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인칭의 자리
윤해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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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인칭’을 사용하면서도 인칭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다. 삶의 사사로운 부분들에 있어 인칭은, 단순히 하나의 문법적 요소로서 작용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1인칭’에 대해 생각해야 할 때다. 우리가 우리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1인칭은 풍부하게 나를 담아내고 있는가, 나는 1인칭으로 표현될 수 있는 사람인가. 수많은 인칭 속 0인칭을 찾아내는 작가가 있다. 장편소설 『0인칭의 자리』의 윤해서 작가가 그렇다.


언제나 사람들은 어딘가에 앉아 있었을 것이고,

어쩌다 일어나 서둘러 걷거나 뛰었을 것이고,

그리고 다시 아무렇게나 주저앉기도 했을 테지만.

_『0인칭의 자리』, 7쪽.


이 작품이 장편소설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고, 책의 절반가량을 읽었을 때에는 공감했고, 책을 덮었을 때에는, 이 작품은 장편소설일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단편소설을 묶어놓은 소설집이었다면 한 편 한 편이 옴니버스처럼 띄엄띄엄 연결되고 있다고 작성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옴니버스도 단편도 아니고, 모두가 가지고 있으며, 또한 가지게 될 수많은 ‘인칭’에 대한 다양하고 기나긴 장편 서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타자의 이름을 가진 또 다른 타자. 내가 아닌 너.

_『0인칭의 자리』, 37쪽.


시적으로-시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두루뭉술할지도 모르겠다- 표현되고 있는 대상들이 있다. 예컨대 ‘어디에나’ 있는 ‘쪼그려 앉은 사람’(95쪽)이나 ‘저절로와 가까스로 사이를’ 나는 ‘갈매기’(116쪽)와 같은 이들. 타자에게 마음을 두지 못한 채 쪼그려 앉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파도의 멀미를 견’디는 갈매기와 닮았다. 그들은 멀미를 하고 있고, 울고 있으며, 때로는 소년이 되어 ‘공포’를 느낀다.(134쪽) 그러한 공포의 본질은 ‘1인칭이 되어’ ‘혼자’가 된 ‘나’에 대한 막연함과 불안함이지 않을까.(140쪽)


그러므로 당신, 당신은 무인칭.

당신이 없는 모든 곳에 당신이 있어.

_『0인칭의 자리』, 150쪽.


‘나’는 어딘가에 있고 어디에도 없으며, ‘당신’은 어디에도 없으며 어디에나 있다. ‘나’와 ‘당신’이 1인칭도 2인칭도 아닌, 무인칭(0인칭)으로 묶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딘가에 있고 어디에나 있는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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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이랑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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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도서는 출판사 창비로부터 서평 작성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받았습니다.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으로서 에세이를 읽다 보면 종종 괴리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나’라는 화자가 등장하거나, 또는 ‘나’라는 독자가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소설들은 대체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사회 속에 녹아든 사람들을 살피다보면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해소된다. 에세이는 정반대다. 같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한 명 톡 튀어나와 ‘철저하게 분리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롯한 개인의 경험, 같은 사회와 배경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차별화 될 수밖에 없는 경험과 감상들. 정반대의 대칭을 이루고 있는 두 분야는 너무도 다르고, 동시에 너무도 닮았다.


‘예술자영업자’인 저자의 소개를 읽었을 때, ‘예술자영업자’라는 단어를 두고 고민했다. ‘예술자/영업자’라고 읽어야 할지, ‘예술/자영업자’라고 읽어야 할지. 어찌 읽든 예술자영업자라는 건 유·무형의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을 ‘자영업’으로서 소화해내기 위해서 가지게 될 부담과 책임이 무거운 단어인 것 같다. 하고자 하는 일을 해야 하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올곧아야 하고, 수익과 소득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은 적합하고 적절하다. 자신의 아이디어로 자신을 먹여 살려야 하는 ‘예술자’인 동시에 ‘자영업자’이기에.


저자 이랑은 ‘미래의 주인’(118쪽)이 되기 위해 듣고 생각해야 할 몇 가지 문장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속삭이는 듯하다. 불확실과 불안정 속에서 당연시되는 자기혐오와 우울을 탈피해 사랑을 되찾는 방법을, 그 사랑이 자신뿐 아니라 타자에게도, ‘지속 가능한 도움’(308쪽)의 형상을 해야 함을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92쪽)에 대한 해답이고, 우리는 그 해답을 저마다의 방식과 속도대로 찾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히기도 한다.


