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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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 책이 출간될 땐 시큰둥 했던 것이 사실이다. '허삼관 매혈기'를 읽다 초반에 때려치운 나의 편견은 '이 작가의 책은 어렵다' 라는 인식에 멈춰 있었다. 게다가 대학 교양 시간에 조금씩 주워 들은 문화대혁명이나 중국을 비추는 뉴스엔 항상 등장하던 마오쩌둥 사진 등등 중국이 풍기는 이미지는 대략 '유쾌하지 않다'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바구니에 책을 담고 결재를 훅훅 해치운 패기(?)는 믿을 만한 서재생활자들의 '추천' 마크에서 비롯되었다. 나보다 눈썰미 있는 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좋아요!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란 믿음.

 

 

 믿음은 깨지지 않았다! 10꼭지로 깨알같이 구성된 이 책은 하루에 한꼭지씩 섭취하기 딱 알맞은 분량 이었다. '허삼관 매혈기'를 왜 읽다가 때려치웠을까 하는 후회가 머릿속에 가득했다. 나는 왜 이리 진득하지 못했던가. 노란색 표지의 이 책을 숄더백이 터지든 말든 가방에 넣어 다니며 틈날때마다 꺼내봤다. 그의 글은 생각했던 것만큼 학구적이지도, 어려운 말들을 줄줄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간 왜 위화의 글들은 어렵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아마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느낌을 그에게 덮어씌운 탓 인것 같다. 책에 등장하는 10개의 소재들은 각각 중국을 너무 잘 보여주는 소재였다. 특히 마지막 두 꼭지인 산채와 홀유는 중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정서를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하기 좋게 씌어진 꼭지 였다. 오! 이럴 수도 있다니 책장이 넘어가는 줄도 모르게 중국에 홀랑빠졌다. 이 사람들의 사고는 신기, 그 자체였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그의 생각은 '경고' 같았다. 언제 터질 지도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문제들을 품고 시간을 견뎌내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경고. 그의 시선 속에 중국은 따뜻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삐딱 했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속에 있는 듯한 느낌. 문화대혁명 이후의 빠른 경제성장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이 중국 사회 자체에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 더 진행되면 뭔가 '다른'일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 위화는 중국에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극히 단순한 언어와 차분한 이야기로. 그리고 그 단순한 이야기들에 푹 빠져 중국을 새로운 프레임에 넣고 보게 됐다. 이 작가는 정말 물건이구나! 정말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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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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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번 위대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 작품을 따라 어디론가 갔다. 겁 많은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그 작품의 옷깃을 붙잡고 그 발걸음을 흉내 내면서 시간의 긴 강물 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아주 따스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여정이었다. 위대한 작품들은 나를 어느 정도 이끌어준 다음, 나로 하여금 혼자 걸어가게 했다. 제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나는 그 작품들이 이미 영원히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04쪽

나는 웃음소리 속에 말로 설망하기 어려운 친밀하과 간절함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친밀함과 간절함이었다. 한동안 나는 이런 웃음소리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노래라고 생각했다. 그때 발견한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밤중에 세상을 떠났다.-107쪽

인생은 종종 이렇다. 때로는 단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장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장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단점이 되기도 한다. 마오쩌둥의 말을 빌리자면 "좋은 일이 변해 나쁜 일이 되고, 나쁜 일이 변해 좋은 일이 된다"라고 할 수 있다. 방금 한 농담을 계속하자면 나와 헤밍웨이는 마오쩌둥이 말한 것 중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한 경우에 속할 것이다.-136쪽

나중에 젊은이들이 종종 내게 묻곤 했다. "어떻게 해서 유명한 작가가 될 수 있었나요?"
나의 대답은 하나이다. 바로 '글쓰기' 덕분이었다. 글쓰기는 경험과 같다. 혼자서 뭔가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137쪽

지금의 나는 이미 27년이라는 글쓰기 경력을 갖고 있고 이제는 "나는 글쓰기를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일생을 통틀어 표현하고 싶은 무수한 욕망과 감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실제 현실과 개인의 이성과 지혜가 이를 억누르고 만다. 하지만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을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가 사람의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인생을 더욱더 완전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또한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두 갈래 인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현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의 길이다. 이 두가지 길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가 강대해지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내 현실에서의 삶의 길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것은 허구에서의 내삶의 길이 갈수록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147쪽

