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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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다양성' 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와 다른 존재가 가진 부정성을 부정한, 체제가 '허락' 하는 다양성은 아닌가? 신자유주의의 도래 이후 자아는 줄곧 자신을 생산, 실행, 상품화하도록 하는 판매 논리에 따른 진정성의 논리를 펼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 (잡다함) 만이 허용된다.

 

세계화는 모든 것을 같게 만든다. 그 동일화의 폭력 속에서 맥락은 소멸되고 오직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를 받들기 위한 정보 · 소통 · 자본의 순환만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거슬리는 타자들은 잡초 뽑듯 제거되고 배제의 반옵티콘banopticon 이 형성된다.

 

타자에 대한 항체는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그 부정성이 존재하도록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자기 파괴의 결말을 낳는다. 갈등을 처리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 사회에서 자신의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해 에고로만 가득 찬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이 지나쳐진 나머지 상상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 가상의 적을 만들어 상상적 면역성을 획득한다. '적' 이란 사실 자신에 대한 문제가 형태화 된 것이다.

 

시선 없는 매체이기에, 역설적으로 어디에나 존재하는 시선을 내포한 디지털 매체는 자아 속에 자아가 가득 차도록 만들고 타자가 들어설 공간을 없앤다.

 

에고ego 라는 집의 밖으로 나오기 위해, 자아는 문턱을 넘어야만 한다. 자아는 전에 겪어본 적 없던 새로운 차원과 삶을 문턱을 넘으며 경험한다. 문턱은 부정성을 내재하며, 자아는 고통을 겪음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다.

 

낯섦, 부정성, 수수께끼를 전제한 예술은 이런 세상 속에서 나와 다른 부정성을 가진, 다른 존재로서의 타자를 마주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한다. 우리는 타자의 고유성이 머물러 있는 타자의 시간을 인정하며 타자와 만나 대화하고, 타자를 향하고, 타자를 대신해 주기 위해 지각을 열어 타자를 인식해야 한다. 낯선 것을 일상으로 편입시키는 자기 초월을 보여야 한다.

 

환대란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 의해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 (p. 32)" 로 타자를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으로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라 볼 수 있다.

 

 

드디어 다 읽었다. <심리정치> 와 병렬 독서용으로써 함께 시작했음에도 이제야 완독 한 이유는 '음성' 파트 때문이다. 아직도 그 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아마도 이후에 다시 읽어야 할 듯하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만 결국 귀결되는 질문은, 제목인 "'타자의 추방' 을 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다. 이는 곧 자신밖에 모르는 공허한 메아리, 타자의 부정성이 두려운 나머지 '소멸' 시켜버리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아마 최근에 리뷰를 쓴 영향 때문이지 싶은데, 문턱의 장에서는 영화 <듄> 이 타자의 생각 및 경청하기의 장에서는 <나의 해방일지> 가 떠올랐다. 드라마는 일평생 사회의 반옵티콘banopticon 속에 머물러 온 '타자' 인 구자경에게 염미정이 '환대하라' 는 말을 건네는 장면을 보여준다. 염미정은 세간의 사람들은 부정하고 말았을 그가 가진 거스를 수 없는 부정성을 포용하고, 자신의 논리에 맞추어 그를 변화시키기보다 그의 말을 경청하고 환대하자 이야기한다. 평생을 에고라는 단단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해 이별 후 염미정의 이름을 부르짖을 때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구자경은 그제야 자신을 둘러싼 단단한 막을 깨고 환대를 실천하며 염미정의 손을 잡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세상을 헤매며 방황했던 돌아온 탕자가, 추방되었던 타자가 한 사람의 '환대' 로 다시 세상 속으로 스며들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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