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지 - 위스망스 단편 (구) 문지 스펙트럼 25
조리스-칼 위스망스 지음, 손경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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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프랑스 문학, 그것도 위스망스는 지금도 여전히 생경하다. 어찌어찌 해서, 낯선 단어를 발견했다. 그것은 퇴폐주의, 혹은 악마주의였다. 문학사조로서 퇴폐주의 혹은 악마주의는 뭘까? 그래서 위스망스를 읽기로 했고, 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 단편집 ≪궁지≫는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들인 〈등짐〉,〈부그랑씨의 퇴직〉,〈궁지〉라는 세 작품을 담았다. 황당했다. 결국 이 책으로는 '퇴폐주의자 위스망스'를 읽게 해주지 못했다. 내 심정은 ≪거꾸로≫를 읽고 위스망스에게 원고를 부탁했다가, 〈부그랑씨의 퇴직〉을 받아 쥐고 실망했다는, 한 영국 잡지사 사장의 그것과 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나? 사 놓은 바에야 읽어야 할 터. 악마주의나 퇴폐주의 대신 자연주의로 목표를 수정했다. 번역자는 위스망스의 끝없는 비판 정신을 찬양한다고 했는데, 그 비판 정신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등짐〉을 읽고 재밌었던 것은 군기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보불전쟁 당시의 프랑스 군바리들. 하루나 이틀이 지나갔다. 우리들은 명령에 따라 말뚝들을 이용하여 보호막을 만들었고, 화주를 많이 마셨다. 무르물랑의 갈보집들이 계속 가득 찼을 때에 갑자기 캉로베르는 군기가 꽂혀 있는 군대 선두에서 우리 부대를 열병했다... 우리들은 이 원수의 말에 설득당하기는커녕 아무것도 받지 못했고, 먹을 것도 거의 없다는 불만을 합창하듯이 고래고래 토해냈다. 그러자 힘으로 우리들이 불평하는 것을 저지하겠다고 그는 말했다. "아니, 그만, 그만! 만 명 모두 엎드려뻗쳐. 파리로! 파리로 가!" 도대체 이런 나라의 군대가 어떻게 강화도를 활보하고 약탈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을까, 라는 직업적 생리에서 기인한 다소 핀트에 어긋난 물음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손자는 전쟁 승리의 기본 조건으로 道, 곧 전쟁에서의 명분을 들었다. 명분 없는 전쟁은 얼빠진 군대를 양산한다. 보불전쟁은 그만큼 명분이 실종된 권력가의 정치쇼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적어도 제목이 〈등짐〉이 아니라 〈출발의 찬가〉였으면 더 좋았다. 〈등짐〉은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비판보다는 한 부르주아 청년이 전쟁터의 활란에서 벗어나 일탈을 일삼다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간 안도감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등짐〉으로의 개명은 전략이다. 자신을 자연주의계열로 분류하게끔 하기 위한, 그쪽 방면에서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이 아닐까.

〈부그랑씨의 퇴직〉은 ≪궁지≫의 다른 두 단편에 비해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나왔다. 이 작품을 자연주의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만큼 가장 옅은 색깔의 자연주의 작품일 것이다. 단적으로 부그랑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상식적으로는 말이다. 명퇴를 당한 전직 공무원 부그랑이 자신의 집에 사무실과 유사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사환을 고용해 똑같은 업무를 만들어 한다는 얘기. 이런 인물은 존재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그만큼 더 재밌다. 〈등짐〉에서의 외젠느는 부르조아 청년의 '앙탈'에서 오는 재미를 쪼금 주지만, 이보다 재밌지는 않다. 생각해 볼만한 점도 제공한다. 흔히 노동의 소외라는 말을 많이 한다. 헤겔은 노예조차도 자신과 노동을 동일시한다고 했고, 마르크스는 그런 노동이 더 이상 자신과 일치되지 않을 때 노동의 소외가 발생한다고 말했다던가? 여하튼 한 고귀한 공무원으로 존재의 이미지를 키워가던 부그랑이 더 이상 공무원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됐을 때 느끼는 그 엄청난 소외감, 그것은 부그랑의 목숨까지도 앗아가는 무서운 압박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부그랑의 내면적 소외감, 압박감이 키포인트이다. 비판을 논하기에는 웬지 약하다.

마지막 〈궁지〉는 두 놈의 추악한 부르주아가 마땅히 도움을 줘야할 선량한 숙녀들을 궁지에 몰아넣는다는 얘기다. 앞의 두 작품에 비해 비판 강도가 제일 높다. 부르주아라는 계급, 그들의 악덕이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 그러나 그만큼 재미없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면서 위스망스가 왜 샹파뉴 부인을 속물로 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가 여성에 대한 편향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인가? 억압하는 자들을 비판하면서, 억압받는 자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결국 억압받는 자와 다를 바 없는 자를 속물로 그리다니. 마치 양비론처럼 〈궁지〉의 비판의 칼은 무뎌지는 게 아닌가.

≪궁지≫는 위스망스의 초기작, 빛을 보지 못할 뻔 하다가 겨우 공개된 작품, 당시 별로 주목받지 작품, 이 3개를 묶어 놓은 단편집이다. 이런 작품들을 문지에서 책으로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해설 부분에서 그러한 이유를 잘 납득할 수 없었다. ‘무슨 작품이 당시의 뭐를 비판하고 있으니 위스망스는 비판 정신이 충만해 있다.’ 단지 이것뿐이면 되겠는가? 내가 봤을 때 위스망스의 비판의 칼은 그리 날카롭지 않다. 차라리 ≪거꾸로≫를 읽었으면 좋았다. 소설 읽기에서 재미·처절함을 추구하는 분이라면, 이 책 ≪궁지≫는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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