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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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가 출간도 전에 자신 있게 서평단 모집을 한 이유를 알겠다. 영화화된다는 것도,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 치유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알겠다. 가볍고 술술 익히는 문체이나 매 구간마다 멈칫하게 만드는 구간이 있었고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풀어나가면서도 인물의 내면을 점층적으로 파고들게끔 만드는 신기한 작품.


불운의 사고로 엄마를 잃고 다리에 평생의 고통을 짊어지게 된 샘. 아픈 언니로 인해 방임되다시피 자라온 세이디. 외롭고 몸도 마음도 아픈 두 아이는 게임을 통해 친구가 된다. 게임을 통해 육백여 시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아이들은 게임이 그 어떤 것보다 내밀한 행위임을 깨닫는다. 함께 게임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온전히 드러내고 상대로 인해 다치더라도 감내하겠다는 신뢰와 사랑을 기반으로 한 행위임을 깨닫는다.


비록 한 순간의 오해와 무신경이 두 사람을 오랜 세월 갈라놓긴 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영원한 친구. 다시 만난 아이들은 이제 게임을 함께 플레이하는 것을 넘어 함께 게임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고자 한다. 그들이 겪어온 삶과 아픔이 녹아든 세계. 샘과 세이디는 어떻게 하면 게임 속 인물의 여정을 더 편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고민하곤 했고, 어쩌면 그것은 자신들이 창조한 세계 속 인물들이 그들 자신임과 동시에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아닌 다른 이의 삶이 순탄했으면 하는 바람은 세상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끔 만드는 매직 아이와 같은 기술이 동반되어야 했다.


인생이라는 게임은 불공정한 게임과 같다. 그 어떤 이도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삶의 불확실성을 예측할 수 없으나, 더불어 그 어떤 이도 NPC가 아니다. 불공정한 게임 판에서 숱한 인종차별적 모욕과 눈물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샘의 애나 리. 평생 정체성의 문제에서 비롯된 경계를 오가며 외롭게 살다 간 마크스의 애나 리. 왜 그들에겐 부당한 삶을 '견뎌냄' 이 당연했을까, 아니 왜 그들에게만 당연하다 주입됐을까. 그럼에도 그들이 그 불공정함을 견딜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던 동현과 봉자의 삶에서 비롯된 애나 리의 삶은 얼마나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 애나 리(들)의 희생 위에서야 비로소 샘과 마크스가 삶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던 건 아닐까.


게임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결국 그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들을 그려보는 것. 어쩌면 한 사람이 직면할 세계 자체를 탐구하는 일이었다. 게이머가 직면할 숱한 찬탄과 반박의 대립을 설계하는 과정 속에서 게임을 디자인하는 샘과 세이디도 성장하게 된다.


서두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로 시작하는데,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의 삶을 살아가며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선 타인에게 손 뻗고 손 내밀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러려면 어쩌면 모든 구성원이 죽지 않고, 모두를 충분히 먹이고, 그렇다고 너무 빨리 가지 않고, 장애인도 이민자도 포용하는 사회가 구성되어야 한다. 작품은 주류의 시선에선 비가시화되어 '눈에 힘을 뺐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매직아이와 같은 삶을 두고 환한 미소를 보일 수 있는 사회를 구현하고자 애써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인생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요, 우리는 모두 무대 위에서 우쭐대고 안달하는 불쌍한 연극배우에 불과하나, 그래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 앞에 놓인 무한한 날들을 개척해 나가며, 그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버거운 짐은 어느 누가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되새기며.


