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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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게 이렇게 비참할 수가 있나,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남의 괴로움, 고통, 그런 것들로 내 삶의 비참함을 채우려 하면 내가 나뒹굴고 있는 곳보다도 더 아래로 쑥 내려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애써 나는 나의 애상에만 눈을 부릅뜨고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내 삶을 손가락질하며 저보다야 낫지한다면 너는 어떤데?’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질 것이기에.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마음껏 손가락질하고 오늘 하루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

오라시오 키로가가 만들어놓은 이 이야기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죽고 죽이고 또 그러한 사태로  태연스레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혹은 동물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우습게도 오싹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 고통도 죽음도 모두 한갓 지나가는 이야기일 뿐이야.’ 라고, 누군가 어디서 들었다며 아무런 정감 없이 건넬만한 이야기들. 그리고 장담하건데, 그 이야기들은 한밤중에 불쑥 당신에게 찾아들 것이다. 혹은 멍하니 창밖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사람 꽉 찬 전철 안에서, 혹은 담배를 피우며 창밖의 어둠 속을 응시할 때에도.

 이 이야기들은 신화 같기도 하고 우화 같기도 하다. 동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괴상한 생물들이 이야기의 내레이터가 되었다가, 죽음으로 그 자리에서 내려와 알 수 없는 이에게 이야기의 끝을 맡기기도 한다. 그러면 그런 죽음에 교훈이 있느냐고? 오라시오 키로가의 이야기가 우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거기에 있다. 그런 흔한 죽음에 교훈이 끼어들 곳이 없다. 개가 죽고 소가 죽고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어나가도, 거기에는 교훈이 없이 그저 이 세계가 그렇게 굴러갈 뿐이라는 인상만을 남길 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일본 애니메이션 프린세스 츄츄(2002)의 이야기 내 내레이터인 드롯셀마이어를 떠올리고 만다. “이거 재밌는걸!” 하고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주인공들의 고통과 슬픔을 따라다니던 남자를. 독자는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를 읽으며 드롯셀마이어가 되고 신곡의 베르길리우스가 된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시선 아래 차가운 내레이션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렇게 우리의 삶에 대한 애상은 밀림 속에 갇혀 영원히 맴돈다. 내 삶의 비참함은 어느 샌가 뒤섞인다. 애상을 가질 이유도 대상도 없이.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리 잠자가 읽는 사람들에게 모두 각기 다른 벌레가 되는 것처럼, 이 이야기들 역시 독자에게 각기 다른 공포를 가져올 것이다. 실체하지 않는 것들, 끊임없이 계속되는 잘못된 선택, 애정, 습관,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렇게 보면, 참으로 무서운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아프로디테는 사랑의 여신이지만 그 일면에는 자신의 사랑을 받는 자들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있고, 이는 곧잘 필멸자들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것처럼, 이 이야기들의 내면에는 셋이 뜨거운 태양에 녹아 뭉뚱그려진 열원이 있다. 그것은 이글거리며 독자의 내면에 숨어 있다가 어두운 밤, 한낮의 태양, 오수의 꿈속에서 기어나올테다.

 재미있게도 본편의 15편 이야기들은 시작해보지도 못한 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온갖 고통과 슬픔과 광기의 향연을 거쳐 사랑으로 완결이 된다. 제목이 그럴 것 같지 않다고? 일단 시작해보자. 헤메다 도착하는 그곳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그러다보면 우습게도, 나는 어느새 땅 위에 있다. 누군가가 파놓고 내가 넓혀놓은 비참함의 구멍 안에서 기어 올라와 뜨거운 태양아래 녹을 것처럼 땀을 흘리며 또 하루를 끝내려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포사다스에 내린 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카예는 다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그 돈으로 흥청망청 술을 마셨다. 결국 거나하게 취한 그는 비틀거리며 향수를 사러 가게로 향했다. (〈멘수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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