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08시, 주말 이른 아침부터 엄마의 기습공격은 시작되었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까지 자고 있어?!
이렇게 게을러서
애는 어떻게 키울래?!


니가 그러니까 결혼을 못 하지!

 

주말이니까 푹 자려는 생각으로 어젯밤 늦게 침대에 들어갔는데,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더 난리가 나겠지. 아...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직장상사의 폭언으로 하루를 여는 듯한 상큼한 기분. 추억돋네.

냉기가 감도는 식탁에서 따뜻한 국밥을 꾸역꾸역 우겨넣으며 언제 시작될지 모를 2차공격에 대비해 엄마 눈치를 살폈지만 무탈하게 지나갔다. 아빠는 직장 상사딸 결혼식에 가셨다고 한다. 아침부터 멀리 지방으로 결혼식이라니 직장인은 어쩔 수 없고만. 확실히 직장 때려치고 나니 그런 행사에 불려다닐 일이 잘 없다. 가끔 인간관계가 너무 협소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 돌려받지 못할 축의금 내는 것도 아깝고, 무엇보다 이렇게 주말에 편하게 지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분위기가 괜찮길래 대충 씻고 소파에 누워서 TV를 틀었다. 오랜만에 보는 예능프로그램은 재미있었다. 이렇게 베짱이처럼 평생 지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이것도 계속 하면 질리려나? 하긴, 일개미를 해야 입에 풀칠을 하지. 그래도 오늘은 쉬자. 어젯밤에도 새벽까지 일하고, 요즘 너무 달렸다. 히히. 우히히. 푸핫.

밥 먹자마자 퍼질러 누워서
잘 하는 짓이다.
넌 약속도 없니? 남자 없어?
주말에 집구석에 늘어져서
TV나 보는 여자를
누가 데려가고 싶겠어!

니가 그러니까 결혼을 못 하지!!

 

이런, 오늘이 그 날이었다. 엄마가 분노의 화신과 접신하는 날. 이런 날에 엄마의 눈에 비친 나는 배 아파 낳은 사랑스런 딸내미가 아니다. 눈엣가시이며 무찔러야 할 적일 뿐. 이럴 땐 나오는 게 상책이다. 3차 무차별 폭격이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도망치기로 했다. 보이는 대로 대충 주섬주섬 껴입고 부리나케 걸어가 현관문고리를 돌리는데 분노의 화신에게 딱 걸렸다.

 

잠깐! 그러고 나가려고?
니가 나이가 몇인데
그 꼴로 나다닐 생각을 해!
잘 차려 입어도
봐줄까 말까할 판에,
니가 그러니까...

 

 

오케이, 거기까지. 더 이상의 말은 거부한다. 150데시벨의 확성기 공격을 현관문으로 막아내고 나왔다. 엘레베이터 거울에 추리닝 바람의 후줄근한 노처녀가 보인다. 아놔. 아무래도 내 얼굴에 '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써 있나보다. 짐작이 가는 바는 있다. 연말연시 동창모임. 다가오는 명절. 아빠의 결혼식 나들이. 뭐하나 내세울 것 없는 딸을 둔 탓에 여기저기에서 엄친딸들의 '좋은 소식' 퍼레이드에 끼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앓이했을 것이다. 그 가시방석 같은 자리를 그 1분 1초가 더딘 시간을 자존심 구겨가며 버텨내고 돌아오셨으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지.

내 탓이 아닌 일로 비난 받는 건 누군들 싫지 않으랴. 그러니 이 모든 원흉인 웬수 같은 딸내미한테 그 화를 퍼붓는 건 당연한 이치라고 볼 수 있다. '니가 그러니까 결혼을 못 하지'라는 엄마 머리 위로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말풍선이 떠다닌다.

백번 천번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애까지 만들어서 주말 아침부터 괴롭힐 건 없잖아. 내 결혼이지만, 내가 당사자인건 맞지만, 내 맘대로 안 되는 걸. 그건 내 탓이 아니잖아. 나는 그럼 어디다 화를 풀어야 해? 8년 사귀고 헤어진 전남친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욕을 퍼부어? 아니면 9살 연하인 현남친에게 빨리 취업해서 프로포즈를 하라고 닦달을 할까? 에휴... 그럴 순 없는 거잖아. 결국 내 탓이 맞긴 하네. 어찌되었든 내가 선택한 사람들인걸. 그렇더라도 서럽다, 정말. 이래서 나이들면 따로 살아야 하나봐.

추리닝 차림으로 딱히 갈 데도 없고 누굴 만날 맘도 안 생겨서 근처 카페에 들어가 시간을 때웠다. 그래도 마침 같은 '눈엣가시'처지인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서러움 폭발시키고 나니 한결 마음이 누그러졌다. 버틸만큼 버티다 이쯤이면 슬슬 됐으려나 싶은 타이밍에 슬그머니 나와서 집 현관문을 돌렸다.

당신! 당신 정말 미쳤어?!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그 여자보다 못한 게 대체 뭔데!!

 

시끄럽다!
남자가 바깥 일 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 대수라고 집안 시끄럽게
큰 소리야 큰 소리가!!

 

 

거실에서 막장 드라마 열혈 시청중이신 엄마. 오호라, 이건 절호의 찬스잖아. 리벤지, 복수의 화신이여, 나에게 들어오라!

 

엄마!
내가 이러니까
결혼 안 하는 거야-!

 

드라마에 흠뻑 빠져계시다가 깜짝 놀래서 휘둥그레 쳐다보시는 엄마.
흥. 반격개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