이 책은 자기계발서도, 인문학도서도 아니지만, 완성을 향한 강박(170쪽)보다는 자연스럽게 도달할, 지극히 개인적인 완성을 위한 사소한 지침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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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외계인 보고서 - SF 우주선부터 인조인간까지
박상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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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르는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실제 현실인가, 가상 우주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65쪽) SF(science fiction)에 대한 설명으로 이보다 적합한 말이 있을까 싶다. SF는 중력처럼, 대체로 의식하지 않는 것(106쪽)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며, 그에 맞는 이론을 대입한다. 그 이론을 토대로 내다본 미래에는 우주가 있고, 외계가 있고, 로봇이 있다. 그 끝에는 인간(human)이 있다. 『미래에서 온 외계인 보고서』에서는 SF라는 장르에서 다루고 있는 미래상을 제시하는 동시에 현재의 인간상과 철학을 더듬어나간다.



이론이란 어디까지나 상상력에 사후적으로 설득력을 부여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_ 「우주를 여행하는 엉뚱하고 흥미로운 미래 보고서」, 79쪽.



SF 장르를 창작하고 연구하는 이들은 작품 속에 ‘과학적 정합성’(58쪽)을 부여한다. 실현 가능성이 있음직한 일들은 ‘정합성’, 쉽게 말해 ‘무모순성(consistency)’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SF적 상상은 이론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과학’을 거치게 된다. 그러한 이론화는 저자가 말하는 ‘사후적으로 설득력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79쪽) SF가 과학적 이론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인류라는 존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자 척도가 되는 셈이다.(103쪽) 멀어 보이는 문학과 과학의 거리는 생각보다도 훨씬 가깝다는 것이 SF가 증명하는 대전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완벽한 인공지능을 만들고자 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부터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 더 심층적인 탐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_ 「로봇과 엉뚱하고 흥미로운 미래 보고서」, 129쪽.



SF는 저마다 다루고 있는 소재는 다르더라도 인물이 처한 상황은 대부분 비슷하게 묘사된다. ‘신인류’는 기술과 인공지능의 개발로 인해 양질의 삶을 향유하게 되지만, 결국 그러한 발달은 어떤 요소의 변화(환경이나 인류 존재 자체가 될 수도 있겠다)를 일으킨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들은 대체로 변화의 이후를 드러낸다. 디스토피아에 선행되는 것은 인간의 생과 사를 초월하겠다는 의지(152쪽)이며, 그 의지의 부산물로 남은 것이 황폐화된 미래라는 셈이다. 특히 인공지능이 깊게 개입했기 때문에 나타난 변화라면 더더욱 폐허가 아닐 수 없다.



SF나 판타지는 기본적으로 상상력의 장르이다. 현실적인 설득력이 떨어지더라도 그런 상상력을 통해 우리에게 다른 세계와 다른 과학의 가능성이라는 영감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_ 「SF와 엉뚱하고 흥미로운 미래 보고서」, 296쪽.



이러한 맥락에서 성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변화를 끌어냈던 의지, 즉 ‘유한성’이다. 유한성을 가진 인류는 고차원적 ‘리셋’(215쪽)에 맞닥뜨리기 전에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변화하는 환경’에서 ‘우리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어떻게 바뀔까 하는’(198쪽) 근본적인 문제와 걱정에 대한 새로운 ‘리셋’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인간중심적 사고로부터 벗어난 SF의 장르적 의의라고 한다면, 또한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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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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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르셋’이 한참 떠올랐던 시기가 있다. 사회에서 ‘여성스럽다’고 정의되어 온 것들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말하는데, 그 움직임 속에서 특히 내가 주목하고 싶었던 부분은 ‘사회에서’라는 부분이다. 미적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여성의 허리를 졸라매는 ‘코르셋’이 물질의 형태를 벗어나 사회의 형상을 띠게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상한 일이고, 모순적이게도 동시에 당연하게 여겨졌던 현실이다. 『조각들』에서는 그러한 사회의 형상이 초래한 누군가의 죽음을 보여준다. 그 죽음에 일조했을 것, 예컨대 ‘남이 조심성 없이 만지는 바람에’(11쪽) 구멍이 나 버린 주머니와 같은 것을 확인시켜준다.



걔의 진짜 기분 같은 건 분명 아무도 모를 거예요. 있는데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도려냈으니까.