문학동네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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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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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페미니즘의 도전을 비롯 여러 여성주의 도서 및 칼럼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정희진이라는 이름. 그런 정희진 선생님은 어떤 책을 어떤 시각으로 읽는지 궁금했다. 강의를 듣듯 각 잡고 공부하며 읽을 요량으로 이 책을 선택했고 예상대로 전자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은 형광펜칠 범벅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얼마나 깊게 사유해버릇 해야 이 정도 깊이의 독후감을 다량으로 써낼 수 있는 걸까? 속칭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통섭적 시각으로 경계 밖에서 제도의 중심을 향해 겨누는 글들은 독서는 저항과 불복종의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네가 읽는 것이 너를 말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사유의 도구가 될 법한 수많은 명언들은 한 번에 소화시키기는 힘들 듯하다. 물론 이후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를 읽을 생각이지만. 개인적으로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는 빈도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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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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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2학년 때였나 3학년 때였나 수업 시간에 다룬 적이 있었다. 그 수업의 교수님은 수업 중에 어떤 화두가 나오면 다음 시간에 그것과 관련된 주제로 수업을 이끌던 분이셨는데, 여성혐오 ㅡ 구체적으로 모니카 르윈스키와 관련된 편견과 인습적 낙인에 관해 이야기를 하시다 이 작품을 다루셨다. 발췌독이었지만 그 당시 나는 예측할 수 없는 교수님의 수업 방식에 지치기도 하고 작가의 장광설에 피로를 느껴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최근 다시 읽은 <휴먼 스테인> 은 대문호의 손길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문명의 진상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은 콜먼 실크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으로 상징되는 문명의 근원에서 작동하는 관습과 규율, 그 속에서 소외된 이들, 그리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주류 문화의 폭력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 콜먼 실크는 제도와 규범의 일원이 되고자 자신의 혈통적 근원을 비롯한 모든 것을 버린 비극적 영웅이었다. 그는 본디 흑인으로 태어났으나 군대라는 미 제국의 중심에 입성하기 위해 자신을 옥죄던 피부색을 집어 던지고 스스로 정체성을 재정립한다. 주류의 일원이 되고 관습의 중심에 서기 위해 백인 유태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고등교육으로 재무장해 아테나대학의 교수가 되었던 콜먼. "백합처럼 새하얀 이들의 위선" 으로 가득찬 아테나대학은 그리스 비극의 양상처럼 아테나라는 문명의 진원지를 상징하는 곳으로, 그는 그 아테나의 중심에서 부조리를 타파하고 변혁을 꾀하는 영웅적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콜먼은 스푹스Spooks 사건이라는 '우연한' 계기를 통해 문명의 중심에서 끝없이 추락하게 된다. 

 

추락한 그의 곁엔 포니아가 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절반만큼이나 어리고 아테나 대학의 가장 밑바닥에서 잡부 역할을 하는 여자. 어려서는 부모로부터의 폭력에, 자라서는 남편의 폭력에 길들여진 여자. 문자와 함께 발전한 문명이 끝없이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불건전하고도 불온하다' 낙인 찍으며 그 고통을 외면해온 여자. 하지만 포니아가 가진 제도 밖 속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콜먼을 '본연의 자신' 으로 돌아가는 황홀경에 빠지게 만든다. 콜먼의 주변인들은 포니아가 그의 삶을 파멸시킬 거라 겁박하나, 사실 포니아는 콜먼을 겹겹이 쌓인 인공적 정체성의 껍질을 벗겨낸 '가장 단순한 벌거벗은 존재' 로 되돌릴 구원자나 마찬가지였다. 

 

작품 속 인습의 족쇄는 콜먼과 포니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규범의 폭력은 전쟁으로 확장되고, 포니아의 남편 팔리는 그 폭력의 희생자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그는 국가의 명에 따라 '노란' 인간들을 살상하는데 길들여지나 이는 고엽제 피해라는 카운터펀치로 돌아온다. 더불어, 콜먼과 대립하는 또 다른 인물인 델핀 루는 프랑스 규범이 길러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델핀 루 또한 미국이라는 제국의 중심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분명 콜먼을 상대로 한 루의 고발은 부당하다. 그러나 루와 포니아, 그리고 작중에서 이름으로만 언급되는 모니카 르윈스키의 존재는 한 사회의 숱한 정치적 올바름을 향한 진전 속에서도 여전히 여성혐오에 대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방증한다. 

