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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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사람이 있다. 어두컴컴한 묘지에서 죽은 아이의 시신이 묻힌 묘지 앞에서 상념에 잠긴 한 사람이 있다. 대의를 위해 아들의 죽어가는 순간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으나, 그럼에도 자신이 짊어질 나라의 미래-형체는 과거와 같아서는 안 되기에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는 사람이다.

 

조지 손더스의 <바르도의 링컨(Lincoln in the Bardo)> 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이승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어쩌면 자신들이 죽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바르도Bardo 라는 연옥과 같은 공간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바르도에 에이브러험 링컨의 어린 아들 윌리 링컨이 오면서, 어린아이를 바르도에서 떠나게 해 주려는 귀신들의 노력 속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 이야기에는 전지적인 내레이터의 존재가 없다. 현실을 묘사할 때도, 바르도를 묘사할 때도. 현실 세계를 묘사하고 설명할 때는 무수한 레퍼런스의 인용을 통해 한 사건과 한 인물을 둘러싼 이해관계를 살피고자 한다. 바르도에서는 무수한 입들이 각자의 입장에서의 이야기를 펼친다. 현실 세계와 구분되는 바르도는 모두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곳은 흑인, 여성, 동성애자에 대한 무분별한 차별이 가해지는 19세기 프로테스탄티즘적 교리와 관습이 지배하는 현실의 연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바르도에서 <민주적 평등> 이 이루어지려면 현실에서의 민주적 평등이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바르도의 링컨, 표면상으로는 바르도에 도달한 윌리 링컨과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품 속 에이브러험 링컨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킨 이후에야 대의와 이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의 자식들을 희생시킨 대가가 얼마나 큰지 깨닫는다. 국가의 호명 아래 귀중한 삶과 청춘을 바르도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목소리들, 억압적인 사회에서 짓밟혀 개인적 자유를 위한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존재들. 이 작품은 그런 존재들의 목소리로 말미암아 '국민의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를 약속하겠노라 속삭이며 현실의 희생을 요구하는 위정자들에게 과연 당신들은 약속대로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대변하고 있는지를 묻는 듯한 작품이다. 물론 에이브러험 링컨 개인의 고뇌와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어린 신부와의 첫날밤을 두고 차에 차여 죽은 이의 아이러니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루지 못한 그 첫날밤이 한스러웠는지 내내 그 기억으로 바르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내내 그녀에게 새 인생을 주었다, 우리의 관계는 억압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신부는 그가 죽음으로써 자유로운 새 삶을 얻을 수 있었다.

 

작품의 소개글처럼 말 그대로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전지적 내레이터 없이 대화로만 이루어지는 전개 속, 그럼에도 각 인물들이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안타까워하는지, 무엇을 깨닫는지를 알고자 하며 따라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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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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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을 읽었다. 이름 없는 어느 주인공의 이야기이자 여느 평범한 보통 사람의 이야기였다.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계기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고 느끼고 생각할 보편적인 삶의 면면을 루페로 들여다보고 나온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어느 한 남자의 장례식에서부터 시작한다. 단 몇 분이면 누군가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말 흔해빠진 죽음. 그렇기에 그를 잊을 수 없는 누군가에겐 가슴 사무치도록 아릴 죽음. 죽음의 추모를 위해 죽은 이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장례식에 모여 그가 맞이한 '죽음' 이라는 현실을 각인한다. 그와 관련된 기억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엔 죽은 이의 생애가 담겨 있다.

 

장례식에는 그가 버렸던 자식들이 있었다. 평생을 그를 향한 적대감에 몸부림치던 그들은 그가 죽은 후에야, 적대감 아래 묻어 두었던 감정을 마주한다. 그건 아마 '나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양가적인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장례식에는 그가 존경하고 사랑하던 형이 있었다. 그리고 형의 존재는 죽은 이의 아버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그의 아버지는 에브리맨everyman 이라는 보석상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두 자식에게 물려줄 무언가는 있어야 한다는 신념 하에 운영하던 보석상이었다. 아버지는 평범한 보통 사람에게 '다이아몬드' 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고, 그런 '평범한 보통 사람' 을 위한 보석상을 유지하던 사람이었다. "아름다움과 품위와 가치를 넘어선 썩어 없어지지 않을 불멸의 다이아몬드. 죽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 평생 한쪽 눈에 루페를 끼고 변치 않을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를 들여다보던 아버지. 두 아들에게 루페는 곧 아버지의 삶이자, 아버지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평생 종교를 믿지 않으며 종교는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어 어머니 곁에 묻히던 날, 평생 '어머니, 아버지' 라는 이름 외에는 그 어떤 존재로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육신을 떠나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종교가 거짓말이니 아니니 하는 그의 믿음은 문제조차 될 수 없었다.

