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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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의 죽음, 그리고 장례식에 그녀의 전 연인들이 모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표면상으로도 복잡다단한 이야기는 각자의 시각에서 죽은 전 연인 '몰리 레인' 에 관한 (파편적) 회고를 내놓으며 전개된다.


몰리 레인의 전 연인들은 각각 예술가 클라이브, 진보 언론인 버넌, 보수 정치인 가마니이며, 출판 재벌인 남편 조지는 몰리의 장례식에 세 사람이 모인 것을 마땅찮아한다.


우선 클라이브는 어려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고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예술가이다. 몰리의 20대 청춘을 쥐었던 그는 현실과 유리된 모더니즘 예술의 화신으로 늘 몽상 속에 사는 듯하다. 그는 현실과 자신을 구별 짓고 사회의 고통을 방관하는 예술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그의 방관적 태도는 악상을 떠올린다는 핑계로 범죄 현장을 모른 척하는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더 저지The Judge 의 편집국장 버넌은 "전후의 사회복지국가에서 태어나 나라가 주는 젖과 꿀을 먹고 자라고, 부모들이 이룬 소박한 부에 얹혀살다가 곧장 완전고용의 시대에 돌입한 세대" 의 일원이다. 그는 스스로 진보주의자를 참칭 하며 보수 정치인 가머니를 상대로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모든 상황을 판단하는 위치에 서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무기로 가머니의 사생활을 정치적으로 공격하여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고자 하지만, 실상 황색 언론의 중심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이윤 추구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그러한 결정' 이 옳은가에 관해 클라이브와 빚게 되는 갈등이 이야기를 파국으로 이끌 단초가 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기반으로 강력한 이민 규제 법안 등을 내세우는 보수 정치인 가머니는 몰리와 내연 관계에 있던 인물로, 대중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이념과는 반대되는 은밀한 사생활을 지니고 있다. 그는 왜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자 했을까. 어쩌면 자신의 삶과 정체성보다는 탈진실적인 정치적 이득, 더 근본적으로는 그것에서 얻을 경제적 이득을 더 우선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출판 재벌인 몰리의 남편 조지는 사실상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장악한 자본의 상징과도 다름없다. 황색 언론과 "머저리들" 의 주머니를 털어 부를 이룩한 조지는 몰리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마저 소유하고자 했으며, 그 어떤 이념적 가치보다도 은밀하고 압도적으로 몰리 레인의 죽음을 독점한 신자유주의의 화신이다.


작품 속 모든 남자들은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몰리 레인을 사랑했다고 주장하나, 실상 그들 모두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선적인 나르시시스트들이다. 그들에게 몰리의 죽음은 상대의 입을 막고 자신이 했던 사랑만이 대단했다 목놓아 부르짖을 핑계이자 수단일 뿐이다.

 

작품은 클라이브와 버넌이 서로를 상대로, 혹은 가머니를 상대로 보여주는 윤리적·위선적 갈등을 짚으며 절정에 다다른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사적 삶에 침투하여 횡행해도 되는 것인가? 눈앞에서 폭력을 목격하고도 그것이 (연인 간/가족 간) 사적 폭력이란 이유로 방관해도 되는 것인가? 작품의 목적지인 암스테르담에서의 안락사는 존엄한 죽음을 위한 유토피아이기만 한가, 이를 악용하는 자들은 없는가?


"열린 문명의 관대함" 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더 깊고 내밀한 정체성의 영역으로 침잠하게 할 뿐이며, 서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과를 보일 뿐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사는 런던이라는 현실 무대는 일견 "디자인, 요리, 잘 숙성된 와인 등을 포함한 모든 예술의 종합" 처럼 보이나, 사실 그 실상은 소비자본주의가 이루어낸 "을씨년스러운 허섭쓰레기들의 지옥" 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차분하고 문명화된, 관대하고 열린 사고를 지닌 성숙한" 암스테르담을 이상적 종착지로 여기지만 비윤리적 안락사를 행하는 모습에서 결국 수면 아래 암스테르담의 현실 또한 런던의 현실과 다를 바 없다.

 

/


우리는 빙산처럼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회적 자아만이

하얗고 냉랭하게 밖으로 솟아 있다.

수면 아래 희귀한 모습,

한 인간의 은밀한 사생활과 혼돈이

결코 드러나지 않으며,

자신이 아는 것조차

회상과 환상에 기반한 것일 뿐이다.


