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해. 이 시집의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얼마나 이 문장을 되뇌었는지 모른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간추린 말인 것 같아 멋대로 아름다운 삶에 발을 디디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 문장은 유고시집이 출판되리라 알 리가 없는 고인의 여러 시들 중 어떤 시의 마지막 행이지만 그 순간 미소를 지었을 고인을 생각하면 나마저 그 기운에 젖어들게 된다.

지상에 남겨진 39편의 시는 ‘홀가분하다’와는 달리 독자에게 눈물을 넘겨주는 여운이 흐르고 있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인생을 이야기하고 멈춰있는 것들에 대해 따스함을 서술하고 게으른 자들을 꾸짖기도 하는 시들이 펼쳐진다. 시는 책 속에 고요히 있지만 독자는 그것을 끄집어내 자신의 곁에 둔다. 나 역시 그랬다. 서문에서부터 작가의 삶을 더욱 이해하게 되는 우리로서는 잔잔히 그녀에게 빠져들게 되었고 삶 깊숙이 이해하게 되었다.

평생 글로서 우리를 돌아보게 한 작가가 마지막까지 시를 통해 생명을 남겨주셨다. 그것이 지치고 싱싱하지 않은 삶을 걷는 다해도 어찌 고마워하지 않으랴. 지그시 눈을 감고 누굴 위해 해 본적이 없는 기도를 해본다. 또 누군가를 위해 해 본적이 없는 생각. 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종이 위를 흐르는 생명을 창조해 주시길.

 


인생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등교하려고 집을 나서면

가끔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조막만 했고

입을 굳게 다문 노파였는데

가랑잎같이 가벼워 보였으며

체구는 아주 작았다

언덕 위 어딘가에 오두막이 있어

그곳에서 혼자 기거한다는 것이었다

지팡이를 짚으며 그는 지나간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밥을 빌어먹기 위해

노파는 이 길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작량을 잘했으면 저 꼴이 되었을까

젊었을 적에는 쇠고기 씹어 뱉고

술로 세수하더니만

노파 뒤통수를 향해

그런말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젊었을 적엔 노류장화였던걸까

명기쯤으로 행세했던 걸까

노파는 누가 뭐라 해도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지팡이로 길을 더듬으며 내려가던 뒷모습

몰보라는 이름의 노파

 
   2008.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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