 

흙은 죽은 아버지의 모든 구멍을 틀어막았다. 눈, 콧구멍, 입, 귀를 비롯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생명을 빨아들이는 통로, 어쩌면 연장 기계를 부착해 생명을 이어 나갈 수도 있는 구멍들. 흙은 그 모든 구멍들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흙으로 덮여, 흙으로 돌아간 맨몸의 인간에게는 뼈 밖에 남지 않는다.

 

아버지가 죽어도 그의 삶은 이어졌다. 사랑, 탄생, 이혼, 증오, 후회 등의 숱한 순간들을 겪는다. 그러나 삶의 그 어떤 즐거움도 죽음으로 가는 여정을 막을 순 없었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파도처럼 물밀듯 치고 들어오는 노화에 있어서 그는 감히 맞서 싸울 수조차 없었다.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없는 취급 하며 모른 척 살고자 해도, 도처에 도사리는 죽음을 피할 순 없었고, 흙 속 작은 구멍 안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작품의 말미는 죽음을 살아있음으로부터의 벗어남, 즉 존재의 해방으로 표현한다. 한 사람의 삶이 죽음으로 끝맺음 지어지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일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걸까. 살아생전 자신과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었음에도 아버지가 가는 길이 외롭지 않길 바라는 그의 딸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아버지는 당신의 부모를 사랑했으니, 그분들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어딘가에 혼자 계시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에브리맨everyman, '평범한 사람들' 이라는 의미의 주인공인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보석상 이름. 그것은 어쩌면 다이아몬드를 꿈꾸지만 흙 속 뼈 조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보통의 모든 삶을 위한 이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다시금 문학을 읽는다는 게 뭘까라는 생각을 해봤던 것 같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느 누군가의 삶을 살아보는 것. 좁은 직접 경험의 반경으로는 쉽사리 접할 수 없는 어느 누군가의 감정을, 생각을, 삶의 면면을 들여다 보고 그와 일체화시켜 보며 내 삶을 돌이켜 보는 것. 그러면서 내 안에 또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늘려나가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연습이 필요하기에 어떻게든 꾸준히 문학을 읽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다잡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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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열린책들 세계문학 194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재혁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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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요제프 K를 모함했음이 분명하다.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느 날 아침 체포되었으니 말이다.

 

서른 살 생일이 되던 날 아침 요제프 K는 자신의 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 의해 이유를 알 수 없는 죄목으로 기소 당해 체포 된다. 그는 감금당하진 않았지만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은 이상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 도대체 어떤 죄목으로 누가 그를 기소한 것인지 알아보려 해도 법원이란 존재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미궁과 같은 모습으로만 보인다. 실제로도 요제프 K에게 이 법원이란 공간은 미스터리하고 기이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심리에 참여하러 가도 논지에서 벗어난 이상한 말만 늘어놓는 하급 법관,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비웃는 사람들 등의 존재가 이러한 괴이함에 도를 더한다. 친척 어른의 도움으로 변호사를 소개받아도 그 또한 쓸모없는 정보만 제공하며 시간 낭비를 할 뿐 그가 소송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지는 않는다. 결국 그는 서른한 살 생일, 사형을 당한다. "개 같군!" 이라는 유언과 함께.

 

작품이 전반적으로 음산하고 기묘하며 미스터리하다. 처음에는 판타지인가? 싶기도 했다. 주인공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죄목으로 기소 당해 자기 집 안방에서 체포당한다. 그는 이제 막 성공가도에 오르려던 젊은이였으나 소송에 휘말리게 되면서 점점 일상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혐의를 파악하고 죄를 벗어내기 위해,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법이라는 체계의 실체를 알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노력하나 실체는커녕 수많은 법의 <문지기> 들만 마주할 뿐이다. 문지기들은 요제프 K를 상대로 관료주의적 태도로 알량한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또한 법에 종속된 처지이며 한편으론 자신들은 반은 자유로운 요제프 K보다 못한 처지" 임을 알지 못한다.

