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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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2학년 때였나 3학년 때였나 수업 시간에 다룬 적이 있었다. 그 수업의 교수님은 수업 중에 어떤 화두가 나오면 다음 시간에 그것과 관련된 주제로 수업을 이끌던 분이셨는데, 여성혐오 ㅡ 구체적으로 모니카 르윈스키와 관련된 편견과 인습적 낙인에 관해 이야기를 하시다 이 작품을 다루셨다. 발췌독이었지만 그 당시 나는 예측할 수 없는 교수님의 수업 방식에 지치기도 하고 작가의 장광설에 피로를 느껴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최근 다시 읽은 <휴먼 스테인> 은 대문호의 손길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문명의 진상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은 콜먼 실크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으로 상징되는 문명의 근원에서 작동하는 관습과 규율, 그 속에서 소외된 이들, 그리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주류 문화의 폭력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 콜먼 실크는 제도와 규범의 일원이 되고자 자신의 혈통적 근원을 비롯한 모든 것을 버린 비극적 영웅이었다. 그는 본디 흑인으로 태어났으나 군대라는 미 제국의 중심에 입성하기 위해 자신을 옥죄던 피부색을 집어 던지고 스스로 정체성을 재정립한다. 주류의 일원이 되고 관습의 중심에 서기 위해 백인 유태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고등교육으로 재무장해 아테나대학의 교수가 되었던 콜먼. "백합처럼 새하얀 이들의 위선" 으로 가득찬 아테나대학은 그리스 비극의 양상처럼 아테나라는 문명의 진원지를 상징하는 곳으로, 그는 그 아테나의 중심에서 부조리를 타파하고 변혁을 꾀하는 영웅적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콜먼은 스푹스Spooks 사건이라는 '우연한' 계기를 통해 문명의 중심에서 끝없이 추락하게 된다. 

 

추락한 그의 곁엔 포니아가 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절반만큼이나 어리고 아테나 대학의 가장 밑바닥에서 잡부 역할을 하는 여자. 어려서는 부모로부터의 폭력에, 자라서는 남편의 폭력에 길들여진 여자. 문자와 함께 발전한 문명이 끝없이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불건전하고도 불온하다' 낙인 찍으며 그 고통을 외면해온 여자. 하지만 포니아가 가진 제도 밖 속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콜먼을 '본연의 자신' 으로 돌아가는 황홀경에 빠지게 만든다. 콜먼의 주변인들은 포니아가 그의 삶을 파멸시킬 거라 겁박하나, 사실 포니아는 콜먼을 겹겹이 쌓인 인공적 정체성의 껍질을 벗겨낸 '가장 단순한 벌거벗은 존재' 로 되돌릴 구원자나 마찬가지였다. 

 

작품 속 인습의 족쇄는 콜먼과 포니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규범의 폭력은 전쟁으로 확장되고, 포니아의 남편 팔리는 그 폭력의 희생자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그는 국가의 명에 따라 '노란' 인간들을 살상하는데 길들여지나 이는 고엽제 피해라는 카운터펀치로 돌아온다. 더불어, 콜먼과 대립하는 또 다른 인물인 델핀 루는 프랑스 규범이 길러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델핀 루 또한 미국이라는 제국의 중심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분명 콜먼을 상대로 한 루의 고발은 부당하다. 그러나 루와 포니아, 그리고 작중에서 이름으로만 언급되는 모니카 르윈스키의 존재는 한 사회의 숱한 정치적 올바름을 향한 진전 속에서도 여전히 여성혐오에 대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방증한다. 

 

