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 > 허수경 작가와의 만남

    2010년 1월 26일 저녁 7시 30분 정독도서관에서 열리는 허수경 시인과의 만남의 자리,  매서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00명의 독자들은 허수경,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정독도서관으로 향했다.   

  내가 그녀를 만나는 것은  늘 시 속 공간에 한정되어 있었다. 다정이 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이 많다던 그녀, 앳된 표정 속에 시인의 얼굴을 지니고 있단 사람은 정말로 어떤 사람일까? 시 속 그녀는 늘 내게 참 안쓰럽고 참 다정한 목소리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게 짙은 녹빛 얼굴의 가수, 그녀의 목소리는 뱀처럼 내 발밑으로 매끄럽게 흘러내려와 '독오른 뱀을 잡'는 '산 가시내' 처럼 짙은 저녁의 목소리로 또아리를 틀어앉곤 했다. 그렇게 내 발밑에 오래오래 앉아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로 '킥킥' 거리던 것이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이제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자 힘껏 쥔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군데군데 센 흰 머리칼, 둥글고 하얀 얼굴,  발목까지 오는 스웨이드 부츠, 나무 빛깔로 편하게 차려 입은 수수한 그녀의 옷차림이 그녀의 앳된 미소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말을 다듬는 시인으로서 편안한 제목이 아닌 '빌어먹을'이라는 불편한 제목을 들고 나타나 거듭 죄송하다는 시인의 첫 말과 함께 시작된 시 낭송회는「거짓말의 기록」을 시인의 육성으로 낭독하는 것으로 그 막을 올렸다. 낭송회가 진행되는 동안 허수경 시인의 시는 연극과 음악, 춤이란 각기 다른 장르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언어 예술과 다른 장르 예술과의 접목이 이채로웠다. 시인도 매 공연이 끝날 때마다 이런 작업이 계속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연극으로 상연된 시는 「내가 쓰고 싶었던 시 제목, 의자 」. 희곡 형식으로 쓰인 시를 연극으로 무대에 올린 것이다. '가족요? 나는 울어요. 울 뿐이에요. 불이 났는데 울지 않을 도리가 있어요? 나는 가족이 언제나 무서웠구요, 나는 언제나 가족이 산맥처럼 나에게 생을 명령해서 싫었구요……'라는 환자의 대사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의사와 환자, 즉 타인과 타인 사이에 소통되지 못하는 괴로움 뿐 아니라 가장 내밀해야 하는 가족이라는 대상이 두려움의 존재, 울음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연극을 보는 내내, 따뜻해지고 싶어 빌어먹을이라는 외마디를 쓸 수밖에 없었다던 시인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근 시인, 허수경 시인, 정마리씨

    시인의 시가 음악으로 바뀌는 무대는 안타깝게도 마이크가 고장이 나서 정마리씨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없었고, 덕분에 어떤 시를 음악으로 소화시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상상속 허수경, 그녀의 '킥킥'거리는 목소리만 하프소리를 따라 조용히 울음처럼, 웃음처럼 공기중에 떠다닐 뿐.

  상상 속 그녀의 목소리가 하프 선율 위에서 잦아들기 시작하자 뒤이어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읽고 울음이라는 감정을 느꼈다는 무용가의 춤이 시작되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무용가의 발 앞에 얌전히 놓여 있는 철제 대야와 시집 한 권이었다. 저것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소리? 울음? 시와 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머무를 수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춤 속의 울음이란 그런 머무르지 못하는 존재인가?

  무음의 공간에서 시작된 춤은 천천히 음악에 맞춰 동장이 바뀌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종이를 찢고(처음엔 시집을 찢는 줄 알고 너무도 놀랐다) 물에 담궜다가 벽에 바르고 하는 등의 의식 같은 행위로 이어졌다. 풍기는 분위기만을 놓고 보았을 땐 제의가 아닐까 싶었는데 무용가의 생각을 전부 읽기란 비전공자로선 무리가 아닐까 싶다. 다만, 흰 천을 가지고 춤을 추다가 목에 맨 검은 보자기에서 빨갛고 노랗고 파란 천들을 꺼내는 행위에서 오방색을 염두해 둔 것이 아닐까 얼추 짐작해 볼 뿐이다. 또한 흰 색에서 검은색으로의 춤 색 전환이 흰 종이에서 시작해 검은 글씨로 넘어가는 시작(詩作)의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글자의 이미지를 지닌 검은 천 속에서 다양한 색상의 천들이 탄생되는 행위를 시에서 다양한 색상의 세계들이 탄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20여분 정도에 걸쳐 연극인들이 시「카라쿨양의 에세이」를 낭독했다. 어미를 잃은 어린 양이 아이를 잃은 인간의 젖을 빨며 느끼는 모성의 고마움과 두려움을 보여주어 마음을 짠하게 했다. 시 구절이 어린 양의 울음처럼 구슬프게 울려퍼지는 밤이었다.   

  낭송회가 끝나자 짧게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이어졌고, 사인을 받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녀의 옆자리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사인을 받는 내내 온몸이 무척이나 떨렸다. '예비 시인'이라고 사인해 달라고 조른 내게 그녀는 그 특유의 앳된 미소를 보이며 '좋은 시 많이 쓰세요'라고 덧붙여 적어주었다. 그리고 일어서려는 나를 잡고, "꼭 이렇게 하세요."라며 다시 한 번 활짝 웃어주는 것이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런 시 낭송회보다는 모두 모여 비빔밥을 먹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던 그녀의 따뜻한 마음에 마음이 뭉클해 순간 눈물을 보일 뻔 했다. "건강히 돌아가세요."라는 나의 말과 함께 그렇게 그녀와의 짧고도 긴 만남이 끝났다. 

 차마 내보일 수 없던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이 내 목구멍 한 쪽 구석에서 오래오래 웅크려 앉아 있었다. 

                                                                                                                                                        사인회

- 허수경 : 시인.  

1964년 진주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을 두 권 내고 고향과 서울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엎드려 책 읽고 남의 시간을 발굴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십수 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에도 시집과 산문집을 내곤 했다. 지금껏 펴낸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이 있고, 산문집으로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모래도시를 찾아서』가 있다.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 최근작 :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마루호리의 비밀> … 총 25종 

- 저자의 한 마디  

심장은 뛰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가장 뜨거운 성기가 된다. 그곳에서 가장 아픈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런데 그 심장이 차가워질 때 아이들은 어디로 가서 태어날 별을 찾을까.

아직은 뛰고 있는 차가운 심장을 위하여 아주 오래된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옛 노래들은 뜨겁고 옛 노래들은 비장하고 옛 노래들은 서러워서 냉소적인 모든 세계의 시간을 자연신의 만신전 앞으로 데리고 갈 것 같기에, 좋은 노래는 옛 노래의 영혼이라는 혀를 가지고 있을 것 같기에, 새로 시작된 세기 속에 한사코 떠오르는 얼음벽, 그 앞에 서서 옛적처럼 목이 쉬어가면서도 임을 부르는 곡을 해야겠다 싶었기에, 시경의 시간 속에서 울었던 옛 가수들을 위하여 잘 익어 서러운 술을 올리고 싶었기에. 
 


2010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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