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다시피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이고 생리학과 물리학의 법칙에 지배받고 있다. 우리 모두의 감정을 하나로 뭉쳐도 이 법칙을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단지 그들 법칙을 증오하는 일이다. 사랑의 힘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연인과 시인들의 영원한 신앙, 우리를 따라다니는 finis vitae sed non amoris(끝나는 것은 생명이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아무 쓸모도 없고 웃기지조차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재는 시계 같은 존재로 남는 데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고장 나고, 수리되며, 설계자가 태엽을 감는 동시에 절망과 사랑을 생산해내는 기계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인간의 고뇌는 태곳적에 이미 겪은 바 있는 것이고, 그 고뇌는 되풀이 될수록 더 희극적이 되며 더 심오한 고뇌를 만들어낸다는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존재가 되풀이된다는 것까지는 좋다고 하자. 하지만 그것이 케케묵은 것 그대로, 마치 술에 취한 주정뱅이가 계속 동전을 넣고 틀어대는 주크박스의 레코드 같아야만 할까?-282-283쪽
저 액체 거인은 수백 명의 목숨을 집어삼켰다. 전 인류는 가장 미약한 접촉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긴 세월 헛수고를 거듭해왔지만, 바다는 내 존재의 무게를 티끌만큼도 느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다가 두 인간의 비극에 마음을 움직이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물론 내가 그것을 완전히 확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기회를, 까마득하게 작은 기회일지도 모르고 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지도 모르는 그 기회를 영원히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서 계속 지내야 하는 것일까? 나와 그녀의 손길이 닿은 물건에 둘러싸여서, 그녀가 호흡했던 공기 속에서? 무엇 때문에? 그녀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내겐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그러나 나의 내부에서는 하나의 기대가 싹트고 있었다. 그녀가 간 후로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어떤 성취가, 어떤 조롱이, 또는 어떤 고뇌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잔혹한 기적의 시대가 영원히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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