사실 삶과 글쓰기는 아주 간단할 때가 있다. 어떤 꿈 하나가 어떤 기억을 되돌리면, 그다음에는 모든 것이 변하고 마는 것이다.-157쪽

나는 루쉰이 아이들의 작가가 아니라 성숙하고 민감한 독자들의 작가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때때로 한 독자와 한 작가의 진정한 만남에는 어떤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나는 다른 작가들의 수많은 작품들을 읽었다. 위대한 작품도 있고 평범한 작품도 있었다. 나는 어떤 작가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당장 그 작가의 작품을 내려 놓는다. 그 작가를 싫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루쉰의 작품을 내려놓지 못하고 한 번 또 한 번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때문에 루쉰은 평생 내가 싫어했던 유일한 작가가 되었다. -183쪽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극단적으로 억압된 시대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반드시 극단적으로 방종하는 시대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그네를 타는 것처럼 한쪽 끝이 높이 올라가면 반대쪽 끝도 높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194쪽

혁명이란 무엇인가? 내 과거 기억 속의 해답은 온갖 주장들로 뒤죽박죽이었다. 혁명은 우리의 삶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채웠다. 한 사람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어떤 사람은 순식간에 하늘을 날았고 어떤 사람은 눈 깜짝할 사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유대도 혁명을 따라 수시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늘까지 혁명의 전우였던 사람이 내일은 계급의 적이 될 수 있었다. -252쪽

농민들은 절대다수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문맹이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류가 없어선 안되고 교류를 할 떄는 선물이 가장 중요한 매개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선물은 또 다른 유형의 언어, 즉 자기손실을 전제로 삼는 언어였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선물은 사랑과 찬미, 존경의 단어가 되었다.-265쪽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엄청난 담력을 갖고 있었고 뭔가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일도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속담으로 표현하자면 맨발인 사람은 신발 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고,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프롤레타리아인 그들이 잃을 것은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였다.-271쪽

그 뒤로 이 일을 회상할 때마다 언제나 마음이 괴로웠다. 나는 고통에 울부짖던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노동자들의 고통을 의식할 수 있었다. 나는 왜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기 전에 노동자들의 고통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노동자들과 아이들에게 예방주사를 놓기 전에 먼저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내 팔에 찔러보었다러면, 그리고 바늘에 달려 나온 나의 피와 살점을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아이들이 고통으로 울부짖기 전에, 노동자들이 극심한 통증을 못 이기고 신음하기 전에,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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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절판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발걸음을 재촉해 보아도 '저곳' 이라는 이상이 '이곳'의 현실이 되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은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만다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핍과 절박함 속에 머물게 되고 우리의 영혼은 사라져버린 활력소를 또다시 갈망하게 되는 게 아닐까.-43쪽

"우울증은 게으름과 무척 닮았습니다. 분명 그것은 게으름의 일종입니다.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게으름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견뎌 낼 힘을 비축하면 일이 순조롭고도 생동감 있게 진행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모든 활동에서 진정한 만족감을 발견하게 되겠지요."-49쪽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해를 입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죄악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죄악이 되지 않을까요. 하물며 각자에게 허락된 즐거움을 서로 가로채 가는 상황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지 않을까요? 우울증을 앓는 사람 중에 주위 사람들의 기쁨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아무런 내색도 않고 혼자 감내하는 위인이 있다면 어디 말씀해보세요! 우울증이라는 게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마음속의 불쾌감, 말하자면 자기모멸감 같은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바보 같은 자만심에서 비롯된 질투심과도 항상 연결되어 있죠. 그래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행복한 사람의 모습만 봐도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죠."-50쪽

하지만 사랑하는 친구! 내 한마디만 더 하겠네. 세상일이라는 게 흑백논리로 결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네. 매부리코와 사자 코 사이에도 높이와 모양에 따라 수많은 단계가 있듯이 인간의 감정이나 행동방식에도 다양한 명암이 존재한다네.-66쪽

"인간의 본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네."어느 정도까지는 잘 견뎌내던 기쁨, 슬픔, 고통 같은 감정들은 어떤 한계를 넘는 순간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사람이 강하다든가 약하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어느 한도까지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윤리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 모두에서 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을 비겁자로 여기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악성 열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부적절하니까요."-73쪽

모든 것이 다 스쳐지나갈 뿐인데도 자네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까닭에 존재하는 데 필요한 기력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 아! 거센 물결에 휩쓸려 가라앉았다가 바위에 부딪혀 깨져버리고 마는데도 말인가?자네과 자네 주위의 사람들을 소진케 하지 않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고, 또 매 순간 자네는 파괴자이며 파괴자가 되지 않을 수 없네.-80쪽

분명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과 비교하고, 또 반대로 우리 자신을 다른 것과 비교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와 관련된 대상에 달려 있는 것 같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고독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해야겠지.(중략) 반면에 우리가 아무리 약점투성이 존재이고 넘어야 할 난관이 많다고 해도 오로지 앞을 향해 나아간다면, 느린 걸음일지언정 돛을 달고 노를 저어가는 사람들보다 멀리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등하지거나 그들보다 앞서 나감으로써 진정한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게 되는 걸세.-94쪽

