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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도서 리뷰
사사키 아타루 지음
거듭난 사람들
'거듭난다'라는 표현이 성경에 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 영혼이 새롭게 되어 구원, 영생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거듭났다고 해서 겉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똑같이 종교활동을 해도 거듭남의 여부는 겉으로 당장 알기 힘들다.
'누군가를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잘 모르겠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사랑한다면 글쎄라는 애매함은 없다. 당연히, 무조건, 확실히 사랑한다고 한다.
'읽는것'도 이와 같다. 읽음으로 거듭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글자를 읽고 정보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사사키 아타루는 이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말한다. 그리고 무의식의 저항이, 우리가 책을 읽을 때에 그것을 진짜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지루함이나 난해함을 느끼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모든 것을 알고싶은 이유
그렇다면 내가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책이 나를 읽는 것이며, 모르는데도 무언가 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나는 내가 무언가 모른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상태가 두렵다. 그래서 모든것을 알고 싶고 항상 더 많이 읽고 알지 못하는 나 자신과 환경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나 또한 거듭나지 못한채 그저 종교활동만 열심히 하는 사람과 같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읽음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 거듭나지 못하고 읽음 그 자체, 하나의 상식을 더하는 것에만 만족했던 것 아닌가 하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감 말이다. 나만의 확고한 시각을 가지기 위해 많은 것을 읽어보지만 그게 오히려 남의것만 빌려오는 결과를 낳는게 아니었는지도.
거듭남을 기준으로 본다면 내가 그동안 '읽었던' 수 많은 책과 글자들 중 대부분은 '무의미' 할 지도 모르겠다.
혁명의 씨앗, 읽고 쓰는 것
'읽고 쓰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다' 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읽음은 사람들이 아는 그 읽음이 아니다. 읽음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거듭난' 사람들이야말로 역사 속에서 세상을 바꿀만한 혁명을 일으켰다. 이전의 나로 도저히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성서를 읽은 마틴 루터와 같이.
그렇다면 진짜로 읽는것은 참 무서운 일이다. 책의 첫장과 마지막장 사이는 고작 몇 센티라도, 첫장의 나와 끝장의 나는 찾을 수 없을만큼 멀어지니까. 어디에서나 넘쳐나는, 휙휙 넘겨보던 그 수많은 책들의 표지가 갑자기 돌덩이처럼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진정한 읽음은 내가 아닌 타자와의 만남이고 교류이기에 내가 세상의 중심인 태도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아니, 읽고싶지 않겠다. 타인은 내 편이 아니니까.
그래서 왜 그리도 사람들은 읽지 않는지, 읽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만 내 시각으로 편협하게 받아 들이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사람들이 읽고 다시 쓰는것을 왜 그리도 싫어하고 금지하고 억압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다행히 진짜로 읽은 사람들은 다시 진짜로 쓰게 된다. 그것은 문자가 아닌 고백이며, 신앙이다. 다시 누군가가 '나'를 읽고 거듭나길 바라는, 결코 종교에 뒤지지 않는.
가짜 혁명에 속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읽고 쓰는것에서 출발하지 않은것은 진짜 혁명이 아닐 것이다. 특히 폭력은 혁명의 부산물이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물리적인 폭력으로 보이는 제도와 권력자와 환경만 바꾸려 했던 가짜 혁명이 얼마나 많은가. 그건 유교사상은 그대로인채 옷만 한복에서 양장으로 갈아 입은 것에 비유가 될런지. 크고 작은 혁명들이 쉽게 '이념의 진보성과 생활의 보수성'과 같은 허망한 원점으로 되돌아 간 것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읽지 않아서가 아닐까.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남을,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오만과 편견이 아니었을까.
나의 고백, 그날의 혁명
이 책을 읽으며 나에게 혁명이 되었던 기억 너머의 그 읽음이 다시 살아났다.
'진짜로 읽었'기에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서 읽기 이전과 이후의 삶으로 나눌 수 있을만큼 혁명적이었던 그것들, 그리고 그분들.
물을 느끼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내가 사는 이 세상속 이미 있는 모든 것들에 아무 이질감도, 의심도, 낯설음도 느껴본 적 없는 일상을 뒤집었던 <이념의 속살>, 무엇이 지식인으로 사는 것인지 알게 해준 고 리영희 선생님의 <대화>, 그런 책들.
그건 분명히 혁명이었다. 여전히 진행중인.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들어라, 다시 쓰는 그 손을
섬찟한 제목의 의미는 아무데도 없다. 정말로 기도를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닐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의 기도는 신의 의도에서 빗나간, 자기 욕심이 많기에 - 그런 무의미한 기도는 필요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읽지도, 타자와 만나지도, 다른 세계를 본 적도 없으면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죄악이 아닐까.
다시 써야할 때가 왔다.
읽고 만났다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쓸 수 밖에 없다. 내가 쓰는 모든 것이 혁명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거듭난 사람이 간증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듯이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그렇게 '진짜' 쓸 수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에게 다시 '진짜' 읽히는 혁명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도 나처럼 쓰고 읽힐 수 있다면…
나는 다시 쓰게 될 그날을 더욱 간절히 기대하며 이 책의 마지막 문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