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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의 냄새
박윤선 지음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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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생이다. 공군기지 관사라는, 꽤 고립된 환경에서 또래 아이들과 자라왔다. 엄마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빨리 돌았고, 어떤 학원이 좋다는 말이 들리면 다들 우르르 몰려갔다. 우리 엄마는 억지로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좋았다. 하지만 내 친구들은 다 그 학원에 들어갔고, 나는 따라간다는 생각으로 같이 배웠다. 피아노, 영어, 수학, 그림, 수영.
‘수영장의 냄새’의 민선이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민선이는 서울 변두리에 살았지만 나는 리 단위의 촌에 살았다. 부모님은 맞벌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학원에 재미를 붙이고 공부를 했다. 수학에 애착을 가지고 영재교육을 받고, 수영을 배우며 하루에 삼십 분씩 물에서 왔다갔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기운이 넘쳤던가. 항상 밝았던가. 미술학원에는 안 좋은 선생님이 있었고, 그 선생님 때문에 인정받고자 노력하는 아이가 되었고, 그 아이는 여전히 내 안에 내면아이로 남아있고. 활기 넘치고 싹싹한 동시에 무기력했다. 정반대의 민선이와 내가 연결되어있는 까닭이다.
나의 책임, 나의 일, 나의 일이 아니지만 내 손 안에 있는 일.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내면아이가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이제 도망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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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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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 그 말을 다인은 계속 곱씹었다. 아쉽다는 건 다음이 없어서 생기는 마음이겠지. 다음에 할 수 없는 말, 다음에 볼 수 없는 얼굴, 다음에 전할 수 없는 마음.
➖알 수가 없는데요. 뭐가 뭔지, 알아둘 수가 없는데요. 어떻게, 얼마나, 무엇을 알아두고 있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보고 있으면 괜히 웃음이 나고 그 순간엔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얼굴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얼굴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얼굴들. 그 짧은 순간, 그래서 너무나 생생한 순간, 그때의 마음.
➖”저는 저 그림이 좋았어요.” / “계속 보고 계셨던 그림이요?” / “네, 저 그림 속 여자가 제가 아는 사람하고 닮아서요.” / “저 그림에서 여자를 보셨어요?”
➖마린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소중해서 그걸 갖지 못한 사람은 소중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준은 자신의 노래가 다인의 귀에 가닿지 못하고 흩어지는 순간을 상상했다. 준은 깨달았다. 초라해지는 거였다. 재능에 도달하지 못하는 노력은, 초라해지는구나.


읽기 전과 후의 생각이 달랐다. 팬픽을 쓰던 작가분이셨고, 팬픽의 형태로 되어있다길래 꽤 낯설었다. 읽고 나니, 애당초 팬픽도 소설의 한 갈래였다는 게 생각났다. 나는 왜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나. 겁먹고 낯설어했던 게 부끄러울 정도로 미려한 문장.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의 소설은 ‘퀴어’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퀴어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여고에서, 팀에서, 누군가는 누군가를 꾸준히 사랑하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렇지 않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팬픽’이다. 이 카테고리가 남아있는 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작업은 필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애당초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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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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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를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이 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컨테이너에서, 자동차에서 있었던 일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제야가 있다. 제야는 아픈 과거에서 스며나는 불안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시간과 날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어난 일은 종이가 아니니 찢어도 태워도 없어지지 않고 없던 일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제야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있다. 타인의 시선이다.


  자고 있는데 집에 도둑이 들었다 치자. 도둑은 나보다 힘이 세고 주변에 흉기 될 만한 것이 널려 있다 치자. 일어나서 도둑이야 소리 지르면 도둑이 나를 죽일 것 같아서, 도둑이 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치자. 그래서 내가 아주 귀중한 것을 도둑맞았다면, 그건 내 잘못인가? (49p)


  당숙은 제야를 강간했다. 사회는 제야를 억압한다. 어떠한 합의도 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최대한의 저항을 했던 제야는 사회에서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변명은 가해자가 하는 것 아닌가. 당신들에게 나는 가해자인가.’라고 생각하며, 제야는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야는 결국 자신을 놓아버린다.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며(86p), 자신이 겪은 일을, 자신이 아끼는 동생이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109p), 제야는 ‘강해지고 싶’다고 느낀다. 진실에 가까울수록 제야는 자신을 눌러야만 했고, 감정이 앞서더라도 ‘어른’들의 합의와 편향된 시각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승호는 답을 알고 싶었다. 출구를 찾고 싶었다. 누나, 미로 있잖아. 승호는 제야의 손과 발을 주무르며 말했다. 미로에서 출구를 찾으려면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걸으면 된대. 그럼 미로의 길을 다 걸어야 할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출구가 나온대. (194p)


  하지만 제야에게는 축복이 따른다. 어른으로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는 이모가 있고, 함께 답을 찾고 싶어 하는 승호가 있고, 제니가 있다. 그리고 제야는, 여행을 통해 깨닫는다.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늦었다고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시간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면서도 제야는 해답을 찾았다.


  여행하는 동안 깨달았어. 나조차 그들의 시선으로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판단할 때가 많다는 걸. (중략) 끔찍한 나는 그런 일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잖아, 그 일 이전에는 나는 나를 끔찍해하지 않았어. 원인과 결과가 자꾸 역전되는 거야. (223p)


  감히 ‘몰락’이라고 말하고 싶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10년간의 고독을 마친 후 속세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파멸’한 것은 아니다. 나는 제야가 ‘파멸’의 상태에서 ‘몰락’으로 변화했다고 봤다. 제야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환경에 대해, 제야는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며 자신을 보듬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0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언젠가’를 향해 달리기 위한 스타팅라인에 선 것이다.


  제야는 지금 소설을 읽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은 올 것이다. (231p)


  우리는 제야에게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다. 해서도 안 된다. 단지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제야‘들’이 더 잘 달릴 수 있도록, 등에 가슴을 기대어주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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