사실 지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최고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보 같은 인간들이지! 왕은 장관에게, 그리고 장관은 비서에게 휘둘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는 자는 누구인가? 내가 보기에는 상대방의 모든 면을 파악한 후, 그들의 힘과 열정을 제 계획을 실현하는 데 발휘하도록 하는 역량과 책략을 가진 사람일세.-99쪽

그렇다네. 나는 그저 나그네에 불과해. 세상을 떠도는 순례자에 지나지 않지. 그런데 자네들은 그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하는가?-115쪽

나만 이 모양으로 사는 건 아닐 테지. 모든 사람이 희망에 속고 기대에 배신당하게 되어 있으니 말일세.-117쪽

그러고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네. 현실을 직시하라! 이 집에서 너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너의 두 친구들은 너를 존경한다. 너는 가끔 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며 네 마음도 그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거라 느낀다. 그런데 이제 네가 떠난다면, 네가 이들과 이별하게 되면? 그들은 너를 사실함으로써 운명 속에 생겨난 공허감을 얼마나 오랫동안 느낄 것인가? 대체 얼마나 오래? 아, 인간이란 이처럼 덧없는 존재라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에서도, 자신의 현존에 대한 유일하가도 참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곳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과 영혼 속에서도 인간은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사라져버려야만 하네. 그것도 순식간에!-129쪽

"자네는 구제받을 수 없네, 불쌍한 인간아!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네."-150쪽

"그녀의 존재와 운명, 그리고 내 운명에 대한 그녀의 연민이 다 타서 눌어붙은 나의 머리에서 마지막 남은 눈물을 짜내고 있네.
장막을 걷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걸로 모든 것이 끝이야!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주저하고 망설이지? 장막 뒤의 모습이 어떨는지 모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영영 되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인가? 그 무엇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곳에는 혼란과 암흑만 있을 거라 지레짐작하는 것이 우리 인간 정신의 특성이겠지."-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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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구판절판


나는 그녀가 말하는 상식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과거가 단일한 게 아니라 여러 개다. 가족이 기억하는 유년과 친구가 기억하는 유년과 자신이 기억하는 유년이 모두 다르리라. 그러므로 그들은 그중에서 가장 합당한 과거를 선택하면서 지금의 자신에 이르렀으리라. 이치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따지는 건 그렇게 선택할 수 있는 과거가 여러 개인 사람에게나 가능하지 않을까? 돈이 없어서 며칠동안 굶고 다닌 사람에게는 길에 굴러다니는 동전 한 닢도 너무나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단 하나의 과거도 없는 내게는 아무리 터무니없고 불합리하며 비이성적일지라도 사소한 단서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하찮은 사실 하나를 지키기 위해 상식적 세계 전체와 맞서야만 하는 순간도 찾아오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49쪽

진심 같은 단어를 입에 담는 내 모습은 스스로도 좀 낯설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이야기의 진실을 찾아 어둠의 핵심까지 들어가는 캐릭터를 볼 때마다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저들은 왜 저토록 간절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것일까? 공익을 위해서? 스스로 충만한 삶을 원하니까? 공명심 때문은 아닐까? 이제 내가 그런 입장이 되어보니 중요한 건 진실 그 자체이지, 개인의 삶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그들의 욕망은 진실의 부력일 뿐이다. 바다에 던진 시신처럼, 모든 감춰진 이야기 속에는 스스로 드러나려는 속성이 내재한다. 그러므로 약간의 부력으로도 숨은 것들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진실은 개개인의 욕망을 지렛대 삼아 스스로 밝혀질 뿐이다.-101쪽

"그랬다면 내 마음은 제일 안 좋았겠네요. 예전에 어떤 소설을 읽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오더군요. 진실은 매력적인 추녀의 얼굴 같은 것이라 끔찍한 게 분명한데도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욕망이 든다면, 그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다. 누구도 자기 인생의 관광객이 될 수는 없잖아요? 여긴 나의 고향이에요. 어떻게 해도 내가 태어난 곳은 진남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 온 거예요. 25년 내내 그 사실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 사실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러니 어떤 진실이든 그건 나의 진실이고, 나는 그 진실의 마지막 한 방울 까지 모두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어요."-104쪽

지나가면, 우리는 조금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 조금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겠지.-146쪽

