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창비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은 <완득이>. 유쾌하고 가벼우면서 가슴에 묵직하게 남는, 강한 캐릭터들이 인상깊은 재미난 소설이었다. 2회 수상작 <위저드 베이커리> 또한 단숨에 읽어내리게 하는 흡인력이 있다. 완득이의 밝고 현실적인 느낌과는 정반대의, 우울하면서도 환상적이고 미스터리한 이야기와 이를 풀어내는 방식이 매력적이다.

어릴 때, 엄마에게 버려졌으나 다시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아버지와, 새어머니 배선생, 의붓여동생 무희와 함께 산다. 함께 살고 있으나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가족, 조용히 지내다 대학 진학을 기회로 집을 떠날 것을 꿈꾸는 소년. 어느 날, 여동생을 추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집을 뛰쳐나온 소년은 '위저드 베이커리'의 오븐 속으로 들어 간다.

자, 이제 인생극장이 가능하다고 하자. 시간을 되돌려 배선생과 아버지의 결혼이 무산되었다면, 6년 뒤 이 소년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뛰쳐나가기 직전에, 아직도 코피를 흘리며 방문 앞에 쭈뼛거리고 서 있는 무희와 눈이 살짝 마주친 것 같았다.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지만 적어도 네 잘못은 아니라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줄 수는 있었다. 그 애가 고통스러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순간적으로 곁에 있는 '아무나'인 나를 지목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애는 단지 타조처럼 흙 속에 머리를 파묻고 몸통이 보이지 않으리라고 착각한 것뿐이야. - 49쪽에서.  
   
   
  그러니까 이를테면 내가 인류 멸망을 각오하고 육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나는 시간을 되돌리던 순간의 기억을 깡그리 잊고(아니, 잊는다기보다는 존재하지 않은 시간이 되어버리고) 그런 상태로 아버지의 재혼에 적극 반대하여 배 선생과의 만남을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지 어떤지 모르는 일이다. 오히려 배 선생과 두 번의 고통스러운 시간(실은 나는 두 번째 반복이라는 걸 전혀 모르겠지만)을 보내게 될 수도 있다. - 158쪽에서.  
   





 
<짜장면 불어요!>, <장수만세> 등의 작가 이현의 청소년 소설집. 여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은 힙합처럼 감각적이고 또 현실적이다. 소심한 여고생이 고백하지도 못하고 끝내버린 첫사랑 이야기 '어떤 실연', 나는 사랑에 의한 섹스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상대방에게는 치욕적인 성폭행으로 인식된 '빨간 신호등',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가 가족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 보는 '그가 남긴 것' 등 다양한 소재와 시선을 통해  현실을 다시 바라 보게 한다.

표제작 '영두의 우연한 현실'은 다중우주 이론 -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포함하여 여러 개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 가설에서 출발한다. 1991년 8월 23일에 태어난 이영두는 평범한 모범생이다. 1995년 공장에서 손가락을 잘릴 뻔한 아버지는 0.3센티미터의 차이로 위기를 모면했고, 어려운 가정형편이지만 온 식구가 노력하여 차근차근 집도 마련하고 가게도 운영하며 형편이 좋아지고  있다. 그런 어느 날, 영두는 이영두가 병원에 있다는 경찰의 전화를 받고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너와 나의 차이야. 내 아버지는... 손가락 세 개가 없었거든. 그리고 벌써 십 년 전에 돌아가셨고, 그런데 네 아버지는... 손가락 다섯 개가 다 있더라. 억세지만 튼튼한 손가락 다섯 개... 그리고 나이를 먹었고... 여전히 성미는 지랄 같고.. 이게 다 무슨 미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아버지는 내 ... 아버지더라."  - <영두의 우연한  현실> 중에서.
 
   
   
  수없이 본 야동과 우리 사이를 떠도는 성교육을 돌이켜 보건대, 그건 처음으로 섹스를 할 때 여자들의 흔한 제스처일 뿐이었다. 분명 그랬다. 그러다 좀 익숙해지면 남자보다 더 밝히는 게 여자다. 분명 그렇다고 알고 있다. 그렇게 들어 왔다. 그런데 설마, 진짜 싫었다고? 싫다는 그 말이 진심이었다고? - <빨간 신호등> 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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