 

작품은 콜먼과 포니아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들의 죽음은 '비정상적' 인 팔리가 저지른 일탈적 죄에 불과한가? 그만 없었더라면 그들의 죽음은 없던 일이 될 수 있었는가? 콜먼과 포니아의 죽음은 약자가 약자를 상대로 휘두른, 인습의 폭력이 초래한 결과는 아닌가. 신기한 점은 작품 전반에 걸쳐 와스프WASP 로 대변되는 주류 문화는 주체로서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그들이 짜놓은 촘촘한 인습의 거미줄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문명은 콜먼과 포니아를 비롯해 제도의 표준에서 벗어난 이들을 얼룩/오점이라 칭한다. 휴먼 스테인Human Stain, 존재로서 사회의 얼룩이 된 이들. 그러나 주류가 경멸해 마지 않는 얼룩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얼룩은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불온한 그 무언가인가, 혹 주류 문명이 폭력으로써 지진 고통의 낙인은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콜먼은 스푹스 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옥죄던 그 모든 인습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욕망에 자유로워졌다. 물론 운명은 가혹하게도, 감히 네 발의 족쇄로 채운 삶의 굴레를 끊어내려 하느냐 으름장을 놓으며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지만. 그러나 이 '변종' 과 같은 영웅의 슬픈 일생은 죽음과 함께 잊혀져야 하는가? 작가 필립 로스는 세상에 그의 삶을 내보일 이야기꾼을 준비해둔다. 처음엔 "내 일이 아니라" 며 외면했던 작가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내레이터는, 추악한 진실에 근접할수록 세상에 콜먼 실크라는 한 인간의 진실한 삶을 내보임과 동시에 그에게 가해진 주류 문화의 인습적 폭력을 고발하리라는 다짐을 한다.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정말로 알고 있는가. 타인이 가진 그 모든 공백과 비밀을, "어떤 일이 어떻게 해서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지, 인간사를 규정하는 사건들, 불확실성들, 사고들, 불화, 충격적인 부조리의 연속인 난맥상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로 모두가 알고 있는가? 감히 전지전능한 신의 행세를 하며 타인의 삶을 짓밟고자 내세우는 착각과 오만이 아닌가?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모든 걸 안다" 고 자만하는 인습의 속박에서 해방된, 폭풍 속으로 사라진 연인. 작품은 그들의 삶을 통해 타인의 삶과 아픔에 관해 상상하면서도 그 상상력이 그를 겨눈 무기가 되어선 안 된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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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티크M Critique M 2023 Vol.6 - 마녀들이 돌아왔다
김정희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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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코리아에서 발간된 <크리티크 M> 6호는 종교와 합체한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가 인류사 속에서 어떻게 모든 유형의 여성들을 희생제물화시켜 왔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선, 흔히 '마녀' 를 사냥한다는 말에 따라 마녀사냥은 중세에 불어닥친 광풍이었을 것 같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중세가 아닌 인본주의 시대로 불리는 14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후 마녀사냥이 심화되기 시작됐다는 점이 지적된다. 더불어,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 전반에 퍼진 죽음에 대한 공포와 교회 내부 부패 문제를 외부로 돌리고자 하는 움직임은 악마의 형상에 여성의 이미지를 덧씌우고자 했고, 이에 따라 인간 내부의 죄의식을 형성해 교회와 사회 규범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


자본주의 시대 또한 마녀사냥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온 세상을 수치화·물질화하여 군림수단으로 만들고자 하는 근대의 흐름 속에서 지배 계급은 신대륙 개척을 비롯한 '새로운 질서' 를 수립하기 위해 (1) 사회 취약계층의 생존수단인 토지를 약탈하여 사유화하고 (2)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인식하여 신대륙 개척에 앞장서며 (3) 주류의 규범에 벗어난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마녀사냥하기 시작한다.

 

'마녀 감별법' 은 언제나 주류의 기준에 따른 것이었고, 마녀로 지목당하는 이들은 대개 교회와 정부를 비롯한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이들이었다. 독신, 부랑자를 비롯한 근대의학에 반反 하는 민간요법을 아는 여성들. 법률·의학·정치를 이루는 문자권력을 위협하는 읽고 쓰는 여성들은 온갖 종류의 지배에 목소리 높이는 '길들여질 수 없는' 존재의 상징이 되어 지배 계급의 박해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녀사냥의 문제는 현대 사회와 무관한 전근대적 폭력의 양상에 불과한가? 아니, 오히려 타자의 기준을 더욱더 모호하고 다층적으로 세워, 나와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불신은 무기력과 공포를 낳아 구조적 폭력에 동조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현실 속에서 사회적 낙인과 함께 <마녀> 가 된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방' 과 '목소리' 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들은 타자화라는 그물 속에서 희생된 '마녀 조상들' 을 기리고, 스스로를 <마녀> 라 명명하며 마녀라는 정체성을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뿌리내릴 수단으로 삼는다. 세상을 둘러싼 온갖 불평등과의 지배관계를 겨냥하며 세상을 향해 "우리는 당신들이 미처 태워 죽이지 못한 마녀들의 손녀다. (WE ARE THE GRAND DAUGHTERS OF ALL THE WITCHES YOU WERE NEVER ABLE TO BURN.)" 라는 말을 외친다.