_「도넛 한가운데」, 94쪽.



뷰티클리닉을 운영하는 ‘히사노’는 그녀를 찾아오는 이들의 사연을 듣는다. 날씬해지고 싶다며 찾아온 ‘시호’로부터 동급생이었던 ‘야에코’의 이야기를 듣고,(「육, 십사」) 코 수술을 하기 위해 클리닉을 찾은 ‘아미’로부터는 야에코의 딸로 추정되는 ‘유우’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도넛 한가운데」) 이후 히사노는 야에코, 유우와 관련이 있음직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 속에 묻어 있는 모녀의 흔적을 더듬어나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흔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모종의 ‘저주’(45쪽)였으며, 그 한가운데에 히사노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는 미안했다? 필요 없어, 그런 시공을 초월한 사과. (...) 필요 없어, 필요 없어, 그런 미안은. 절대 안 받아들일 거야.

_「도덕이니 윤리니」, 143쪽.



큰 메시지와 작은 메시지가 다른 작품이다. 큰 메시지는 작가의 출간기념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당신이 가지고 싶은 ‘아름다움’ 그리고 ‘행복’은 누구의 눈을 통해 본 것입니까?”일 것이다. 이는 에필로그에서 히사노의 목소리로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타인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내면에 시선을 돌린다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295쪽) 작은 메시지는 ‘누구’, 그리고 ‘타인’에 집중한다. 나에게 다가온 이미지는-작품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넛’으로 ‘들여다본 풍경’(245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타인의 세계를 비집고 들어가도 사람들이 그걸 싫어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해본 적 없지?

_「동경하는 사람」, 222쪽.



히사노는 서술자이기 이전에 ‘청자(listener)’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많아지기를’(14쪽) 바라는 마음에 뷰티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옛 지인들을 만나며 과거에 자신이 했던 말들-가령 ‘기에’에게 《아기 돼지 삼형제》의 막내 아기 돼지와 닮았다고 말했던 것(24쪽)에 대해 다시금 확인하게 되고, ‘시력이 나쁘다’는 것을 성형의 필요성과 연결한 것에 대해 ‘그게 동등하게 취급해도 되는 문제야?’(147쪽)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야말로 히사노는 ‘타인의 세계’(222쪽)를 마음껏 비집고 들어갔던 사람이라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남이 조심성 없이 만지는 바람에’ 구멍이 난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자신감’과 ‘자기 긍정’과 ‘긍지’와 ‘존엄’(11쪽)이 자신 때문이었다는 것에 대한 ‘무신경’한 자기 고백인 셈이다.



애초에 왜 다들 뚱뚱한 게 나쁘다고 단정 짓는 거예요?

_「있는 것 없는 것」, 255쪽.



책의 ‘작은 메시지’는 히사노의 ‘깊은 무신경’으로 하여금 표현된다. 타인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을 것을 바라는 미용외과 의사인 ‘히사노’를 보며, 그녀에게 돌아오는 어떤 부메랑과 같은 말들을 함께 들으며 느낀 건 두 가지다. 누구나 히사노일 수 있으며, 누구나 유우일 수 있다. 또, 누군가는 히사노인 동시에 유우일 수 있다. 무신경과 상처는, 상처와 자기혐오는 닮을 수 있음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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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위상학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김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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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폭력(violence)’이라고 한다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사전적으로는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 쓰는 수단이나 힘을 뜻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그 어원인 라틴어 ‘violent’는 ‘격렬한, 난폭한’의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한병철 교수는 폭력이 띤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에 주목하고 있다. 즉, 폭력은 긍정성의 과잉이며, ‘그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불명확’하다는 것이다.(9쪽) 『폭력의 위상학』에서는 ‘타자나 적의 부정성에서 벗어나 자기 관련적’(10쪽)으로 된 폭력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불타버릴 때까지(번아웃)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때 발생하는 자기공격성은 드물지 않게 자살의 폭력으로까지 치닫는다. 이로써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신에게 겨냥하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_「폭력의 위상학」 21쪽.


