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지음, 서제인 옮김, 정희진 해설 / 엘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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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만> 사랑한다. 그들에게 최고의 유대인은 죽은 유대인이며, 이 죽은 유대인들조차 '더 큰' 담론의 일부로써만 논할 가치가 있다. 예컨대 서양 문명의 한계 등과 같은 누군가를 교육하기 위한 고급스러운 수단적 은유로써만 기능한다. 그것은 문명 속에서 하나의 도덕극이자 표어의 역할을 하나, 정작 지금 현재 실존하는 구체적 인간들의 삶은 지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현존하는 눈앞의 삶을 지운 채 죽은 이들을 앞세운다. 안네 프랑크의 사가를 전시하면서 사가 관리인인 동시대의 유대인의 정체성은 억압한다. 위대한 인류 문명에서 또 다른 홀로코스트another holocaust 를 재발시키지 않기 위해 그때의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를 배워야 하나,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홀로코스트도 그때의 홀로코스트의 정도가 아닌 것은 '홀로코스트' 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는 이유로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서구 사회는 유대인을 배척해 왔다. 그 역사는 수많은 제국과 문명의 흥망성쇠와 함께 할 만큼 오래되었다. 고대 이래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전통을 거부하며 지배 문화에 타협하고 순응하면서 동화되는 것을 선택해 왔다. 괴롭힘과 가스라이팅이 예외가 아닌 원칙인 사회 속에서, 멋지지 않을 자유,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인 척하지 않을 자유를 위해. 그 어떤 것보다도 <살아도 된다> 라는 허락을 받기 위해.

 

저자는 홀로코스트 이후 자성을 촉구해 왔다는 서구 사회에서도 여전히 지배 문화를 중심으로 은밀한 차별이 진행 중이라 주장한다. 세기를 거쳐, 문명은 한 집단을 '존재' 가 아닌 하나의 '구경거리' 이자 '유희거리' 로 취급해 왔고, 매체의 발달은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혐오의 급속한 확산도 야기했다. 근대를 열었던 인쇄술의 발달 속에서도, 전 세계 커뮤니티 공동체를 형성한 인터넷의 발달 속에서도, 주류 집단은 유대인 혐오라는 시대의 유희거리를 놓칠 수 없었다.

 

위대한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을 읽고 기분 나빠하면 그건 해당 작품이 가지고 있는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시대를 앞서간 통찰을 짚어내지 못한 우둔함 때문이고, '1파운드의 살' 이라는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혐오하는) 우리가 나쁜 게 아니라 '예민한' 너희가 나쁜 것이다. 악의 없는 "히틀러는 너희 눈이 전부 검은색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와 같은 말은 여러 함의를 포함한다. '너희' 라고 지칭함으로써 유대인들을 타자화한다. 히틀러를 경멸하면서도 히틀러의 말을 레퍼런스로 삼으며, '같은데' 라는 단언의 어조를 피함으로써 도덕적 지탄을 받을 책임을 회피한다.

 

글쎄. 개인적으로는 읽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던 것 같다. 저자가 기술한 이야기들에 깊이 공감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슬픔과 회한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현시대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직선적 시간관을 근간으로 하는 서구 문명과 달리, 유대교의 시간관은 나선형이기에 '미래가 곧 현재이고, 현재는 본질적으로 과거'" 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막(중동)에서의 유대인을 이야기하면서, 2차 대전 이후 이스라엘의 존재에 관해 언급하면서 어떻게 팔레스타인에 관해선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서구 지배 문화를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의 '유대 자본' 이 어떻게 전 세계 (특히 중동)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해선 입을 닫는다. 그저 끊임없이 자신이 '하버드 문학 박사' 라는 권위를 내세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시사점이 꽤 있다. 앞서 언급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에 반유대주의에 관한 시대를 초월한 자성 능력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주류 문학 비평가들에 대한 반박과 더불어 '악의 평범성' 으로 알려진 아돌프 아이히만에 관한 한나 아렌트의 사유에 대한 반박이 그렇다. 저자 데어라 혼은 나치 독일 친위대의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관해 한나 아렌트와 견해를 달리한다. 저자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놀랄 만큼 많은 시간을 사유하며, 개념을 흡수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며 보낸 사람이다. 다만 그 생각이 허튼 생각이었고, 그 허튼 생각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했을 뿐" 이다. 즉 아이히만은 사유의 부재 탓에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게 아닌데 아렌트가 왜 그런 주장을 했느냐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다면, 그 주장이 왜 한나 아렌트에게 중요했던 것인가라는 점인데, 배리언 프라이의 선행을 외면한 아렌트를 고발하며 진행된 이 장은 다소 모호한 상태로 마무리된다.

 

구경꾼들에게 보여지는 호랑이는 도살하기 위해 전시된다. 저자는 유대인에 은유하기 위해 호랑이를 언급하나, 사실 호랑이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삶의 터전을 뺏긴 자들의 은유로써도 충분하다. 개인의 죽음이 지배 문화 내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것에 대한 경고, 그러나 거울을 반대로 돌리면 또 다른 피 흘리는 자들이 있다는 걸 외면하고 있는 듯한 아이러니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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