 

작품은 일 년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부터 모순적이고 부조리하여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지속된다는 점에서 삶의 면면을 그대로 드러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소송에 휘말리는 와중에도 여성 편력을 드러내는 모습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그와 비슷한 처지였던 상인이 결국 변호사의 개가 되는 모습을 보며 아 그래서 결말에서 개 같군이라는 말을 하는구나, 싶어 한탄스럽기도 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대성당에서> 장의 <법 앞에서> 라고 일컫어지는 문지기 전설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다. 추후에 재독 할 때 이 장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발췌

 

[...] 법 앞에 문지기가 하나 서 있다. 시골에서 한 남자가 찾아와 문지기에게 법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남자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럴 수 있겠지요.》 문지기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 돼요.》 법에 이르는 문이 여느 때처럼 열려 있는 데다가 문지기가 옆으로 비껴 섰기 때문에 남자는 그 틈으로 문 안을 들여다보려고 허리를 구부린다. 문지기가 그것을 보더니 웃으면서 말한다. 《그렇게 마음이 끌리면 나를 제치고 한번 들어가 보시오. 하지만 내가 힘이 세다는 걸 명심해 두시오. 나는 가장 말단 문지기에 불과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힘이 센 문지기들이 서 있소. 세 번째 문지기의 얼굴을 나는 쳐다보지도 못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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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지음, 서제인 옮김, 정희진 해설 / 엘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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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만> 사랑한다. 그들에게 최고의 유대인은 죽은 유대인이며, 이 죽은 유대인들조차 '더 큰' 담론의 일부로써만 논할 가치가 있다. 예컨대 서양 문명의 한계 등과 같은 누군가를 교육하기 위한 고급스러운 수단적 은유로써만 기능한다. 그것은 문명 속에서 하나의 도덕극이자 표어의 역할을 하나, 정작 지금 현재 실존하는 구체적 인간들의 삶은 지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현존하는 눈앞의 삶을 지운 채 죽은 이들을 앞세운다. 안네 프랑크의 사가를 전시하면서 사가 관리인인 동시대의 유대인의 정체성은 억압한다. 위대한 인류 문명에서 또 다른 홀로코스트another holocaust 를 재발시키지 않기 위해 그때의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를 배워야 하나,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홀로코스트도 그때의 홀로코스트의 정도가 아닌 것은 '홀로코스트' 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는 이유로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서구 사회는 유대인을 배척해 왔다. 그 역사는 수많은 제국과 문명의 흥망성쇠와 함께 할 만큼 오래되었다. 고대 이래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전통을 거부하며 지배 문화에 타협하고 순응하면서 동화되는 것을 선택해 왔다. 괴롭힘과 가스라이팅이 예외가 아닌 원칙인 사회 속에서, 멋지지 않을 자유,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인 척하지 않을 자유를 위해. 그 어떤 것보다도 <살아도 된다> 라는 허락을 받기 위해.

 

저자는 홀로코스트 이후 자성을 촉구해 왔다는 서구 사회에서도 여전히 지배 문화를 중심으로 은밀한 차별이 진행 중이라 주장한다. 세기를 거쳐, 문명은 한 집단을 '존재' 가 아닌 하나의 '구경거리' 이자 '유희거리' 로 취급해 왔고, 매체의 발달은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혐오의 급속한 확산도 야기했다. 근대를 열었던 인쇄술의 발달 속에서도, 전 세계 커뮤니티 공동체를 형성한 인터넷의 발달 속에서도, 주류 집단은 유대인 혐오라는 시대의 유희거리를 놓칠 수 없었다.

 

위대한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을 읽고 기분 나빠하면 그건 해당 작품이 가지고 있는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시대를 앞서간 통찰을 짚어내지 못한 우둔함 때문이고, '1파운드의 살' 이라는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혐오하는) 우리가 나쁜 게 아니라 '예민한' 너희가 나쁜 것이다. 악의 없는 "히틀러는 너희 눈이 전부 검은색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와 같은 말은 여러 함의를 포함한다. '너희' 라고 지칭함으로써 유대인들을 타자화한다. 히틀러를 경멸하면서도 히틀러의 말을 레퍼런스로 삼으며, '같은데' 라는 단언의 어조를 피함으로써 도덕적 지탄을 받을 책임을 회피한다.

