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란 믿지 못할 것,
우리 여성을 잡아먹으려는 마귀인 것,
연애가 자유니 신성이니 하는 것도
모두 악마가 지어낸 소리인 것.

-현진건 단편소설 'B사감과 러브레터' 중

 

즘 부쩍 예민해졌다. 얼마 전 엄마와 대판했던 날(8화 '엄마와의 전쟁' 편 참조)이 피크였다. 결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서 '건드리기만 해' 상태에 도달했다. 결혼의 '결'자만 꺼내도 확 물어뜯어버릴 거야, 한동안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마음 한 편 아싸리 누구 한 명만 걸려라 싶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준비된 파이터인 날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콧구멍 벌렁이며 씩씩대는 '성난 고릴라'를 알아보고 더러워서 피했나. 평소 노처녀타령하며 속뒤집어놓던 그 많은 사람들 다 어디갔어. 노처녀 히스테리 제대로 부려보려 했건만 도와주질 않네.

 

***

 

 

즘 확실히 참을성이 없어졌다. 꾹 참고 넘기던 노처녀 잔소리인데 목구멍에 딱 걸려 한 모금도 못 삼키겠다. 최선의 방어는 최대의  공격. 기어코 한 마디 해야 직성이 풀린다. 한 살 한 살 더 먹을수록 성난 고릴라로 변신하는 순간이 점점 잦아지고, 변신시간도 길어지고 있다. 이러다 진짜 노처녀 히스테리되는 거 아냐. 어쩌면 이미 시작된 걸지도. 신경이 쓰여 컴퓨터를 켜서 '노처녀 히스테리'를 찾아봤다.

놀랍게도 '노처녀'만 검색창에 넣었는데 '노처녀 히스테리'가 연관검색어에 떴다. '노처녀 히스테리 때문에 회사에 다니는 게 고문입니다, 도와주세요' 같은 글들이 많이 검색되었고, 댓글로 폭풍 공감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저도 노처녀 히스테리 인가요?' 라는 글도 있었다. 이렇게나 이 문제로 고민하거나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다니. 나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

 

 

터넷에 뜬 전형적인 노처녀 히스테리 증상은 이랬다. 감정기복이 심하고, 폭언을 퍼붓고,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신경질 부리고, 자기 말이 무조건 맞다고 우기고, 피해망상이 심해서 가만히 있는데도 내 욕을 하지 않았냐며 바락바락 성질을 내고, 아니라고 하면 아니긴 뭐가 아니냐며 면박을 주며 몰아부치고 등등. 노처녀 히스테리에 당하고 있다는 피해자들은 남자 뿐 아니라 여자도 많았다.

내가 봐도 총체적 난국이다. 아무에게나 아무 때에나 마구잡이로 히스테리를 퍼붓는 건, '또라이' 아닌가?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표현은 도리어 예쁘게 포장해준 느낌이다. 내가 성난 고릴라 모드라고해서 엄한 사람 붙잡고 말도 안 되는 꼬투리 잡고 난동을 부린다면? 노처녀 히스테리는 무슨, 그건 그냥 '미친 노처녀'지. 또라이와 노처녀 히스테리는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처녀 히스테리 해결책이라고 나온 것도 전혀 납득이 안 갔다. 욕구불만인 노처녀에게는 남자 밖에 답이 없다는 것이다. 뭐지, 이 밑도 끝도 없는 만병통치약은. 난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성난 고릴라로 종종 변신하는데. 그에 비하면 남자친구가 없는 노처녀 친구는 나랑 달리 유연하게 노처녀 잔소리에 대처하면서 히스테리의 '히'자도 안 보이는데.

위에서 나온 히스테리녀가 남자를 만났다 치자. 저 정도로 극심한 히스테리를 부리던 여자가 갑자기 천사로 바뀔까? 글쎄... 얼마 못 가서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쯧쯧쯧' 소리가 나오다가 헤어졌다는 소식에 '내가 저럴 줄 알았다' 하겠지.

결국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게 또라이 중에 결혼 못하고 나이가 든 여자를 가리키는 말인 건가.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마침 노처녀일 때 '으휴, 노처녀 스트레스 쩌네' 하고 싸잡아 버리는 거에 불과한 걸까.

그렇다면 내 성난 고릴라 모드는 뮈란 말인가. 노처녀 히스테리라 하기엔 약하고 히스테리가 아니라고 하기엔 지랄맞다.

 

 

***

 

 

란스러워 하는 내게 유부녀 친구가 말했다. 자긴 결혼했는데도 히스테리 작렬이라고. 오질나게 말 안 듣는 애도, 애나 마찬가지인 남편도 성질을 돋궈서 참을 수가 없다고. 이러면 안 되지, 좋게 말해야지 싶다가도 막상 그 상황이 되면 화가 주체가 안 되서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또 후회하고를 반복한다고.

인터넷에서 본 수많은 노처녀 히스테리 사례보다 유부녀 친구의 이야기에 더 공감했다. 참다 참다 어느 순간 임계점을 돌파하면 그 다음부터는 1도 참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내 안에 히스테릭한 부분이 있는데 그게 자꾸 건드려지다보면 점점 더 히스테릭해지는 무한루프. 생각해보면 특정인이나 특정 상황에서 유난히 히스테릭해지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은 많든 적든 히스테리적이다'. 독일의 정신의학자 에른스트 크레치머의 말이다. 그래. 누구나 예민한 부분이 있고 잘못 건드리면 폭발하는 거겠지.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말 때문에 괜히 그 부분이 더 커보였던 건가.

 

 

***

 

 

구나 히스테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위안이 됐지만, 히스테릭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히스테리를 방출하고 나면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데다 그런 짓을 한 내 자신이 싫어지기 때문이다.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고 현명하게 화를 표출하는 방법을 열심히 고민해서 다음엔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정해봤지만, 내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자 나는 또 다시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하. 어쩜 이렇게 임기응변이 부족하고 후회할 짓을 반복하는 걸까. 이렇게 미친 노처녀가 되어가는 건가, 한도 끝도 없이 우울해지는 그 때 여자와 히스테리는 상관관계가 있다는 글이 눈에 띄었다. 또라이가 되기 전에 히스테리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한 줄기 희망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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