한병철 교수가 주목하고 있는 폭력은 ‘파열적 폭력’이다. 이는 성과사회에서 비롯된 과잉 행동(194쪽), 즉 ‘강박’(151쪽)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내부로 향하는 폭력을 통해 보이는 역설적인 양상 그 자체를 드러낸다. 파열적 폭력에 노출된 자기 자신은 폭력의 방향성을 프로이트적 자아 속에 있는 ‘타자’를 향한 점이라는 점에서 부정성의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43쪽), 자기 자신과의 전쟁을 치르며 ‘자기를 중심으로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다람쥐 쳇바퀴’ 속에 갇힌 채 마멸되며(54쪽) 소진과 우울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의무 이행에 매달리지 않는 성과주체는 ‘자유’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데, 이때 타자에서의 자유는 나르시시즘적 자기관계로 전도된다.(46쪽) 다시 말해, 후기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오는 우울의 근원은 긍정성의 폭력이며, 우리는 자아로부터, 또한 자아에게로 ‘긍정성의 폭력’을 행사당하는 동시에 행사하고 있다.


폭력은 투쟁이나 갈등의 부정성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의의 긍정성에서도 폭력이 생겨난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이 보이는 자본의 전체주의는 동의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_「폭력의 심리」, 60쪽.


흥미로운 부분은 자아가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할 때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한다는 것에 있다.(62쪽) 외부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있었던 자리에 내부 자아로서의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을 대입시키고, 결국 그 ‘자유’의 파놉티콘에 스스로를 감금하게 된다. 자유의 파놉티콘은 ‘부정성이 없는 같은 것의 공간’(118쪽)으로 대표될 것이며, 그 공간에 결여된 ‘부정성’으로 인해 ‘긍정성’이 무한히 번식해 결국 성과주체는 ‘자유’와 ‘강제’를 분간할 수 없게 된 긍정성의 폭력에 지배당한다.(138쪽) 결국 이때 폭력의 주체는 성과주체가 아닌 ‘시스템’ 자체이며,(128쪽) ‘자유’의 파놉티콘의 공간성은 비상사태가 더 이상 불가능해져 외부적 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동일자의 지옥’(100쪽)으로 확장되어 부정성의 폭력으로부터 분리된 특수한 형태의 폭력, 즉 긍정성의 폭력을 무한히 생산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전쟁은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다. 적대관계라는 부정성이 사라진 까닭에 전쟁은 자기 관계적으로 된다. (…) 그것은 그 누구도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전쟁이다. 일방의 승리가 아니라, 전체의 붕괴, 전체의 소진만이 적이 없는 전쟁을 끝낼 것이다.

_「긍정성의 폭력」, 144쪽.


파놉티콘, 즉 지옥의 형상을 한 ‘자유’의 감옥은 내재성의 테러가 발생하는 내면 공간이다. 부정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긍정성을 띤 채 내면을 향하기 때문에 방어 수단이 없다.(147쪽) 방향성이 ‘내면’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과주체는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는 ‘일체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때 ‘절대적 결핍’에 대항하는 ‘시간’(35쪽)의 가속화로 느껴지는 현상, 즉 급속한 엔트로피의 증대(148쪽)를 실감하게 된다. 따라서 ‘감옥’은 단순히 내면을 감금할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전시의 강박에 자기 자신을 구속’(167쪽)시키는 기능까지 담당하게 된다. 감옥은 자유로운 동시에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강박은 ‘존재의 결핍’(172쪽)을 만회하고자 하는 ‘과잉된 긍정성’의 부산물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절대적 결핍’과 ‘과잉된 긍정성’에 노출된 ‘시간’은 부정성의 결핍과 동시에 ‘편집증적 봉쇄’와 ‘분열증적 방종’(181쪽)을 동시에 경험하며 오롯이 ‘파열’된다.


긍정적인 것의 과도한 증가를 통해서 존재가 뒤흔들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의 증가는 존재자의 비대화를 초래하며, 이 역시 또 하나의 폭력이다.

_「리좀적 폭력」, 176쪽.


파열적 폭력에 노출된 근현대의 성과주체들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에 대해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를 말한다. 스스로가 자신으로부터 추방을 감행하고 추방되는 호모 사케르의 앞에 자유인 ‘호모 리베르’가 있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성과주체, 즉 ‘자유인’의 모습을 한 성과주체는 스스로 추방되어 호모 사케르가 된다.(198쪽) 성과사회가 지속되는 한 호모 사케르는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고, 애당초 우리는 이미 호모 사케르로서의 삶을 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201)을 닮은 이들-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은 일종의 과제이자 ‘긍정성’의 업보로 남겨야 할 것이다.


폭력의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 주인과 노예,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되는 단계에 이르러 완결된다.

_「호모 리베르」,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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