겼던 기록
사실 도입부 묘사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 다섯 번을 읽었다. 도입부는 지상이 아닌 상공을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서양 상공에서부터 동쪽으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상공의 모습을 '상공에 위치한 자' 의 시각에서 묘사한다. 이후,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묘사를 이어 나간다. 이는 흡사 영화에서 버드아이뷰Bird's Eye View 앵글로 묘사되는 관찰 기법과 유사한데 이런 기법은 대체로 전지적 (초월자의) 시점을 은유하기 때문에 작가 또한 이런 점을 의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시선이 상공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후에는 한 근대 도시가 묘사된다. 이 도시는 "전체적으로는 건물, 법, 규정, 사회적 관습이라는 항구적 소재로 만들어진" 인류가 만들어 낸 여느 평범한 도시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1-1장 부제인 「 여기서는 어떤 일도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 로 보건대, '여기' 는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이 근대 도시를, '어떤 일' 은 인간의 규범과 관습을 벗어난 어떤 특별한 일을, '주목할 만한 방식' 은 역사적으로 다르다고 생각될 만한 별난 방식을 의미하지 않을까. 더불어 역설적으로 사실은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라는 상상도.
1-2장의 부제인 「 특성 없는 남자의 집 」 은 주인공이 사는 환경을 묘사한다. 그가 위치한 공간은 17세기와 18세기의 역사 위에 19세기가 덧대 전근대와 근대가 혼재된 공간인데 그 모습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고 일그러져 있다. 작품에 따르면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유목 시대의 산물" 이나, 사실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의식하는 것부터 인간의 자의식이 발생하고 나름의 <특성> 이라는 게 생겨난다는 점에서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인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수치' 로 정확하게 '측정' 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런 건 크게 보면 중요한 게 아닌 걸지도 모른다.
특성 없는 남자의 '특성 있는 아버지' 는 구시대적 유물과 다름없으나 내 생각에 이는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자라며 자리 잡기까지 거쳐온 모든 관계와 감정을 귀하게 여긴다. 그는 함께 해온 이들 삶의 면면을 추억하며 관계적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 그는 "개인적 이익의 토대가 되는 것," 즉 관계와 공동체와 사회를 숭배한다.
1-4장은 「 현실감각이 있다면 가능성감각도 있어야 한다 」 로 현실감각과 가능성감각에 대한 정의와 비교와 대조를 이어나간다. 뭔 개소린가 싶지만 한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는 전제로 말미암아 이해해 보려고 머리를 싸맸다. (모더니즘 작품이니 그딴 게 없을 수도 있다) 현실감각이란 무엇일까. 이는 여태껏 겪어온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며, 우리는 그것을 기반으로 현재를 판단한다. 현재에 있어야 하지만 없는 것을 기준 삼아 당위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가능성감각이란 그런 토대가 주어지지 않아도 된다. 가능성감각에 따른 인간은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 당위의 반대편에서, if 라는 마법 지팡이를 가지고 이랬으면 어땠을까? 이러면 어떨까?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의 상상의 날개짓을 한다. 이런 점에서 특성을 가진다는 것은 실재하는 현실을 기반한다. 이런 특성을 제거한 관념적 존재가 바로 '특성 없는 남자' 가 되는 것이 아닐까 ··· . 라는 게 1부 초반까지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