 

글쎄. 개인적으로는 읽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던 것 같다. 저자가 기술한 이야기들에 깊이 공감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슬픔과 회한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현시대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직선적 시간관을 근간으로 하는 서구 문명과 달리, 유대교의 시간관은 나선형이기에 '미래가 곧 현재이고, 현재는 본질적으로 과거'" 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막(중동)에서의 유대인을 이야기하면서, 2차 대전 이후 이스라엘의 존재에 관해 언급하면서 어떻게 팔레스타인에 관해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서구 지배 문화를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의 '유대 자본' 이 어떻게 전 세계 (특히 중동)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해선 입을 닫는다. 그저 끊임없이 자신이 '하버드 문학 박사' 라는 권위를 내세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시사점이 꽤 있다. 앞서 언급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에 반유대주의에 관한 시대를 초월한 자성 능력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주류 문학 비평가들에 대한 반박과 더불어 '악의 평범성' 으로 알려진 아돌프 아이히만에 관한 한나 아렌트의 사유에 대한 반박이 그렇다. 저자 데어라 혼은 나치 독일 친위대의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관해 한나 아렌트와 견해를 달리한다. 저자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놀랄 만큼 많은 시간을 사유하며, 개념을 흡수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며 보낸 사람이다. 다만 그 생각이 허튼 생각이었고, 그 허튼 생각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했을 뿐" 이다. 즉 아이히만은 사유의 부재 탓에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게 아닌데 아렌트가 왜 그런 주장을 했느냐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다면, 그 주장이 왜 한나 아렌트에게 중요했던 것인가라는 점인데, 배리언 프라이의 선행을 외면한 아렌트를 고발하며 진행된 이 장은 다소 모호한 상태로 마무리된다.

 

구경꾼들에게 보여지는 호랑이는 도살하기 위해 전시된다. 저자는 유대인에 은유하기 위해 호랑이를 언급하나, 사실 호랑이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삶의 터전을 뺏긴 자들의 은유로써도 충분하다. 개인의 죽음이 지배 문화 내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것에 대한 경고, 그러나 거울을 반대로 돌리면 또 다른 피 흘리는 자들이 있다는 걸 외면하고 있는 듯한 아이러니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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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5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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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격변하는 근대 이행기 속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여러 갈등을 직면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 울리히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전에 포스팅을 한 바 있듯, 작품은 지상이 아닌 상공을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도입부는 유럽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구절 중 하나라고 하는데,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서양 상공에서 전지전능한 어느 초월적 존재가 근대 불특정한 어느 한 도시를 굽어 살피듯 시작이 된다. 전지적 시점에서 시작한 내러티브는 투시법의 소실점을 찾듯 지상의 어느 한 존재, 즉 울리히에게로 꽂히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입을 빌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도대체 특성qualities 이란 게 뭘까 초반부 내내 아리송했다. 번역가의 말씀에 따르면 "현실을 살아가면서 의도치 않게 나에게 달라붙는 속성들, 현실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들" 이라고 한다. 나는 이 점에 고개를 끄덕였고, 1권을 완독 한 후 개인적으로는 '선천적이고 고유한 것이라 착각하나, 사실 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한 어떤 스테레오타입적 굴레' 라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다. 울리히는 자타공인 특성 없는 남자이다. 그는 외부에서 주입하는 특성을 거부한다.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필요한 인정욕구 및 소유욕구 또한 없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가능성' 의 세계를 물색한다.

 

작가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세계인식> 을 위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특성 없는 남자 울리히는 자신의 세계를 찾아 나서기 위해 군인에서 공학자로, 공학자에서 수학자로 직업을 변경한다. 상명하복의 위계에 따라 정해진 규율에 맞추어 '특성 있게' 살아야 하는 군인의 삶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자연을 연구하나 결국 종교재판에 설 수밖에 없었던 갈릴레이처럼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묘하게 자유로울 수 없는 공학자의 삶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 이성이 발명한 고도의 추상 세계인 수학을 탐구하기로 한다.

