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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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일컫어지는 신시아 오직의 단편 <숄> 과 <로사>.

 

강제수용소 생활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 죽음의 그림자와 같았던 숄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혼 없는 시체와도 다름없는 로사 대신 어린 스텔라와 마그다를 추위와 죽음으로부터 지켜주는 양분이자 보호막과도 같았다. 나치의 서슬 퍼런 감시 속 침묵이 곧 생존이나 다름없었던 공간에서 숄은 어린아이들, 특히 어린 생명 마그다의 존재를 숨겨주고 보호해 준다. 그러나 어린 마그다만큼이나 스텔라 또한 보호가 필요했고, 그렇게 한정적인 숄의 존재는 마그다의 발각과 뒤이은 죽음을 초래한다. 죽음의 광경은 마치 여린 나비가 전기불에 타 죽는 듯한 참혹한 광경이었고, 로사는 이로 인해 평생을 지옥 불구덩이 속에 살아가게 된다.

 

그녀 로사, 살아남았지만 전기 쇠창살에 타 죽은 마그다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죄책감에 잠식당한다. 입안 가득 숄을 욱여넣은 채 고통의 절규를 삼켜야만 했던 그때의 무력함. 침묵은 로사의 육체를 지켜주었으나 평생을 삼킨 절규 속에 허우적거리게 만들고, 스스로를 생지옥 마이애미에 감금하며 살아가게끔 만든다. 로사는 살아남았지만 앞으로의 삶으로 나아가길 거부했으며, 그에 반해 스텔라는 그때의 기억을 돌아보길 거부하며 강박적으로 눈앞에 닥친 삶을 살아내기에 급급하다.

 

로사가 구대륙에서 겪은 참혹한 기억은 신대륙에서 만난 무심한 이들의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들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끼고 구대륙의 유산을 찬양하나, 정작 현실 속 로사의 기억과 울부짖음은 외면하며 그녀를 "미친 여자" 로만 낙인찍을 뿐이다. 로사의 폴란드어는 세월이 흘러도 갈수록 세련되어지나, 로사의 영어는 수십 년이 흘러도 여전히 처음 접했던 그때처럼 어설픈 누더기 영어 상태에 불과하다. '올바른' 영어를 구사하길 거부하며 스스로를 더욱더 깊은 고립 속에 가두는 그녀의 삶은 사실 나치가 "삶을 앗아간" 순간부터 이어지는 길고 긴 트라우마의 후유증일 것이다.

 

문학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시공간이 언어로서 오롯이 내 앞에 재현되는 경험을 준다. 그 재현은 때로는 일렁이는 물결을 그린 회화처럼 때로는 찢어질 듯 날카로운 절규처럼 다가온다. 반면, 이번 신시아 오직의 <숄> 과 <로사> 는 침묵과 삼켜버린 절규가 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들을 전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나치즘의 폭력성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장면은 없으나 그 시절 존재했던 이들의 삶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모습을 그 어떤 설명과 묘사보다도 생생하게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문학과지성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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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9
케빈 패스모어 지음, 이지원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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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양차 대전과 관련하여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필두로 세계를 지옥 불바다의 구렁 속에 처박은 근대 세계의 중요한 현상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저자 케빈 패스모어는 파시즘이 결코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A 이면서 A 가 아니고 하나의 단일한 속성이 아닌 여러 파생되는 속성이 혼재되어 있기에 누가 무엇에 따라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범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대중 속에서 피어난 파시즘은 대중의 우위에서 대중을 좌지우지하려 들고 있다는 점이다.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죽은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는 파시즘적 잔재가 똬리를 틀고 언제든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고 있으며 현대에는 극우의 모습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파시즘은 후기자본주의 및 군사 문화, 정체성 정치와 결합하여 그 본성을 쉽사리 구분하기 어렵게끔 교묘해져 가고 있다. 더불어 책은 사회문화 속 인종·민족·젠더·계급의 정화를 빌미로 자신과 다른 이들을 타자화하고 차별하는 도구이자 목적으로 파시즘이 쓰인다는 점이 강조된다.