작품은 콜먼과 포니아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들의 죽음은 '비정상적' 인 팔리가 저지른 일탈적 죄에 불과한가? 그만 없었더라면 그들의 죽음은 없던 일이 될 수 있었는가? 콜먼과 포니아의 죽음은 약자가 약자를 상대로 휘두른, 인습의 폭력이 초래한 결과는 아닌가. 신기한 점은 작품 전반에 걸쳐 와스프WASP 로 대변되는 주류 문화는 주체로서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그들이 짜놓은 촘촘한 인습의 거미줄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문명은 콜먼과 포니아를 비롯해 제도의 표준에서 벗어난 이들을 얼룩/오점이라 칭한다. 휴먼 스테인Human Stain, 존재로서 사회의 얼룩이 된 이들. 그러나 주류가 경멸해 마지 않는 얼룩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얼룩은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불온한 그 무언가인가, 혹 주류 문명이 폭력으로써 지진 고통의 낙인은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콜먼은 스푹스 사건으로 인해 자신을 옥죄던 그 모든 인습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욕망에 자유로워졌다. 물론 운명은 가혹하게도, 감히 네 발의 족쇄로 채운 삶의 굴레를 끊어내려 하느냐 으름장을 놓으며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지만. 그러나 이 '변종' 과 같은 영웅의 슬픈 일생은 죽음과 함께 잊혀져야 하는가? 작가 필립 로스는 세상에 그의 삶을 내보일 이야기꾼을 준비해둔다. 처음엔 "내 일이 아니라" 며 외면했던 작가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내레이터는, 추악한 진실에 근접할수록 세상에 콜먼 실크라는 한 인간의 진실한 삶을 내보임과 동시에 그에게 가해진 주류 문화의 인습적 폭력을 고발하리라는 다짐을 한다.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정말로 알고 있는가. 타인이 가진 그 모든 공백과 비밀을, "어떤 일이 어떻게 해서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지, 인간사를 규정하는 사건들, 불확실성들, 사고들, 불화, 충격적인 부조리의 연속인 난맥상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정말로 모두가 알고 있는가? 감히 전지전능한 신의 행세를 하며 타인의 삶을 짓밟고자 내세우는 착각과 오만이 아닌가?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모든 걸 안다" 고 자만하는 인습의 속박에서 해방된, 폭풍 속으로 사라진 연인. 작품은 그들의 삶을 통해 타인의 삶과 아픔에 관해 상상하면서도 그 상상력이 그를 겨눈 무기가 되어선 안 된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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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티크M Critique M 2023 Vol.6 - 마녀들이 돌아왔다
김정희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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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코리아에서 발간된 <크리티크 M> 6호는 종교와 합체한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가 인류사 속에서 어떻게 모든 유형의 여성들을 희생제물화시켜 왔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선, 흔히 '마녀' 를 사냥한다는 말에 따라 마녀사냥은 중세에 불어닥친 광풍이었을 것 같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중세가 아닌 인본주의 시대로 불리는 14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후 마녀사냥이 심화되기 시작됐다는 점이 지적된다. 더불어,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 전반에 퍼진 죽음에 대한 공포와 교회 내부 부패 문제를 외부로 돌리고자 하는 움직임은 악마의 형상에 여성의 이미지를 덧씌우고자 했고, 이에 따라 인간 내부의 죄의식을 형성해 교회와 사회 규범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


자본주의 시대 또한 마녀사냥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온 세상을 수치화·물질화하여 군림수단으로 만들고자 하는 근대의 흐름 속에서 지배 계급은 신대륙 개척을 비롯한 '새로운 질서' 를 수립하기 위해 (1) 사회 취약계층의 생존수단인 토지를 약탈하여 사유화하고 (2)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인식하여 신대륙 개척에 앞장서며 (3) 주류의 규범에 벗어난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마녀사냥하기 시작한다.

 

'마녀 감별법' 은 언제나 주류의 기준에 따른 것이었고, 마녀로 지목당하는 이들은 대개 교회와 정부를 비롯한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이들이었다. 독신, 부랑자를 비롯한 근대의학에 반反 하는 민간요법을 아는 여성들. 법률·의학·정치를 이루는 문자권력을 위협하는 읽고 쓰는 여성들은 온갖 종류의 지배에 목소리 높이는 '길들여질 수 없는' 존재의 상징이 되어 지배 계급의 박해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녀사냥의 문제는 현대 사회와 무관한 전근대적 폭력의 양상에 불과한가? 아니, 오히려 타자의 기준을 더욱더 모호하고 다층적으로 세워, 나와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불신은 무기력과 공포를 낳아 구조적 폭력에 동조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현실 속에서 사회적 낙인과 함께 <마녀> 가 된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방' 과 '목소리' 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들은 타자화라는 그물 속에서 희생된 '마녀 조상들' 을 기리고, 스스로를 <마녀> 라 명명하며 마녀라는 정체성을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뿌리내릴 수단으로 삼는다. 세상을 둘러싼 온갖 불평등과의 지배관계를 겨냥하며 세상을 향해 "우리는 당신들이 미처 태워 죽이지 못한 마녀들의 손녀다. (WE ARE THE GRAND DAUGHTERS OF ALL THE WITCHES YOU WERE NEVER ABLE TO BURN.)" 라는 말을 외친다.

 

개인적으로 표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신청했던 서평단이었다. '마녀들이 돌아왔다' 라니. 표제 자체로 한 사회에서 소외되고 핍박받던 이들이 부활할 수 있도록, 기꺼이 마녀가 되거나 마녀의 친구가 되겠노라 선언하는 용기 있는 자들의 목소리 같지 않나. '불온한' 존재로 낙인찍힌 수많은 <뱀> 들의 이야기를 여러 예술 작품 및 사회문화 현상과 곁들여 해석해볼 기회와 다름없는 지성지였다.