 

그의 직업 변천은 근대 이행기 서구 사회가 나아가는 사회 변천의 과정이기도 했다. 군주 혹은 교황과 같은 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삶의 방향성은 자연과학의 세계로 방향을 바꾼다. 그 기저에는 모든 것을 수치로 환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 통계학 및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모든 개별적 삶은 맥락이 제거된 채 점점 수치로 환원되었다. 고도로 추상화되고 관념화되었다. 점점 실존하는 개인이 설 자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울리히는 그렇게 추상화되고 관념화된 개인에게 부여되는 평균적 전형성 또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작품 속 각각의 인물은 당대 어떤 상징을 나타내는데 울리히를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인물은 세 사람이다. 디오티마, 아른하임, 그리고 모스부르거. 당시는 20세기 초 1차 대전 직전으로, 당대 유럽의 중심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봉건제가 몰락하고 자본주의 및 민주주의가 부상하는 급변하는 시대 속 혼란을 겪고 있었다. 위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혼이 파편화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라이벌 의식을 느끼던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2세가 즉위 30주년을 기념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위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무려 70주년인데! 이러한 생각에 오스트리아는 <평행 운동> 을 기획하기에 이르고 그 중심에는 울리히의 사촌인 디오티마가 있었다. 디오티마는 당대 고위 관료의 부인으로 평행 운동을 통해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애국심은 물론 위대한 전통, 그간 이룩해 온 진보, 번영과 행복 등을 전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울리히의 눈에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개인을 옭아매는 특성에 불과했다.

 

디오티마는 프로이센 출신의 아른하임에게 빠지는 모습을 보인다. 아른하임은 프로이센 출신의 자본가인데 그 어떤 것의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그 어떤 분야에서도 발을 빼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어떤 말을 하면 전문성이 보장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언론은 그의 말을 주목한다. 디오티마는 상징적으로나 개인적(이성적)으로나 그의 존재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그가 평행 운동 위원회의 중심에 있음으로써 평행 운동이 오스트리아 내부만의 일이 아닌 국제성을 띨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디오티마와 아른하임의 영혼적 결합은 마치 당대 유럽의 애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과 같은 양상을 보이며, 아른하임을 둘러싼 미디어의 행태는 본질은 꿰지 못한 채 이슈만 찾아 특종화시키는 오늘날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모스부르거는 살인자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티안 모스부르거로 목수였다. 그는 외로운 인간이었으며 사회는 그를 정신이상자라 불렀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에게 '들러붙는다' 는 이유로 한 창부를 살해한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울리히를 제외한 작품 속 모든 인물들이 <현실 감각> 에 따라 현실 속 주어진 틀에 맞추어 사는 반면, 모스부르거는 울리히가 이야기하는 <가능성 감각> 의 현현과도 같은 인물이다. 외부 세계는 그를 정신이상자로 낙인찍고 그의 삶을 사회의 변두리로 밀어내려 한다. 그러나 사실 그가 사는 그의 삶은 수많은 가능성의 연속일 뿐이며, 이런 모스부르거의 삶을 '음악적' 이라 칭하며 매료되는 등장인물도 생긴다. 당대 이해받지 못했지만 가능성의 세계를 꿈꿨던, 핍박받던 예수Christ 를 은유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그의 범죄가 역겹고 희생자가 가여워지기에 그 생각은 보류하기로 했다.

 

울리히는 자신의 세계로부터 1년간의 휴가를 내 현실 세계에 뛰어든다. 디오티마를 중심으로 한 빈의 각 분야 주요 인물들에 의해 정교하게 계획된 성대한 '국제 평화 축제' 인 <평행 운동> 은 그가 세상을 체험하기에 적절한 사건인 것처럼 여겨지나, 끊임없는 의견불일치와 탁상공론식 모호한 '위대한 이념들' 에 다소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평행운동 밖, 젊은이들은 아리안족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목소리에 경화되어 간다. 1913년 평행운동을 목표로 했던 운동. 그러나 점점 맹목적 애국심을 기반으로 한 1914년 그날 일어난 제국주의 전쟁의 전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근래 몸이 계속 아팠다. 몸도 피곤한데 인물들의 사유를 따라갈 수 없는 부분도 더러 있고 해서 50%가량 읽었을 때쯤 읽는 걸 포기할까 싶었다. 그러다 문학동네에서 마련해 주신 번역가와의 줌 토크 영상을 보게 되었다. 줌 토크는 퇴근 전 시간에 이루어져 실시간으로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감사하게도 다시 보기 영상을 올려주셔서 시청이 가능했다. 그리고 작품을 다시 읽을 용기가 생겼고, 토요일 내내 읽은 덕에 1권을 완독 했다.