 

개인적으로 표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신청했던 서평단이었다. '마녀들이 돌아왔다' 라니. 표제 자체로 한 사회에서 소외되고 핍박받던 이들이 부활할 수 있도록, 기꺼이 마녀가 되거나 마녀의 친구가 되겠노라 선언하는 용기 있는 자들의 목소리 같지 않나. '불온한' 존재로 낙인찍힌 수많은 <뱀> 들의 이야기를 여러 예술 작품 및 사회문화 현상과 곁들여 해석해볼 기회와 다름없는 지성지였다.

 

르몽드코리아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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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일러스트)
조지 오웰 지음,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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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보는 선형적 진보만을 전제하는가? 전제정치를 기반으로 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조지 오웰의 <1984> 는 세계의 진보는 더 많은 희망을 향한 진보가 아닌, 더 많은 고통을 향한 진보가 아닌가를 역설한다.


역사상 전제 군주 시대의 〈하지 마〉 라는 부정명령은 전체주의 시대의 〈해야 한다〉 라는 당위명령으로 변해왔고, 작품은 당위의 명령이 빅브라더의 세계에선 〈이렇게 되어 있다〉 라는 존재명령으로 변함을 이야기한다.


"그 어떤 외부세계도 인간의 의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재할 수 없" 으며 "오직 훈련받은 자만이 실재를 볼 수 있다" 는 논리는 일견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지는 서구 사상사의 경험과 인식론에 근거한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 당의 눈을 통하지 않고는 실재를 볼 수 없다는 주장은 일당독재의 정당화로 귀결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는 지배논리를 정립할 근거가 될 뿐이다.


작품 속 당은 깨어 있는 민중의 집단적 움직임을 막기 위해 가족 단위의 결속부터 해체시키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이 개인임을 멈출 때, 즉 집단에 예속될 때만 권력을 가지게 되며 굴종이 곧 자유라는 주장을 내건다.


작품의 말미에서 윈스턴은 결국 그들의 사상에 감화되어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감시하는 소비사회의 성과주체가 결국 성과사회의 논리를 내면화하여 자기 착취를 일삼게 된다는 한병철 교수님의 저서들이 떠올랐다. 빅 브라더의 <이렇게 되어 있다> 라는 존재명령이 이제 성과주체의 <이렇게 할 수 있다> 라는 가능명령으로 변한 것 아닐까.


<제5도살장> 도 그렇고 일러스트가 있는 작품을 볼 때마다 감탄하는 지점은 삽화를 그리는 작가의 해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표지는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말하는 대사 중 한 구절을 이미지화한 것이나, 비단 오브라이언과 윈스턴 개인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불특정 다수의 수많은 개인 중 하나로 대입해서 해석해도 말이 되게끔 그려져 있다. 더구나 전에 작품을 읽을 때 나는 기계의 눈을 상상했는데, 일러스트는 빅 브라더의 감시의 눈을 인간의 눈으로 그려놓았다. 이는 아마도 빅 브라더를 전면화하고 뒤로 숨은 이면의 독재 권력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닐까.


사실 개인적으로 재밌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유는 힘, 무지는 굴종' 이라는 말에서 힘과 굴종이라는 단어의 교묘한 자리 바꿈으로 인해 '전쟁이 곧 평화' 라는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릴 때는 민음사꺼로, 최근에는 문학동네와 열린책들 버전을 읽었는데 여러 번 읽고 나만의 여과물을 남길 가치는 충분한 작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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