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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죽는다
마르셀라 이아쿱 지음, 홍은주 옮김 / 세계사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사랑하면 죽는다.’ - 그래도 사랑하라.
보다시피 난 뚱뚱합니다. ... ... (달콤한 음식이) 술이나 담배보다 몇 배 비싼 값을 치른 마약일 겁니다. 예쁜 여자들은 한 번도 날 상대해 준 적이 없었어요. 섹스의 기초를 배우기 위해 난 창녀들을 사야했죠. 집사람도 뚱뚱했어요. 우린 <비만 남녀를 위한 발언 그룹>에서 만났고 서로 마음에 들었어요. 아시겠어요? <마음에 들었다>는 말의 의미를? 뚱뚱한 사람들이 속한 폐쇄적 세계에선 사랑이란 체지방 수치가 낮은 사람들한테나 열린 시장이란 게 정설입니다. 우리 같은 뚱뚱이들은 정상적인 몸매를 가진 사람들을 마치 쇼윈도 너머에 있는 것처럼 바라보죠. 그들은 유령처럼 껴안을 수 없는 존재란 걸, 은막의 스타처럼 접근 불가능한 존재란 것쯤은 잘 압니다. 우린 반은 체념한 상태로, 좀 원통하긴 하지만 서로 딱 맞는 짝이란 데 합의했죠. (P. 31~32)
어릴 적 즐겨보던 만화나 동화책에서 가장 고귀하고 강하며 아름다운 것은 두말 할 것 없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죽어가는 연인을 눈물 몇 방울로 다시 살릴 수도 있었으며, 거대하고 힘센 로봇들을 앞세워 격렬하게 싸우다가 악당들의 힘 앞에 지구 전체가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다가도 어디선가 모아진 사랑의 힘 덕분에 지구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 사랑은 얼마나 강렬했던가? 순수했으며 아름다웠고, 그러했기에 어린 나의 가슴을 달뜨게 만들었다. 그 강렬했던 느낌은 성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사랑만이 그 절망 속에서 나를 구해줄 것이라 믿었다. ‘사랑’이 말이다... ... .
책속의 책이라는 구조와 심리소설이란 색다른 타이틀을 앞세운 ‘사랑하면 죽는다.’는 나의 그 지고지순한 사랑의 믿음을 저버리는 책이다.
정신의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장 뤽 자메 교수는 의사로서의 직업윤리를 저버리면서 까지 자신이 그간 만나온 억압적인 사랑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이 피폐해 진 환자들의 임상증례를 바탕으로 책을 쓴다.
책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불구가 되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며, 사랑 때문에 매춘을 하기도 하며, 사랑 때문에 전 재산을 날리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며, 사랑 때문에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기도 하며, 사랑 때문에 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쉽게 말해 사랑으로 인생 종 친 사람들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아... 충격적이다. 어찌 그 아름답고 귀한 사랑이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 된 당시에 프랑스 출판계에서도 이 작품에 대해 상당히 논쟁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저자를 향해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해 봤을 거라든가 <학대자>같은 사람한테만 걸려들었을 거라는 비난까지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초자연적인 부분만 제외하고 본다면 충분히 우리 주변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제까지는 사랑의 밝은 면만을 부각해서 우리가 보아왔다면 이 책은 사랑의 어두운 부분을(읽는 이들이 다소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직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랑도 기쁨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에... ... . 오죽하면 애증(愛憎)이란 말이 생겨났겠냐 말이다...
