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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위상학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김영사 / 2020년 6월
평점 :
흔히 ‘폭력(violence)’이라고 한다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사전적으로는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 쓰는 수단이나 힘을 뜻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그 어원인 라틴어 ‘violent’는 ‘격렬한, 난폭한’의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한병철 교수는 폭력이 띤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에 주목하고 있다. 즉, 폭력은 긍정성의 과잉이며, ‘그것은 전혀 보이지 않고 불명확’하다는 것이다.(9쪽) 『폭력의 위상학』에서는 ‘타자나 적의 부정성에서 벗어나 자기 관련적’(10쪽)으로 된 폭력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불타버릴 때까지(번아웃)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때 발생하는 자기공격성은 드물지 않게 자살의 폭력으로까지 치닫는다. 이로써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신에게 겨냥하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_「폭력의 위상학」 21쪽.
한병철 교수가 주목하고 있는 폭력은 ‘파열적 폭력’이다. 이는 성과사회에서 비롯된 과잉 행동(194쪽), 즉 ‘강박’(151쪽)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내부로 향하는 폭력을 통해 보이는 역설적인 양상 그 자체를 드러낸다. 파열적 폭력에 노출된 자기 자신은 폭력의 방향성을 프로이트적 자아 속에 있는 ‘타자’를 향한 점이라는 점에서 부정성의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43쪽), 자기 자신과의 전쟁을 치르며 ‘자기를 중심으로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다람쥐 쳇바퀴’ 속에 갇힌 채 마멸되며(54쪽) 소진과 우울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의무 이행에 매달리지 않는 성과주체는 ‘자유’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데, 이때 타자에서의 자유는 나르시시즘적 자기관계로 전도된다.(46쪽) 다시 말해, 후기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오는 우울의 근원은 긍정성의 폭력이며, 우리는 자아로부터, 또한 자아에게로 ‘긍정성의 폭력’을 행사당하는 동시에 행사하고 있다.
폭력은 투쟁이나 갈등의 부정성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의의 긍정성에서도 폭력이 생겨난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이 보이는 자본의 전체주의는 동의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_「폭력의 심리」, 60쪽.
흥미로운 부분은 자아가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할 때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한다는 것에 있다.(62쪽) 외부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있었던 자리에 내부 자아로서의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을 대입시키고, 결국 그 ‘자유’의 파놉티콘에 스스로를 감금하게 된다. 자유의 파놉티콘은 ‘부정성이 없는 같은 것의 공간’(118쪽)으로 대표될 것이며, 그 공간에 결여된 ‘부정성’으로 인해 ‘긍정성’이 무한히 번식해 결국 성과주체는 ‘자유’와 ‘강제’를 분간할 수 없게 된 긍정성의 폭력에 지배당한다.(138쪽) 결국 이때 폭력의 주체는 성과주체가 아닌 ‘시스템’ 자체이며,(128쪽) ‘자유’의 파놉티콘의 공간성은 비상사태가 더 이상 불가능해져 외부적 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동일자의 지옥’(100쪽)으로 확장되어 부정성의 폭력으로부터 분리된 특수한 형태의 폭력, 즉 긍정성의 폭력을 무한히 생산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전쟁은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다. 적대관계라는 부정성이 사라진 까닭에 전쟁은 자기 관계적으로 된다. (…) 그것은 그 누구도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전쟁이다. 일방의 승리가 아니라, 전체의 붕괴, 전체의 소진만이 적이 없는 전쟁을 끝낼 것이다.
_「긍정성의 폭력」, 144쪽.
파놉티콘, 즉 지옥의 형상을 한 ‘자유’의 감옥은 내재성의 테러가 발생하는 내면 공간이다. 부정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긍정성을 띤 채 내면을 향하기 때문에 방어 수단이 없다.(147쪽) 방향성이 ‘내면’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과주체는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는 ‘일체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때 ‘절대적 결핍’에 대항하는 ‘시간’(35쪽)의 가속화로 느껴지는 현상, 즉 급속한 엔트로피의 증대(148쪽)를 실감하게 된다. 따라서 ‘감옥’은 단순히 내면을 감금할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전시의 강박에 자기 자신을 구속’(167쪽)시키는 기능까지 담당하게 된다. 감옥은 자유로운 동시에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강박은 ‘존재의 결핍’(172쪽)을 만회하고자 하는 ‘과잉된 긍정성’의 부산물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절대적 결핍’과 ‘과잉된 긍정성’에 노출된 ‘시간’은 부정성의 결핍과 동시에 ‘편집증적 봉쇄’와 ‘분열증적 방종’(181쪽)을 동시에 경험하며 오롯이 ‘파열’된다.
긍정적인 것의 과도한 증가를 통해서 존재가 뒤흔들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의 증가는 존재자의 비대화를 초래하며, 이 역시 또 하나의 폭력이다.
_「리좀적 폭력」, 176쪽.
파열적 폭력에 노출된 근현대의 성과주체들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에 대해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를 말한다. 스스로가 자신으로부터 추방을 감행하고 추방되는 호모 사케르의 앞에 자유인 ‘호모 리베르’가 있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성과주체, 즉 ‘자유인’의 모습을 한 성과주체는 스스로 추방되어 호모 사케르가 된다.(198쪽) 성과사회가 지속되는 한 호모 사케르는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고, 애당초 우리는 이미 호모 사케르로서의 삶을 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201)을 닮은 이들-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은 일종의 과제이자 ‘긍정성’의 업보로 남겨야 할 것이다.
폭력의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 주인과 노예,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되는 단계에 이르러 완결된다.
_「호모 리베르」, 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