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 달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이란, 독자의 상황에 따라 같은 문자여도 다르게 해석되고 흡수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낀다. 지금 내 상황에서 나희덕 시인님의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라는 '위로'로 다가온다. 나보다 인생을 더 많이 경험한 어른이 나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주는 느낌이다.

삶을 방향을 보여주기보다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상황과 감정, 그 속에서의 통찰, 받아들이는 방식이 나로 하여금 지금 내 상황과 감정에 솔직해지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도와준다고 해야 할까?

모르겠다. 다른 상황의 내가 읽으면 또 어떻게 다가올지는.
결론은, 이번 리뷰는 약간의 슬픔이 첨가된 상황의 전제하에 밑줄 친 글귀들이다.

 


- 엎드릴 수밖에 없다
자라투스트라는 산비탈의 나무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무가 바람에 굽은 것처럼, 인간 역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단련되기 마련이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신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 고통이 주어졌다는 것은 신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삶을 강하게 구부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더 낮게, 더 낮게, 엎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뿌리는 흙을 향해 더 맹렬하게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엎드렸던 흔적들을 나무도 사람도 지니고 있다.

▶ 최근에 '사람의 미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상식이 아닌 실제로 겪게 되면서, 나와는 상관없을 거라는 안일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특히, 부정적인 상황이 생성되거나, 내가 감내할 수 있는 것보다 큰 슬픔이나 고통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다뤄야 할지 대하는 법이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슬픔이나 고통에 대한 소재를 보게 되면 더 집중한다. 특히 '매드 클라운'의 '우리 집을 못 찾겠군요' 의 가사 중 "자기보다 큰 슬픔을 쇠똥구리처럼 힘겹게 굴리면서가"라는 가사가 너무 마음속을 후빈다. 저 가사를 보면 그냥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다.
친한 사람의 고통에 대한 감정 소모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나의 직접적인 고통은 아니지만 너무나 친했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감정 소모,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너무 어렵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욱 혼란스럽고 다루기 어려운 듯하다.

이러한 나의 상황에서 이 글귀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전반적으로 이 책의 대부분이 나에게는 위로로 다가왔다. 나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의 연륜, 시인 고유의 통찰과 성찰.
지금 나에게 번개처럼 찾아온 이 슬픔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약간은 알 것만 같다.

'고통이 주어졌다는 것이 신이 우리 곁은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 '라는 말이 너무 두렵고도 감사하며 약간은 화가 나기도 한다. 나와 주변 사람들이 지금 신의 시험대에 올라 어떻게 대처하는지 평가받는 기분이다. 대처에 따라 상이나 벌이 주어지는 걸까? 모르겠다. 신께서 어떤 신호를 주고자 이런 상황을 투척한 것이라면, 어떠한 메시지길래 내가 감내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을 준 것일까. 지금 이 글을, 이 슬픈 상황이 어느 정도 과거라고 생각될 즘에, 다시 꼭 봐야겠다.
지금은 신의 뜻을 모르겠지만, 미래에 이 글을 읽는 나는 조금은 신의 메시지를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 묘비 대신 벤치를
내가 산책하다 즐겨 앉던 벤치에는 사람 이름 대신 ‘Quesera sera’라는 글자만 음각되어 있다. 마음이 무겁거나 우울할 때 그곳에 앉아 도리스 데이의 그 노래를 혼자 읊조리다 보면, 마음 한끝에서 밝은 기운이 생겨나곤 했다.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눈앞에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가라고, 괜찮다고,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놀랍지 않은가, 평범한 의자에 적힌 한 문장이 그런 위로를 베풀어준다는 것이.

- , 시간이여
이 작품에서도 그렇듯이, 시간은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빼앗아가는 시간과, 뒤엉킨 인생의 매듭을 풀어주며 용서와 화해에 이르게 하는 시간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원망하기도 하고, 고통을 씻겨주고 가라앉혀주는 시간에게 감사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보다 시간의 너그러움에 좀 더 기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 뒷모습을 가졌다는 것
자신의 뒷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인에게 포착된 시선을 통해서만 자신의 뒷모습을 확인할 뿐이다. 누군가는 내 뒷모습에서 때로는 쓸쓸함을, 때로는 차가움을, 때로는 경쾌함을 읽어냈으리라. 타인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등을 가졌다는 것. 자신이 알지 못하고 어찌할 수도 없는 신체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 왠지 두렵고도 안심이 된다.
이처럼 뒷모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동시에 아주 많은 것을 말해준다. 무엇보다도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에 넘치는 거짓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나마 정직하고 겸손할 수 있는 것은 연약한 등을 가졌기 때문이다. 뒷모습을 가졌기 때문이다.

- 흰건반과 검은건반
연주를 들으며 나는 피아노가 흰건반과 검은 건반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흰건반 52, 검은건반 36, 88개의 건반으로 이루어진 피아노를 연주하듯이, 우리의 삶은 절망과 희망이라는 건반을 교대로 짚어나가는 일과도 같다. 만일 흰건반만 있었다면, 또는 검은 건반만 있었다면, 저 아름다운 생의 음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흰건반과 검은 건반이 나란히 있기에 우리는 마음의 # 과 이 만들어내는 섬세한 선율을 들을 수 있다.

- 내려놓아라
그냥 다 내려놓으라고. 감당할 수 없는 것까지 감당하려 하지 말라고. 내려놓고 고요히 기다리면 언젠가는 지나간다고,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남의 집 불을 들여다보듯 할 수 있으면 된다고….

-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사람의 몸이나 마음속에도 저런 연못 같은 게 하나씩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밖으로는 연잎처럼 싱싱해 보이고 연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시들어가고 썩어가는 기억을 붙안고 싸워야 하는 마른 바닥이 있지 않을까.

- 차 한 잔의 무게
사람들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며 마시는 차도 좋지만, 나는 직접 끓여서 혼자 마시는 차를 더 좋아한다. 밥 먹을 때와는 달리 차를 마실 때는 앞자리가 비어 있어도 별로 허전하지 않다. 오히려 또 다른 나와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에 마음이 그윽해진다. 이처럼 차는 어떤 시간과 계절에, 어떤 풍경 속에서,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그 맛과 품격이 달라진다.

- 인생이라는 부동산
생각해보니, 인생은 부동산과 닮은 데가 많다. 시세가 오를 때가 있으면 내릴 때가 있다는 것, 투자 한번 잘못했다 완전히 망할 수도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마음을 세주고 타인의 마음을 전세나 월세처럼 받으며 산다는 것. 그러다가도 이따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보증금마저 날릴 수도 있다는 것. 이렇게 일과 사람에 관해서는 신중하게 선택하고 꼼꼼하게 챙겨야 할 것들이 많다.


-간이역들을 추억함
빠르게 달리던 기차가 잠시 속도를 늦추는 간이역들은 앞만 보고 달려가던 몸과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지금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되묻게 한다. 그 작은 모퉁이에서 꿈과 현실, 기억과 예감은 서로 흘러들어 오롯한 공간을 만든다. 간이역들에서 나는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듣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너무 많은 소리를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