/


한 여자를 둘러싼 세 남자의 공멸은 사실상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아닌, 자본의 화신인 남편 조지의 손아귀에서 짜였음이 드러나고, 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조지)의 지배하에 놓여 있으나, 무용하기 짝이 없는 개인(몰리)과 이념(전 연인들) 간 관계' 라는 알레고리적 예속 관계로 확장된다.


생명 가득하던 몰리 레인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작품은 그의 죽음에 대한 별다른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죽음 이전 몰리의 삶과 사랑도 전 연인들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죽은 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몰리 레인의 죽음은 네 남자를 등장시킬 수단과 객체로써의 비극에 불과한 것인가?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으로써 살아생전 자신을 예속시키려던 네 남자로부터의 해방을 이룬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


여기서 만나 얼싸안았던 친구들은 떠났다.
각자 저마다의 과오를 향해.


<W.H. 오든, 「십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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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열린책들 세계문학 227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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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소명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러야 하는 오직 한 가지 소명밖에는 없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은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의 기로에서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세계임을 인지하고, 비로소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한 작품은 아버지의 세계이자 상징적 질서, 즉 구세계적 질서를 신의 세계로 표현한다. 금지를 금지하라는 후대 68 혁명의 기조가 떠오르는 <데미안> 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억압과 속박에서 탈피하며 의문을 제기하고자 하는 분투로 해석이 가능하며, 주인공 싱클레어의 정신적 여정은 감히 신 앞에 거역을 행한 카인과도,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신과 씨름한 야곱의 삶과도 같다.

 

더불어 작품은 순간의 욕망에 충동될 수도 있으나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만이 타자를 사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의 내면에서 이성을 향한 개인적 사랑으로 확장되고, 전쟁을 겪으며 개인(타자)을 향한 사랑과 관심은 인류 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다.

 

자연이 던진 주사위와 같은 삶은 필연적으로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숱한 우연의 기로 속에서도 선택은 결국 삶을 마주한 나의 몫이라는 걸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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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레시피 - 논리와 감성을 버무린 칼럼 쓰기의 모든 것
최진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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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를 비롯한 문화콘텐츠를 접하며 늘 고민되는 점은 읽고 나서 어떻게 나만의 감상을 남길 것인가이다. 한마디로 늘 독후감을 잘 쓰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겨레 하니포터 활동의 시발점을 최진우 작가의 <칼럼 레시피> 로 정했다. 언제 오려나 싶었는데 오늘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니 책이 와 있지 뭔가. 머리를 감고 선풍기로 말리면서 읽기 시작한 책은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어 단숨에 완독 할 수 있었다.

 

우선 이 책은 이름으로 보다시피 요리의 비유를 들어 맛깔나게 정리한 칼럼 쓰기 비법서이다. 딱딱하게 비법만 나열하기보다는 현시대의 다양한 시사·비평 사례를 들며 대중을 상대로 칼럼 쓰기의 방향을 알려준다. 책을 읽어보면 저자가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입말 중심으로 글을 썼다는 걸 알 수 있고, 책의 첫머리 또한 '글쓰기가 어렵지 않으며 소재 및 글감은 삶의 어느 순간에서든 포착해 낼 수 있음' 을 이야기하며 시작된다.

 

책에 따르면, 칼럼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건 세상 그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 당장 마트에서 장을 본 후 현실로 체감한 물가에 대해서 쓸 수도 있고, 문학 작품을 읽고 쓸 수도 있으며, 정치 현황을 보고 글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글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무엇이 되었든 '완성도' 있는 글을 쓰는 것은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저자는 책을 통해 자신만의 노하우를 곁들인 명료한 가이드를 제공한다.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첫 문장의 중요성이다. 사실 첫 문장이 중요하지 않은 글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정작 글을 쓸 때는 별생각 없이 글을 쓰는 경우도 있기에 내 글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첫 문장에서 시작되는 문장은 다양한 구조를 취할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정의 내리기와 더불어 누구나 이해할 법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의미 부여를 하면서 사회 문제로 확장해 나간다는 방법론이 마음에 들었다.