 

2권을 언제 시작할지는 모르겠지만, 1권을 읽고 들었던 생각은 "나 자신에게 어떤 삶을 언약할 것인가" 라는 토지의 서문이었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소 수동적으로 보이나 삶을 가능성이란 맥락에서 열어둔 울리히가 부러우면서도 비현실적으로 여겨졌고, 맥락은 제거된 채 고도로 수치화된 빅데이터 세계에 사는 존재로서 관념화된 존재라는 게 마냥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1부 초반까지 읽었을 때 남겼던 기록

 

사실 도입부 묘사가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 다섯 번을 읽었다. 도입부는 지상이 아닌 상공을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서양 상공에서부터 동쪽으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상공의 모습을 '상공에 위치한 자' 의 시각에서 묘사한다. 이후,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묘사를 이어 나간다. 이는 흡사 영화에서 버드아이뷰Bird's Eye View 앵글로 묘사되는 관찰 기법과 유사한데 이런 기법은 대체로 전지적 (초월자의) 시점을 은유하기 때문에 작가 또한 이런 점을 의도하지 않았을까 싶다.

 

시선이 상공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후에는 한 근대 도시가 묘사된다. 이 도시는 "전체적으로는 건물, 법, 규정, 사회적 관습이라는 항구적 소재로 만들어진" 인류가 만들어 낸 여느 평범한 도시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1-1장 부제인 「 여기서는 어떤 일도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 로 보건대, '여기' 는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이 근대 도시를, '어떤 일' 은 인간의 규범과 관습을 벗어난 어떤 특별한 일을, '주목할 만한 방식' 은 역사적으로 다르다고 생각될 만한 별난 방식을 의미하지 않을까. 더불어 역설적으로 사실은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라는 상상도.

 

1-2장의 부제인 「 특성 없는 남자의 집 」 은 주인공이 사는 환경을 묘사한다. 그가 위치한 공간은 17세기와 18세기의 역사 위에 19세기가 덧대 전근대와 근대가 혼재된 공간인데 그 모습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고 일그러져 있다. 작품에 따르면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유목 시대의 산물" 이나, 사실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의식하는 것부터 인간의 자의식이 발생하고 나름의 <특성> 이라는 게 생겨난다는 점에서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인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수치' 로 정확하게 '측정' 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런 건 크게 보면 중요한 게 아닌 걸지도 모른다.

 

특성 없는 남자의 '특성 있는 아버지' 는 구시대적 유물과 다름없으나 내 생각에 이는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자라며 자리 잡기까지 거쳐온 모든 관계와 감정을 귀하게 여긴다. 그는 함께 해온 이들 삶의 면면을 추억하며 관계적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 그는 "개인적 이익의 토대가 되는 것," 즉 관계와 공동체와 사회를 숭배한다.

 

1-4장은 「 현실감각이 있다면 가능성감각도 있어야 한다 」 로 현실감각과 가능성감각에 대한 정의와 비교와 대조를 이어나간다. 뭔 개소린가 싶지만 한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는 전제로 말미암아 이해해 보려고 머리를 싸맸다. (모더니즘 작품이니 그딴 게 없을 수도 있다) 현실감각이란 무엇일까. 이는 여태껏 겪어온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며, 우리는 그것을 기반으로 현재를 판단한다. 현재에 있어야 하지만 없는 것을 기준 삼아 당위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가능성감각이란 그런 토대가 주어지지 않아도 된다. 가능성감각에 따른 인간은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 당위의 반대편에서, if 라는 마법 지팡이를 가지고 이랬으면 어땠을까? 이러면 어떨까?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 의 상상의 날개짓을 한다. 이런 점에서 특성을 가진다는 것은 실재하는 현실을 기반한다. 이런 특성을 제거한 관념적 존재가 바로 '특성 없는 남자' 가 되는 것이 아닐까 ··· . 라는 게 1부 초반까지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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