사랑은 개인들 사이에 강한 불균형을 창출한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으레 한쪽의 사랑이 더 크게 마련이다. 그건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도 찬찬히 뜯어보면 어디가 달라도 다른 것처럼, 동일한 강도로 서로에게 집착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도 그 사실을 즉각 감지한다. 이별의 가능성이 상대를 어느 정도 두렵게 만드는지 안다는 소리다. 덜 사랑하는 쪽은 상대가 자기보다 몇 곱절 이별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미칠 지경이란 것을 눈치챈다. 마음속에서 이별을 감행할 수 있는 쪽이 지배자가 되고 다른 쪽은 노예가 된다. 이 균열을 비집고 한 쌍의 연인에게 공포가 닥친다. 덜 사랑하는 쪽은 처음엔 단순한 허영심이나 장난으로 더 사랑하는 쪽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두 사람의 삶이라는 소박한 공간의 절대적 지배자란 사실을 실감하기 위해 가능한 범위 안에서 조그만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한다. 달리의 말을 빌리자면. '사랑은 복슬개가 뛰어다니는 범위의 독재이다.' 이 놀이에서 빠져 나오기는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하다. 그 사랑이 더 사랑하는 쪽, 즉 먹이가 된 쪽은 가혹한 공격을 견딘다. 먹이는 은밀한 증오심을 품기 시작하지만 이내 죄의식을 느끼고, 참고, 상대에게 더욱 복종한다. (P. 45~46)
책의 곳곳에서는 아주 날카로운 지적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위에서 인용한 부분도 그 중 하나이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우리의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결코 죄가 될 수 없음에도 사랑의 우월성을 이용해 상대를 핍박하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다. 결혼을 빙자해 금품을 뜯어내려는 부류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억압하고 피를 말리는 스토커 등등은 뉴스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 않는가?
그런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연인을 하인 부리듯 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확인을 받으려는 사람. 밀고 당긴다는 표현으로 상대를 기다리게 하고, 아프게 하는 사소한 일들이 연인들에겐 다반사가 아니던가?
아니 주위를 탓하기 이전에 나부터도 그런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주진 않았는지 반성해 볼일이다. 그가 나를 더욱 사랑함으로 인해서 받는 쓸쓸함 같은 것들을 어찌 다 알 수 있었으랴... ... .
‘사랑하면 죽는다.’는 분명 파격적인 소설임에 틀림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이거나 오랜 역사속에서 검증되어 온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이 책은 어떤 이에게는 반감을 가져올 수도 있고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치부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생각할 여지가 있는 좋은 책임에는 틀림없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순간에도 사랑은 서로를 아프게 할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아픔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 그 자체는 영원할지 모르지만 그 대상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갈수도 있고 그 때문에 어떤 이는 사랑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할 것이며, 사랑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시인도 생겨날 것이리라.
‘사랑하면 죽는다.’
하지만 그 모든 아픔과 시련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우리들은 또 다시 사랑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죽음마저도 감수하게 하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그것을 만난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사랑하며, 아직 그 것을 찾지 못한 이들은 그것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사랑하다 죽어버리려고 말이다.
그러므로 대중을 시장원리에 복종시키려면 뭐니뭐니해도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공권력은 대중이 이 세상의 문제점을 들춰내지 않고 잠들어 있기를, 욕망과 꿈에 떨면서 몽롱하게 취해있기를, 군소리 없이 사랑을 따르는 것처럼 다른 압제와 모욕도 얌전히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이용해 알토란같은 이득을 챙기는 쪽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세계화 된 자본주의 세력일 것이다. 대기업과 은행과 영화 산업 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기분 좋게 들떠 있고, 인생이 장밋빛인 줄 알고, 뭐든지 받아들이고, 어떤 희생이라도 개의치 않으며 자기 자신조차도 잊어버리는 법이다. 설령 사랑이 종말을 맞는다 해도 그의 기억과 꿈은 기다리라고, <언젠가는 틀림없이 또 그런 일이 찾아올 것>이라고 속삭인다. 귀를 간질이는 그 한마디로 인해 우리는 참고 따르는 것이다.
세계화 된 자본주의 세력이 감언이설로 가지가지 소비행위를 부추기고, 한심한 영화들에선 <사랑>이 이긴다. 덕분에 관객들은 영화 속 주인공과 똑같은 일이 자기들한테도 벌어질 거라고, 뚱뚱하거나 못생겼거나 가난하거나 멍청할지언정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이다. 소박하건 열렬하건 지독하건 허망하건, 저마다 제 몫의 사랑이 있다는 논리에 박수를 보내면서. (P . 86~87) - 사랑에 대한 독특하지만, 일견 수긍이 가는 해석.
* 역자가 책의 마지막에서 밝혔듯이 ‘서문’에서 좀 헷갈리시는 분은 일단 패스하시고 책을 다 읽으신 후에 읽으셔도 좋을듯합니다. 제 경우엔 열 페이지 남짓의 서문을 읽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번역도 매끄럽지 못한 듯 하고 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읽으시면 오히려 온전한 감상을 방해 할 수도 있을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