 

공감이 가는 지점은 <쓰기란 결국 읽기로부터> 비롯되며, 어떤 작품이든 <천천히 음미하듯 읽고 요약하는 것> 의 중요성과 <질문 만들기> 의 중요성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텍스트가 품고 있는 사유를 넘어 또 다른 상상력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이기에, 나 또한 적절한 질문을 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문장을 벼리는 훈련에 대한 지점도 좋았다. 정교한 논리 위에 간명한 문체, 위트와 풍조를 곁들인 은유와 상징은 내가 쓰는 글의 깊이를 확장시킬 수 있으니까.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퇴고력은 공감력에 기반한다는 사실이었다. 글의 완성도와 글쓴이의 실력을 향상해 주는 것과 더불어 글쓴이의 독자를 향한 공감력을 보여줄 수 있다니 유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 속에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완독 한 후 결국 한 지점으로 귀결된 생각은 글을 쓰는 행위가 내가 인식하는 외부환경을 드러냄과 동시에 역으로 내 안의 작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나의 취향과 관심을 끊임없이 기록하는 아카이빙 행위가 다음 단계의 사유로 넓혀갈 삶의 단초가 될 수 있으리라.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도 사회와 유리되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텍스트를 읽고 쓰며 삶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행위를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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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2023.8 202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브누아 브레빌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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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책을 볼 때면 목차를 먼저 구경하곤 한다. 수수께끼처럼 각각의 장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힌트처럼 얻어내는 재미도 있고, '이 장을 하나의 챕터로 선별할 만큼 중요도를 부여하는 게 맞는 건가?' 라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또한 재미있다. 감사하게도 광복절 휴일이 있어 종일 읽을 수 있었는데, 사실 이번 호 서평은 현시대 유행하는 문화적 트렌드가 무엇이고, 국제 정세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진보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분석한 이야기들을 맛보기로나마 접해보고 싶어서 신청했다. 한마디로 최근 들어 하루하루 내가 너무 무식하단 게 절감돼서. 이번 호는 최근 이슈와 관련된 한국 학교 실태에 관한 이야기와 더불어 가깝게는 황금 새장에 갇힌 북한의 예술가들을 사유하고, 멀리는 범지구적인 환경오염 주범들을 추적하는 시각까지 파헤친다. 또한, 진보의 시야와 지평선을 넓혀주는 다양한 글들은 유럽 및 북미와 더불어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는 한국의 삶까지 폭넓게 다루는데, 이로 인해 마치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베일의 존재를 일깨우는 듯하다. 

 

시작은 우리 삶의 주변부부터 시작한다. 대도시의 형성 및 발전은 자본의 밀집을 야기하며 주변부를 슬럼화시킨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만든 빈익빈부익부의 구조 속에서 가난한 자들의 삶을 터전을 이루는 도시 외곽은 <소외된 땅> 으로 전락한다. 버려진 땅은 주류가 외면하며 모른 척 해온 가난과 이민자를 비롯한 온갖 사회 병폐의 집결지나 다름없다. 소수자성의 낙인을 가지고 죽느냐 사느냐라는 생존의 기로에 선 사람들. 이들은 존재 자체로 <경제> 를 무기로 대중들을 현혹하는 극우 세력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극우를 향한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자본을 향한 욕망은 그 어떤 사회적 가치보다도 돈을 우선시하게 만들고, 펜타닐을 위시한 마약 비상사태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평화와 안보를 둘러싼 현실의 실상을 깨우치게 하고, 허울뿐일지라도 나와 내 가족, 내가 사는 마을과 내가 속한 국가를 넘어선 인류 공동체의 안위를 염원하고자 이루었던 국제기구는 현실 속 정치·군사적 힘, 더 근본적으로는 자본의 공격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듯하다. 자본은 전 지구가 직면한 기후변화라는 위기에서도 기세등등하다. 국가는 표면상으로는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역설하면서도, 정작 환경오염의 주범들은 시스템의 기저에서 은밀히 보호하며, 이러한 세상의 균열을 응시해야 할 예술가들의 눈을 가리고 황금새장에 가두어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재생산하는 무한 연속 과정에 파묻히게 만든다. 

