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annerist > 죽지 않으려 무신경해지는 남자, 눈물 흘리다.
-
-
800만 가지 죽는 방법 ㅣ 밀리언셀러 클럽 13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2월
평점 :
스무살 나절부터였을거다. 목욕을 할 때마다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을 했던 게. 내 나이가 한자리였을때보다, 십대였을때보다는 나았지만, 무엇을 하던지간에 퍽퍽한 그림자가 내 하루하루에 조금씩은 걸쳐져있던 건 변하지는 않았기 문일거다. 살집 많은 편인 내 얼굴에 어둑어둑함까지 묻어나오는 꼬락서니를 견딜 수 없어서였다. 빨래비누로 머리를 문질러 거품을 내어 화장실 거울을 마주보고서 박박 머리를 밀 때, 어색하게나마 엷게 웃음짓는 내 꼴이 우스워 웃음의 골이 점점 깊어갔다. 결국 바가지에 물을 떠 머리에 부을 때 이 우스운 꼬락서니에 폭소를 터뜨렸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자, 내 얼굴의 그늘은 사라져갔다. 벌거벗고 우스운 짓거리를 하던 스무살 소년은, 느끼하다는 소리는 들을지언정, 인상 더럽단 소리는 듣지 않는 스물 일곱 청년이 되었다.
여기 현역시절 지지리 재수없는 사건이 드리운 지독한 트라우마의 그늘에 시달리는 남자가 하나 있다. 그는 매일매일을 괴로워하면서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내지 못하고 '그냥'하루하루 밀어낼 뿐이다. 아파하면서도 능동적으로 여기서 벗어나려고 하지도,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길이 있으니 걷고, 일이 있으니 한다. 삶에 대한 보람도, 희망도 없다. 그렇다고 지독한 염세주의에 빠져 하루하루 가라앉아 가는 것도 아니다. 800만가지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그야말로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 이 지독하게 암울한 사나이가 가진 최악의 불행은 그 자신이 불행한지, 얼마나 마음이 망가져 있는지 모른다는 데, 알려하지 않는 데 있다.
읽는 내내 어거지로 웃는 연습을 해서 인상을 바꿔 낸 스물 일곱 먹은 청년과 이 중년의 남자를 겹쳐 생각했다. 어둠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려 몸부림친다는데 있어서 둘은 별 차이가 없다. 하나는 그 반대 방향을 향해 어거지로 몸을 비튼다. 맘이 변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저 믿을 뿐이다. 몸이 변하면 마음도 변한다고. 다른 하나는 그 방향의 모든 신경을 절단해 버린다. 자신이 가진 문제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무관심함으로 말이다. 그저 덮고 또 덮어서, 언젠가 무덤덤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후자의 바람은 적절한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책장마다 사람들의 죽음이 넘쳐 흐른다. 칼로 난도질당하고, 전철에 몸을 던지며, 총에 맞고 강바닥에 몸을 던진다. 탁한 도시의 공기 속에 피냄새를 더 짙게 흩뿌리는 작자들의 사진잔치, 말잔치 속에 자신 반 발자욱 뒤에 따라붙은 죽음의 그림자를 잊거나, 차라리 덤덤해질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나보다. 그래서 이 남자, 어찌 보면 자신과 별 상관 없는 창녀의 죽음을 비정상적으로 쫓는다. 어리석다는걸, 바보짓이라는 걸 다른 사람도, 그 자신도 안다. 몸을 섞었다 하나 그 자신도 알고 있듯, '서비스'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대체 왜? 계속해서 자신이 고개 돌리려고 하는 죽음의 그림자와 간격을 벌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쫓는 게 아니었을까. 그러는 와중에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양아치의 다리를 분질러뜨리고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남자의 가슴에 네 발의 총탄을 박아넣는다. 지독한 역설이다. 자신의 죽음을 잊기 위해 다른 이의 죽음을 쫓아가며, 그 와중에 자신의 죽음과 몇 번이나 손을 잡을 뻔 했다는 거.
잘 짜여진 '추리'소설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메튜가 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볼 수 없기 때문에. 사건 해결의 실마리란 놈이 작가가 전혀 제시하지 않은 곳에서 대사 한 마디 치지 않는 인물이 사건의 열쇠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해결의 물꼬가 터지는 건 다소 생뚱맞다. 하지만 그런 거 다 필요없다. 어차피 이 '추리소설'의 강조점은 '추리'에 찍혀있는 게 아니라 '소설'에 찍혀있으니까. 자신의 죽음을 피해 타인의 죽음을 쫓으며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는 남자의 마음속을 파해치는 데 있으니까. 그래서다. 이 지독한 악순환을 끊고 다른 이들 앞에 서서, 자신에게 드리워진 어둑어둑한 그림자를 힘들게나마 정면으로 마주하고 "나는 알콜중독자입니다"라며 눈물흘리는 메튜의 모습에 가슴 먹먹해지면서도 웃어줘야 하는 이유가.
거울 마주하며 웃는 연습하는것 만으로 모든 게 변할 리 없다는 걸 너무 오래 잊고 있었다. 자기 전 다시 방에 올라가 머리를 감으며 거울을 마주할 때, 습관적으로 또 웃음지을지 모르겠다. 머리 감을 때 화장실 거울을 마주하지 말아야겠다. 대신 자기 전 일기장 앞에 서서 펜을 들고, 정자로 또박또박 적어야겠다. 마침표 마저 찍지 못하고 눈물지을지 몰라도.
"내겐 문제가 있습니다." 젠장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