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에 다녀왔다는 언니는 잔뜩 뿔이나 있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조건이 안 좋아. 그럴 때 눈을 낮추라고 하면 이해해. 근데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눈을 낮추라는 거야?! 낮추고 말고 할 게 어딨어!" 오. 맞네. 그렇네. 나는 왜 이 생각을 한 번도 못했지? 아... 난 이 말을 거의 안 들어봤구나.
이 언니는 '스펙'이 좋다. 잘 나가시는 사업가 아버님, 더 잘 나가시는 외조의 여왕 어머님, 언니도 박사까지 밟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는 '엄친딸'이자 '골드미스'다. 38살에 싱글, 조건도 외모도 괜찮은 언니에게 날리는 주변 사람들의 단골멘트는 '눈을 낮춰라' 이다.
이 언니는 우리 사이에서 '엘사'로 통한다. 관심을 보이고 다가오는 남자가 있으면 한 방에 얼려버린다. 다시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게 근성을 뿌리째 뽑아버린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묻는다. '나한테 관심 있었던 거 같았는데 왜 그 뒤로 연락이 없는 걸까?' 들으나마나다.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언니가 그 남자를 먼저 칼 같이 내쳤겠지, 언니는 아니라는데, 들어보면 역시나다. 우리가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고 나면 '아~ 그런 거구나' 한다.
하지만 크게 아쉬워하진 않는다. 쿨하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걸로 끝이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이라는 걸 하기 위해 억지로 눈을 낮추는 건 사양이라고. 남자 없는 지금도 딱히 나쁠 거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정말 그래보인다.
나는 언니와 반대다. 눈 좀 올리라는 말을 들어왔다. 8년을 만난 전 남자친구는 한 살 연하였는데, 내가 33살이 될 때까지도 특정한 직업을 갖지 못한 채 계속 방황했다. 아프니까 청춘이길 원하는 남자였다. 그가 청춘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혼자 울면서 나이들어 갔다. 전남친를 만나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지 그래?" 즉, "눈 좀 올려" 였다.
"눈 좀 낮춰"와 "눈 좀 올려"사이의 그 어디 중간 쯤에 해당하는 사람을 만나야 결혼할 확률이 올라가겠지. 마음이 통하는데 결혼할 여건이 전혀 안 된 사람이나 결혼할 준비는 됐는데 마음이 전혀 안 통하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 모 아니면 도는 타협의 여지가 없거든. 적어도 개, 걸, 윷은 되어야 눈을 낮추든, 올리든 할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결국 사람들 말이 맞다. 노처녀는 이것저것 너무 따지는 게 많아서 결혼을 못한다고. 언니가 내가 포기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조건은 '마음'이다. 마음은 남들이 낮추라고 해서 낮춰지거나 올리라고 해서 올려지지 않더라. 마음을 움직이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후 나는 미련하게도 또 다시 결혼할 수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아홉 살 연하의 취업준비생과 말이다. 사람들에게 말했다가는 내 눈을 뽑아서 머리 위로 끌어올려줄까봐 겁이나서 비밀로 하기로 했다.
미래의 현실적인 남편감을 찾는 대신 오늘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을 선택한 나. 남들에게 보여지는 완벽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만의 불완전한 행복을 놓을 생각이 없는 언니.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현실감각 제로인 여자들은 아니지만, 지키고 싶은 우리만의 결혼원칙이 있다.
기승전사랑, 그 다음에 결혼.
이 원칙을 거스르면서까지 결혼에 목매고 싶진 않다. 결혼한 사람들이 그렇게도 조언해주지 않았던가. 결혼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