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면역이란 무엇인가? 안과 밖의 경계를 기준으로 타자성(부정성)을 띤 낯선 것을 막아내기 위해 공격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라는 서두에 따르면, 21세기 이전의 시대는 '면역학적 시대' 였다. 면역은 부정성의 변증법을 기본 특징으로 하는데, 면역학적 시대에서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없애려(부정하려) 하는 부정 분자이다. 자아는 타자가 가진 부정성 때문에 파멸하는 일이 없도록 먼저 타자를 없애야(부정해야) 한다. 즉 자아는 부정(타자)의 부정(없앰)을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면역학적 특징이 21세기 또한 설명할 수 있는가? 필자는 세계화 과정 속 '탈경계화' 에 따라 이질성과 타자성이 사라지면서 '차이' 로 변모되고, 이렇게 형성된 차이는 자아와 면역학적으로 동일한 것이기에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가능하나 짐스러운) 대상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과잉 생산, 과잉 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 등의 각종 과잉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긍정성(같은 것)의 과잉 현상' 이 생기게 된다. 과도해진 긍정성은 개인에게 폭력으로 다가오게 된다. 문제는 개인은 '같은 것' 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개인이 긍정성 과잉 현상에 대해 느끼는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닌 신경증적 거부 반응으로 나타나게 된다. (대표적 예시가 소진, 피로, 질식 등의 현상) 긍정성의 폭력은 세계라는 시스템 자체에 내재되어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면역 저항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심리적 경색(막힘)이 일어난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전 사회와 어떻게 다른가? 필자는 푸코의 규율 사회와 대비하여 오늘날 21세기 사회를 '성과사회' 로 규정하고, 성과사회 속 개인을 '성과주체' 로 정의한다. 부정성을 근간으로 한 규율사회 속 복종주체는 시스템의 "해야 한다should" 혹은 "하면 안 된다shouldn't" 라는 명령을 따르며, 금지 · 명령 · 법률의 형태로 위반한 개인을 광인이나 범죄자로 분류한다. 한편, 긍정성을 근간으로 한 성과사회 속 성과주체는 시스템의 "할 수 있다can" 혹은 "할 수 없다can't" 의 명령을 따르고, 계획 · 주도성 · 동기부여 등의 형태를 띠면서 이를 따르지 못하는 개인을 우울증 환자나 낙오자로 분류한다.

 

규율사회와 성과사회의 접점은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적) 열망" 이다. 규율사회의 규율에 따라 돌아가던 생산성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금지의 부정성에 따라 생산성 향상이 가로막힌다. 이때부터 능력can의 긍정성이 당위should의 부정성을 능가하게 된다. 할 수 있으니 하자는 시스템의 폭력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타자의 강요가 아닌 자기착취가 존재한다. 자기착취는 자유롭다는 착각을 동반하기에 타자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인간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하나, 자아는 이에 대한 면역학적 항체가 없다. 원자화된 사회 속 타자와의 유대도 결핍된 개인은 심리적 경색을 느끼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즉 우울증이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발발하는 것이다.

 

흔히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 노동정보사회를 사는 인간이 가진 능력이라 착각하나, 필자에 따르면 실상 원시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가져야 했던 멀티태스킹 능력은 인류의 진보가 아닌 퇴화로 볼 수 있다. 너무나 많은 자극과 정보는 인간의 지각을 파편화시켜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심심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개인은 끝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필자는 이러한 산만함을 과잉주의hyperattention 라고 정의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근대사회가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킨 노동사회라고 주장하며 '활동적 삶' 을 옹호했다. 그에 따르면 근대의 인간은 수동적이며 사유하기보다는 계산하는 동물에 불과했고,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행동'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아렌트를 비판하며, 후기근대 '노동하는 동물' 은 노동을 통해 익명의 무수한 삶 속에 용해되어 버릴 만큼 몰개성적이진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집단적 노동사회는 개별화되어 '성과사회, 활동사회' 로 변모하고, 노동하는 동물은 '자아' 가 되어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증적인 특성을 보이게 된다.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는 직역하면 '(벌거벗은) 신성한 인간' 이나 그 의미는 인간 사회에서도 신에게도 버림받아 그 누가 죽여도 처벌받지 않지만, 희생물로는 가치가 없는 존재이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전쟁 포로들, 불법체류자들, 추방 난민들, 식물인간 등) 그러나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죽일 수 '없는' 존재들, 아니 죽지 '않는' 존재들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따라 계속해서 타자의 지배 없는 자기착취를 일삼는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강제성에 자신을 묶는다.

 

필자는 아렌트가 활동성을 강조하면서도 활동성이 가진 변증법을 알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활동성 첨예화가 지속되다 보면 활동과잉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 라는 환상 속에서 개인은 스스로를 옥죌 새로운 구속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환상 속에서 벗어나려면 "중단" 이라는 부정성이 필요하고, 인간은 현재 상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분노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분노는 막혀 있는 현대 사회 속 짜증과 신경질적인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될 수 있게 해 주는데, 이를 위해선 '사색적 삶' 을 살 필요가 있다. 사색적 삶을 위해서는 특별한 교육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니체에 따르면 인간이 고상한 문화를 즐기기 위해 다음 세 가지를 교육받아야 한다고 한다: (1) 보는 법 (2) 생각하는 법 (3) 말하고 쓰는 법.

 

공포란 특정 대상에 대한 것이나, 불안은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이다. 폭력의 위상이 외부(공포)에서 내부(불안)로 이동하여, 무력하고 능력이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개인은 긍정적 힘(할 수 있는 힘)과 부정적 힘(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상실한 채 피로라는 시스템적 폭력 속에 잠식된다.

 

 

 

INSTAGRAM @hppvlt

https://www.instagram.com/hppvl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