 

르몽드코리아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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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일러스트)
조지 오웰 지음,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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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보는 선형적 진보만을 전제하는가? 전제정치를 기반으로 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조지 오웰의 <1984> 는 세계의 진보는 더 많은 희망을 향한 진보가 아닌, 더 많은 고통을 향한 진보가 아닌가를 역설한다.


역사상 전제 군주 시대의 〈하지 마〉 라는 부정명령은 전체주의 시대의 〈해야 한다〉 라는 당위명령으로 변해왔고, 작품은 당위의 명령이 빅브라더의 세계에선 〈이렇게 되어 있다〉 라는 존재명령으로 변함을 이야기한다.


"그 어떤 외부세계도 인간의 의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재할 수 없" 으며 "오직 훈련받은 자만이 실재를 볼 수 있다" 는 논리는 일견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지는 서구 사상사의 경험과 인식론에 근거한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 당의 눈을 통하지 않고는 실재를 볼 수 없다는 주장은 일당독재의 정당화로 귀결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는 지배논리를 정립할 근거가 될 뿐이다.


작품 속 당은 깨어 있는 민중의 집단적 움직임을 막기 위해 가족 단위의 결속부터 해체시키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이 개인임을 멈출 때, 즉 집단에 예속될 때만 권력을 가지게 되며 굴종이 곧 자유라는 주장을 내건다.


작품의 말미에서 윈스턴은 결국 그들의 사상에 감화되어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감시하는 소비사회의 성과주체가 결국 성과사회의 논리를 내면화하여 자기 착취를 일삼게 된다는 한병철 교수님의 저서들이 떠올랐다. 빅 브라더의 <이렇게 되어 있다> 라는 존재명령이 이제 성과주체의 <이렇게 할 수 있다> 라는 가능명령으로 변한 것 아닐까.


<제5도살장> 도 그렇고 일러스트가 있는 작품을 볼 때마다 감탄하는 지점은 삽화를 그리는 작가의 해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표지는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말하는 대사 중 한 구절을 이미지화한 것이나, 비단 오브라이언과 윈스턴 개인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불특정 다수의 수많은 개인 중 하나로 대입해서 해석해도 말이 되게끔 그려져 있다. 더구나 전에 작품을 읽을 때 나는 기계의 눈을 상상했는데, 일러스트는 빅 브라더의 감시의 눈을 인간의 눈으로 그려놓았다. 이는 아마도 빅 브라더를 전면화하고 뒤로 숨은 이면의 독재 권력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닐까.


사실 개인적으로 재밌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유는 힘, 무지는 굴종' 이라는 말에서 힘과 굴종이라는 단어의 교묘한 자리 바꿈으로 인해 '전쟁이 곧 평화' 라는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릴 때는 민음사꺼로, 최근에는 문학동네와 열린책들 버전을 읽었는데 여러 번 읽고 나만의 여과물을 남길 가치는 충분한 작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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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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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의 죽음, 그리고 장례식에 그녀의 전 연인들이 모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표면상으로도 복잡다단한 이야기는 각자의 시각에서 죽은 전 연인 '몰리 레인' 에 관한 (파편적) 회고를 내놓으며 전개된다.


몰리 레인의 전 연인들은 각각 예술가 클라이브, 진보 언론인 버넌, 보수 정치인 가마니이며, 출판 재벌인 남편 조지는 몰리의 장례식에 세 사람이 모인 것을 마땅찮아한다.


우선 클라이브는 어려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고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예술가이다. 몰리의 20대 청춘을 쥐었던 그는 현실과 유리된 모더니즘 예술의 화신으로 늘 몽상 속에 사는 듯하다. 그는 현실과 자신을 구별 짓고 사회의 고통을 방관하는 예술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그의 방관적 태도는 악상을 떠올린다는 핑계로 범죄 현장을 모른 척하는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더 저지The Judge 의 편집국장 버넌은 "전후의 사회복지국가에서 태어나 나라가 주는 젖과 꿀을 먹고 자라고, 부모들이 이룬 소박한 부에 얹혀살다가 곧장 완전고용의 시대에 돌입한 세대" 의 일원이다. 그는 스스로 진보주의자를 참칭 하며 보수 정치인 가머니를 상대로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모든 상황을 판단하는 위치에 서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무기로 가머니의 사생활을 정치적으로 공격하여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고자 하지만, 실상 황색 언론의 중심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이윤 추구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그러한 결정' 이 옳은가에 관해 클라이브와 빚게 되는 갈등이 이야기를 파국으로 이끌 단초가 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기반으로 강력한 이민 규제 법안 등을 내세우는 보수 정치인 가머니는 몰리와 내연 관계에 있던 인물로, 대중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이념과는 반대되는 은밀한 사생활을 지니고 있다. 그는 왜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자 했을까. 어쩌면 자신의 삶과 정체성보다는 탈진실적인 정치적 이득, 더 근본적으로는 그것에서 얻을 경제적 이득을 더 우선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출판 재벌인 몰리의 남편 조지는 사실상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장악한 자본의 상징과도 다름없다. 황색 언론과 "머저리들" 의 주머니를 털어 부를 이룩한 조지는 몰리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마저 소유하고자 했으며, 그 어떤 이념적 가치보다도 은밀하고 압도적으로 몰리 레인의 죽음을 독점한 신자유주의의 화신이다.