 

이런 삶 속에서 전 지구적 최대 피해자인 아프리카 대륙의 교회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상징으로 보인다. 이는 종교가 삶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아편으로써의 역할뿐만 아니라 사회 속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모순을 도려낼 무언가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거 아닐까. "하나님을 믿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하며, 현대 사회가 유혹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인식할 것. 더 나아가 신을 찬양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과정 또한 부를 쌓는 과정의 일환임을 잊지 말 것" 이라는 말은 교회 밖 현존하는 세속의 세계에 내디딘 발자취 속에서 나를 둘러싼 환경과 내 주변 존재들을 돌아보고, 그 속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환경의 모순을 응시하라는 깨달음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르몽드코리아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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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에르 드 부아르 12호 Maniere de voir 2023 - SF, 내일의 메시아 마니에르 드 부아르 Maniere de voir 12
에블린 피에예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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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단지 인류의 상상력을 뽐낼 공상에 불과한가. 인류는 SF를 매개로 태양계 너머 우주로의 도약을 꿈꾸기도 하고 바다 속 깊은 심해 세계를 그려보기도 한다. 인간은 비현실의 세계를 유랑하며 현실도피를 하고자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공상으로의 도피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어떤 역설이다. 그러한 역설과의 조우 속에 우리는 현실 속 모순을 의식하고 의문을 제기하며 혁명적 상상력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이번 <마니에르 드 부아르> 12호는 그런 일련의 상상력의 단초가 될 수 있는 현실 속 위기와 모순, 그리고 그에 대한 사유를 제시한다. 


지구상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으나 오늘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헨리 포드의 변질된 이상에 의해 노동자와 기업가의 구분은 공고해지고, 자본의 위치는 갈수록 견고한 상부 구조에 위치하게 된다. 능력주의를 기반으로 한 지식인 엘리트들은 상위 1% 의 기업가들을 보좌하기 위한 계층으로 공고화된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자동화 시스템 구축을 위해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을 수치화하며, 이렇게 수치화된 인간은 별 볼 일 없는 세계의 껍데기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 기업은 은밀한 계획 하에 우리 삶을 좌지우지할 메타 상부 구조를 제작하고, 현실 속 '별 볼 일 없는 삶' 을 가상의 '별 볼 일 없는 삶' 으로 확장할 것을 유도한다. <1984> 의 텔레스크린은 페이스북의 메타가 되고, 빅 브라더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SNS가 된다. 욕망을 표현하고자 만들었던 아바타는 되려 나를 옥죄게 된다. 이러한 모순적인 삶 속에서 불만을 품은 인류는 현 체제를 전복시키고 혁명을 일으키고자 또 다른 신세계를 꿈꾸며, 그 일환 중 하나가 우주 탐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여행은 단순히 인류의 발자취를 늘려가는 낙관적 희망에 불과한가. 우주 산업은 미래를 위한 첨단 과학 기술의 상징이나 오바마 정부는 그 엄청난 천문학적 자본을 현실을 살고 있는 지구인들에게 쏟는 게 어떠하느냐는 비판에 응했던 듯하다. 나사NASA 에 대한 정부 예산은 감축되고 그 자리는 일론 머스크를 위시한 기업가들이 잠식하기 시작한다. 러시아에서도 푸틴을 중심으로 옛 소련 시절 우주 강국의 이미지를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는데,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러시아인이 곧 우주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강조되고 그렇게 형성된 정체성을 신성화하려는 움직임까지 생긴다. 이에 따라 우주 산업은 냉전 시대의 두 축이었던 두 나라에 의해 한편으로는 철저한 기업자본주의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갖은 노력을 들여 일구어낼 우주는 인류에게 어떤 영역이 될 것인가. 단순히 인류의 새로운 삶의 터전의 연장인 것인가. 근대 이전 구세계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하던 신세계는 이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지구 밖 공간으로 확장되나, 이는 제국주의적 식민지 확장의 은유와 다를 바 없다. 인류에게는 감히 그럴 자격이 있기나 한 것인가.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동행되는 AI(인공지능)는 비非 인류와의 소통 문제에 대한 고뇌와 더불어 인류로 하여금 끝없이 로봇과 자신 간의 구별 짓기를 유도한다. 가상의 아바타와 수치로 상징되는 호모 사피엔스와 달리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존재가 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이제 인류는 과연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무엇이 인간인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할 무언가를 찾는 것이 타당하긴 한 것인가. 분명한 것은 죽음이 예정된 호모 사피엔스의 삶 속에서 성배와 같은 과학이 양면의 거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불안을 극복할 상상력에서 기인한 기술 문명의 발전은 우리를 공동의 꿈의 영역으로도 삶을 테러하는 과학으로도 이끌 수 있다. 그 상상력의 끝에서 우리는 삶의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수많은 저자의 사유들은 역설적으로 아편과도 같은 SF라는 내일의 메시아를 통해 감각을 예리하게 단련하여 현실 속 수많은 타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되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닌지 되묻는 듯하다. 


르몽드코리아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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