하지만 개인의 불행은 건기나 우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곳 방글라데시에서 저는 수많은 개인사적인 불행을 만났습니다. 불행이란 태양과도 같아서 구름이나 달에 잠시 가려지는 일은 있을망정 이들의 삶에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를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이들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온몸으로 껴안을 때, 그 불행은 사라질 것입니다. 신의 위로가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그 길뿐입니다.-148쪽

아름다움이란 솜씨의 문제이고, 솜씨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라는 걸. 그렇구나. 괴로웠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글을 쓰는 것이고, 행복했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157쪽

"저는 소문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들여다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럴때조차도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모르는 바보들이니까요. 저는 자기 마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그 무지한 마음이 무서울 뿐이죠."-190-191쪽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리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 진다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201쪽

너는 망각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는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던 니체의 말을 떠올린다. 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인간은 잊을 수 있어서.-229쪽

"제 영화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상징은 날개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류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 하늘을 날 수 없는 생각도 없었을 테지요."-274쪽

그런데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 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게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결정적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니 한 번의 삶은 너무나 부족하다.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다.-285쪽

그 말을 생각하면 우리라는 존재는 한없이 하찮아진다. 한 소녀가 최선을 다하기 위해 어둠 속을 달리던 그 새벽에 우리는 숙면에 빠져 있었으니까. 깨어난 뒤에야 우리는 거기에 붉은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불길은 우리를 태우지 못했고 그 연기는 우리를 질식시키지 못했다. 거기 고통과 슬픔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고통과 슬픔이었다.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은 고통스럽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우리와 그 아이의 사이에는 심연이 있고, 고통과 슬픔은 온전하게 그 심연을 건너오지 못했다. 심연을 건너와 우리에게 닿는 건 불편함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불편한 감정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그럴 수 밖에. 그때 우리는 고작 열여덟 살, 혹은 열아홉 살이었으니까. 우리는 저마다 최고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으니까.-286쪽

우리는 이제 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다는 걸. 그렇다면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일들은, 사랑했으나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그가 수집하고 싶었던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일어날 수도 있었던, 하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들려주는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오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진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고 빛바램과 손때와 상처와 잘못 그은 건 같은 것만 보여줄 뿐인 물건들.-287쪽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우리는 그 일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있다. 모든 균열은 붕괴보다 앞선다. 하지만 붕괴가 일어나야만 우리는 균열의 시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붕괴가 일어난 뒤에야 최초의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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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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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뒷 단은 김영하 작가의 소설 제목으로도 쓰였던 이 구절. 프랑수아즈 사강이 남긴 말이다. 흘려만 듣던 사강을 처음 접한 건 백영옥 작가의 장편소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였다. 심상치 않았던 주인공 윤사강의 이름에서부터 소설 내내 등장하는 「슬픔이여 안녕」까지. 현재 읽고 있는 한 책에서 다음에 읽을 책을 '꼬리물기' 하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선 딱 알맞은 떡밥 이었으나,「슬픔이여 안녕」번역판의 비주얼이 너무 '구린' 탓에 그냥 잊고 살았다. 그러다 배우 신세경의 인터뷰 기사에서 발견한 '괜찮은' 이 아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만나게 되었다. 가끔 어떤 책을 읽게 되는게 '만나다'는 동사와 참 어울리는 그런 책들이 있다.  

 

 

 - 이건 정말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일까? 시간이 만든 습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까.

 

한번의 이혼경력이 있는 서른 아홉의 폴은, 로제와 안정적인 연애생활을 이어 나간다. 안정적이지만 '뭔가 빠진듯 한 연애'.

폴은 가슴 깊숙히 박이는 고독감을 안고 산다. 로제 또한 폴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더 '안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외려 무시한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보다 그는 혼자 거리를 걷고, 배회하고 또다른 늦은 밤의 기회들을 찾아 나선다. 그들의 연애는 시간이 만들어준 안정에 기대어 있었다. 어느 순간 찾아온 틈에 끼어든 것은 스물 다섯의 청년 시몽. 그는 폴에게 빠져 적극적인 '수작'에 나선다. 로제와의 고독한 관계에 힘들어 하던 폴은 조금씩 시몽에게 마음을 열어 로제와의 관계를 정리하려 하지만 결국엔 시몽에게서 돌아서 버린다.

 

로제와 폴은 다시 만나며 '당신이 없어 참으로 불행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며 다시금 예전의 안정적인 관계로 돌아간다. 폴은 로제의 품에 안기며 구원받은 느낌을 받지만, 아울러 다시 길을 잃은 듯한 느낌 역시 찾아온다. 로제는 다시 안심하고 그녀를 혼자 둔다. 결국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간이라는 습관에 기댄 그들의 관계는...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하지만 시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저녁 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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