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서른이 된 동생을 만났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 대신 '웰컴 투 서른!'을 외치면서 격하게 포옹했다.

"몇 년뒤에는 웰 컴 투 노처녀다. 그때까지 딱 기다려. 알았지? 어디 갈 생각말고. 얼음!하고 언니 올 때까지 서 있어. 노처녀되면 가서 땡!쳐줄게."

"ㅋㅋㅋ어우 언니, 아냐~, 나도 노처녀래. 엄마가 노처녀되서 큰일났다고 난리야."

엥? 서른이 노처녀라고?? 이제 30대라지만 아직도 솜털이 보송보송해 스무살이라고 해도 믿겠다 싶을 얼굴로 감히 노처녀를 운운 하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다. 노처녀를 모욕하지 말라고 그렇게 쉽게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택도 없는 소리 작작하라고 등짝 스매싱으로 혼줄을 내줬다. 어머님께도 요즘 시대에 서른은 노처녀가 아니라고 꼭 좀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몸보신 해야 겨울을 난다며 거나하게 배를 채우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궁금해졌다. 결혼식을 올리면 공식적으로 '처녀'에서 '유부녀'로 넘어가는 건 알겠는데, 노처녀는 언제부터 노처녀가 된 걸까? 뭘 기준으로 '처녀'에서 '노처녀'로 건너뛰는 걸까? 대체 몇 살까지가 처녀고, 몇 살부터 노처녀로 갈리는 걸까? 


 

 

집에 돌아와 한치를 입에 물고 컴퓨터를 켰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들어가 처녀와 노처녀를 검색해봤다. 그 결과 처녀(處女)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성인 여자', 노처녀(老處女)는 '혼인할 시기를 넘긴 나이 많은 여자' 라고 떴다. 노처녀의 정의가 혼인할 시기, 즉 결혼적령기를 넘긴 늙은 여자라는 걸 알았다. 그래. 네 놈이 범인이었구나. 결혼적령기, 네 이 고얀 놈이 성인 여자와 늙은 여자를 가르는 기준이로구나. 깊은 빡침으로 처녀데드라인(deadline)인 결혼적령기에 대해서 철저히 파헤쳐보기로 했다.

결혼적령기란, 결혼하기 적당한 시기를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에게 '너도 이제 결혼할 때가 됐구나'라는 말을 들을 때가 바로 그 때인 것이다. 나는 저 말을 언제 처음 들었더라. 오래 전 일이라 가물가물하다. 아마 20대에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같은 시대에 20대가 결혼적령기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일하면서 갈고 닦은 검색 실력을 발휘해서 이래캐고 저리캐봤다.

 

선시대에는 20세 이상이면 노처녀로 봤다고 한다(노총각은 25세 이상이라고). 이 시대는 관혼상제를 중시하는 문화적 특성상 결혼적령기를 놓친 노처녀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겼고, 나라가 나서야 할 일로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중종 7년(1512년)에는 양반의 자제중 노처녀가 있으면 왕이 필요한 제물과 옷을 내려 혼인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이럴 수가. 내 결혼에 나랏님이 직접 개입한다고 상상해보라. 게다가 제물과 옷이라니, '돈'이 메인이고 나는 서비스로 끼어주는 '부록'인 셈이다. 양반 딸로 태어나 스무 살에 부록신세라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20살 이상부터 노처녀라는 기준은 심히 야박하다 생각했는데 평균수명을 보니 납득이 갔다. 조선시대의 평균수명은 46세였다고 한다. 20살에 결혼해서 남은 평생 같이 살아봤자 26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결혼적령기에 맞춰 10대 때 결혼했더라도 서방님과의 남은 생애는 30년 남짓. 이것도 장수한 경우에나 해당된다. 정조가 47세에 서거하셨는데 조선에서 가장 영양상태도 좋고 의료혜택도 충분히 받았을 한 나라의 임금의 수명이 이러하니 일반 백성들의 수명은 훨씬 짧았을 것이다. '백년해로' 하려면 세 번은 다시 태어나야 가능한 시대에 그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다. 아, 세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사랑하고 싶어요, 이런 건가. 어쩜 이렇게 낭만적인지. 노처녀 마음 설레게. 

 

 

러던 것이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경제 및 의료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1970년의 평균수명은 여자 71세 남자 66세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에 멈추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 2017년의 평균 수명은 82세에 달한다. 조선시대에 비해 자그마치 35년 이상 늘어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조선시대 사람이 그토록 바랬을 인생 두 번 살기를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결혼기간도 그만큼 늘어났다. 60대이신 우리 부모님은 올해 결혼 38주년을 맞이하셨다. 평균수명에 따르면 앞으로 적어도 20년 이상은 더 함께 하실 수 있을 터인데 워낙 건강하셔서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결혼 60주년 그 이상을 바라보니 몇 년만 더 지나면 백년해로를 달성할 수 있을 날이 곧 올 것만 같다. 조선시대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란다. 현재가 2017년이니 백년에 35년 정도 늘어난 건데, 의학기술의 놀라운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50년정도면 백년해로, 가능하지 않을까? 노처녀 주제에 왜 이렇게 백년해로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아직 현모양처에 대한 헛된 야망을 못 버렸나보다.



뉴스를 보면 요즘 시대에는 백년해로보다 황혼이혼이 문제다. 너무 짧게 사는 게 문제였는데 너무 오래 같이 사는 것도 문제였다. 결혼할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와 쫓기듯 결혼한 뒤에 후회했지만, 자식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살다가 에라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갈라서! 하고 늘그막에 내 인생을 찾아 떠난다는 슬프고 감동적인 스토리다. 아예 조선시대 급으로 딱 26년 정도만 같이 살면 어떨까. 평균수명 82 빼기 26해서 딱 57살에 결혼하면 되겠네! 이야~ 결혼하려면 아직 멀었고만! 여유있네, 여유있어!

 

<인생은 57세부터>

 


꿈에서 깨어나 처절한 현실로 돌아와 현대의 노처녀 나이를 계산해 보았다. 현재까지의 정보를 다시 정리하면, 평균 수명은 조선시대 46세, 2017년 82세, 노처녀 기준은 조선시대 20세다. 중학교 때 배운 방정식을 써먹으면, 수식은 46:20=82:x, 고로, x=35.652173913이 된다. 반올림하면 36세. 그러므로, 조선시대식으로 보면 현대 노처녀 기준은 36세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높을 수 있다. 왜냐하면 위와 똑같은 방법으로 현재 결혼적령기를 계산해보면 28세라고 나오는데, 2016년 여성의 평균초혼연령은 30세라고 한다. 2살 더 많은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노처녀 기준도 36세보다 더 높아야 맞지 않을까? 이렇게 점점 한 살 한 살 높여가는 거 아주 잘하고 있는 짓인 것 같다. 후후후.

 



렇게 복잡한 자료조사와 누추한 계산법으로 노처녀의 나이를 유추하고 있는 것도 노처녀는 몇 살부터라는 정확한 공식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노처녀 나이는 사회적인 통념에 맡기는 게 관례다. '서른 셋이면 노처녀지' 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면 게임 끝이다. 거기서 내가 백날 최소 서른 여섯부터라고 우겨도 소용없다. 

나이 많이 먹은 게 벼슬도 아니고 노처녀가 된다고 해서 아무런 혜택도 없는데, 이런 감투 제발 씌워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에세이를 쓰고 있는 내 자신이 가장 노처녀에 집착하고 있는 1인이 아닐까 싶다. 에효. 나나 잘 해야지. 암튼 동생아. 넌 나이로 보나 외모로 보나 노처녀는 아니니 안심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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