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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ㅣ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를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이 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컨테이너에서, 자동차에서 있었던 일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제야가 있다. 제야는 아픈 과거에서 스며나는 불안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시간과 날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어난 일은 종이가 아니니 찢어도 태워도 없어지지 않고 없던 일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제야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있다. 타인의 시선이다.
자고 있는데 집에 도둑이 들었다 치자. 도둑은 나보다 힘이 세고 주변에 흉기 될 만한 것이 널려 있다 치자. 일어나서 도둑이야 소리 지르면 도둑이 나를 죽일 것 같아서, 도둑이 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치자. 그래서 내가 아주 귀중한 것을 도둑맞았다면, 그건 내 잘못인가? (49p)
당숙은 제야를 강간했다. 사회는 제야를 억압한다. 어떠한 합의도 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최대한의 저항을 했던 제야는 사회에서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변명은 가해자가 하는 것 아닌가. 당신들에게 나는 가해자인가.’라고 생각하며, 제야는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야는 결국 자신을 놓아버린다.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며(86p), 자신이 겪은 일을, 자신이 아끼는 동생이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109p), 제야는 ‘강해지고 싶’다고 느낀다. 진실에 가까울수록 제야는 자신을 눌러야만 했고, 감정이 앞서더라도 ‘어른’들의 합의와 편향된 시각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승호는 답을 알고 싶었다. 출구를 찾고 싶었다. 누나, 미로 있잖아. 승호는 제야의 손과 발을 주무르며 말했다. 미로에서 출구를 찾으려면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걸으면 된대. 그럼 미로의 길을 다 걸어야 할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출구가 나온대. (194p)
하지만 제야에게는 축복이 따른다. 어른으로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는 이모가 있고, 함께 답을 찾고 싶어 하는 승호가 있고, 제니가 있다. 그리고 제야는, 여행을 통해 깨닫는다.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늦었다고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시간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해 갈팡질팡하면서도 제야는 해답을 찾았다.
여행하는 동안 깨달았어. 나조차 그들의 시선으로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판단할 때가 많다는 걸. (중략) 끔찍한 나는 그런 일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잖아, 그 일 이전에는 나는 나를 끔찍해하지 않았어. 원인과 결과가 자꾸 역전되는 거야. (223p)
감히 ‘몰락’이라고 말하고 싶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10년간의 고독을 마친 후 속세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파멸’한 것은 아니다. 나는 제야가 ‘파멸’의 상태에서 ‘몰락’으로 변화했다고 봤다. 제야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환경에 대해, 제야는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며 자신을 보듬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0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언젠가’를 향해 달리기 위한 스타팅라인에 선 것이다.
제야는 지금 소설을 읽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은 올 것이다. (231p)
우리는 제야에게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다. 해서도 안 된다. 단지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제야‘들’이 더 잘 달릴 수 있도록, 등에 가슴을 기대어주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