 

첫단추 시리즈가 너무 좋아 교유서가의 도서를 꾸준히 받아보고 있는데 <시민권> 과 고민과 <파시즘> 중 무엇을 먼저 읽을까 고민을 하다가 문화콘텐츠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읽어내기에는 파시즘의 개념을 먼저 다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선택했다. 주제를 잘 골라서 흡족하고 가벼운 책자 속에 이 사회를 읽어내는 개념의 첫 단추를 어렵지 않게 읽어내고 싶은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교유서가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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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탈한 하루 - 다정하게 스며들고 번지는 것에 대하여
강건모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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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모 작가의 <무탈한 하루> 는 저자가 제주도에서 일상을 보내며, 특별하지 않아도 행복한 삶을 자각하기 위해 때론 과거를 반추하고 때론 미래를 염려하며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일상을 그린 산문집이다.

 

오늘도 내일도 무탈하고 평온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는 재밌게도 우리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고요하고 무탈한 하루는 타인의 다정함에서 비롯된 결과로부터 이어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더불어 나 또한 다정한 인간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삶에 대한 내 인생의 무게추를 잘 조율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읽는 내내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워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타인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교유서가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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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카페 싱긋나이트노블
구광렬 지음 / 싱긋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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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렬 작가의 <자살카페> 는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함께 모인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자살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을 자살로 몰고 가게 만드는 제반 환경적 요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취업, 학업, 왕따, 상실, 보이스피싱, 성소수자 문제 등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성원권 투쟁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찍히는 패배자라는 낙인. 그 낙인이 초래하는 또 다른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

 

이야기는 살아생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서나마 함께 할 이들과 자신들만의 공동체인 '카페' 를 꾸리고 스스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이들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이들의 죽음을 과연 이들 개인의 문제만으로 치부할 수 있는지, 그들이 끊임없이 좌절감을 느끼게 만든 요인은 무엇인지 묻는다. 왜 그들의 삶은 "어차피와 차라리의 중간쯤" 어딘가에서 계속되는 무언가에 불과해질 뿐인지.

 

살고자 아등바등 몸부림치지만, 찾는 이 없는 유실물과 같은 삶. 어쩌면 이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까지 가지 않도록 만드는 건 카메라 렌즈와 같은 서늘한 눈이 아닌 오늘 하루 어떠했는지 들여다보고 물어봐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니었을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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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곽선생뎐 싱긋나이트노블
곽경훈 지음 / 싱긋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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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왕의 암행총관, 곽곽선생. 왕의 사냥개를 자처하며 전국 각지를 돌며 왕의 명을 받들어 왕의 이름으로 불온한 자들의 처벌을 대행한다.

 

조선과 비슷해 보이나 비슷하지 않은, 어느 가상의 공간을 다룬 이 작품은 현실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마주한/했을 법한 갈등과 아이러니를 그리며 전개되어 나간다. 세습되는 신분제와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 그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열망을 하나로 묶어주는 종교. 평범한 이들이 높이는 각자의 목소리에서 타오르는 열망과 바람은 결코 순수하고 아름답지만은 않고, 때론 비정하게 때론 계략적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돌진한다.

 

작품은 결코 낙관적인 세계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왕의 사냥개는 무엇을 위해 칼을 휘두르는가. 왕의 사냥개를 자처하면서도 지배층과 그들의 우두머리에 서 있는 왕이 만들어낸 세계에 한껏 조소를 내비치는 곽곽선생. 어쩌면 그의 칼춤은 어지러운 세상을 정화시키고자 하는 그의 내밀한 욕망이 폭력성으로 발현된 것은 아닐까. 어떤 세상을 위한 칼춤인지, 그 칼춤이 옳은지 그른지는 읽는 자의 몫이 되리란 생각이 든다.

 

교유서가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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