작품 속 모든 남자들은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몰리 레인을 사랑했다고 주장하나, 실상 그들 모두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선적인 나르시시스트들이다. 그들에게 몰리의 죽음은 상대의 입을 막고 자신이 했던 사랑만이 대단했다 목놓아 부르짖을 핑계이자 수단일 뿐이다.

 

작품은 클라이브와 버넌이 서로를 상대로, 혹은 가머니를 상대로 보여주는 윤리적·위선적 갈등을 짚으며 절정에 다다른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사적 삶에 침투하여 횡행해도 되는 것인가? 눈앞에서 폭력을 목격하고도 그것이 (연인 간/가족 간) 사적 폭력이란 이유로 방관해도 되는 것인가? 작품의 목적지인 암스테르담에서의 안락사는 존엄한 죽음을 위한 유토피아이기만 한가, 이를 악용하는 자들은 없는가?


"열린 문명의 관대함" 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더 깊고 내밀한 정체성의 영역으로 침잠하게 할 뿐이며, 서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과를 보일 뿐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사는 런던이라는 현실 무대는 일견 "디자인, 요리, 잘 숙성된 와인 등을 포함한 모든 예술의 종합" 처럼 보이나, 사실 그 실상은 소비자본주의가 이루어낸 "을씨년스러운 허섭쓰레기들의 지옥" 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차분하고 문명화된, 관대하고 열린 사고를 지닌 성숙한" 암스테르담을 이상적 종착지로 여기지만 비윤리적 안락사를 행하는 모습에서 결국 수면 아래 암스테르담의 현실 또한 런던의 현실과 다를 바 없다.

 

/


우리는 빙산처럼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회적 자아만이

하얗고 냉랭하게 밖으로 솟아 있다.

수면 아래 희귀한 모습,

한 인간의 은밀한 사생활과 혼돈이

결코 드러나지 않으며,

자신이 아는 것조차

회상과 환상에 기반한 것일 뿐이다.


/


한 여자를 둘러싼 세 남자의 공멸은 사실상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아닌, 자본의 화신인 남편 조지의 손아귀에서 짜였음이 드러나고, 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조지)의 지배하에 놓여 있으나, 무용하기 짝이 없는 개인(몰리)과 이념(전 연인들) 간 관계' 라는 알레고리적 예속 관계로 확장된다.


생명 가득하던 몰리 레인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작품은 그의 죽음에 대한 별다른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죽음 이전 몰리의 삶과 사랑도 전 연인들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죽은 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몰리 레인의 죽음은 네 남자를 등장시킬 수단과 객체로써의 비극에 불과한 것인가?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으로써 살아생전 자신을 예속시키려던 네 남자로부터의 해방을 이룬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


여기서 만나 얼싸안았던 친구들은 떠났다.
각자 저마다의 과오를 향해.


<W.H. 오든, 「십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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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열린책들 세계문학 227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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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소명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러야 하는 오직 한 가지 소명밖에는 없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은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의 기로에서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세계임을 인지하고, 비로소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한 작품은 아버지의 세계이자 상징적 질서, 즉 구세계적 질서를 신의 세계로 표현한다. 금지를 금지하라는 후대 68 혁명의 기조가 떠오르는 <데미안> 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억압과 속박에서 탈피하며 의문을 제기하고자 하는 분투로 해석이 가능하며, 주인공 싱클레어의 정신적 여정은 감히 신 앞에 거역을 행한 카인과도,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신과 씨름한 야곱의 삶과도 같다.

 

더불어 작품은 순간의 욕망에 충동될 수도 있으나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만이 타자를 사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자신의 내면에서 이성을 향한 개인적 사랑으로 확장되고, 전쟁을 겪으며 개인(타자)을 향한 사랑과 관심은 인류 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다.

 

자연이 던진 주사위와 같은 삶은 필연적으로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숱한 우연의 기로 속에서도 선택은 결국 삶을 마주한 나의 몫이라는 걸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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