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나랑 노랑 - 시인 오은, 그림을 가지고 놀다!
오은 지음 / 난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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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당신은 이런 날을 기다려왔다. 푹푹 찌는 날씨. 뻔한 일주일. 지친 당신은 ‘레드망고’로 향한다. 누구와 함께 온 것이 아니므로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 배려할 필요가 없다. 종업원의 추천 토핑도 한 귀로 흘려버려라. 먼저 ‘화이트’로 된 요거트 아이스크림이 그릇에 담긴다. 멜론과 키위의 ‘그린’도 좋지만 한적한 오후 녹차가 가진 ‘그린’도 나쁘지 않다. ‘블루’베리를 한 알씩 씹으며 먼 나라를 떠올릴 수도 있다. 사과를 ‘레드’로써 넣을 것인지 ‘옐로’로써 넣을 것인지는 당신의 몫이다. 이것들을 섞어도 좋고 따로따로 음미해도 좋다. ‘블랙’수트를 입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당신. 당신의 감정에 따라 오늘을 다양한 색과 맛으로 기억할 것이다.

 

  오은의 『너랑 나랑 노랑』은 색깔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이다. ‘색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깨달았을 때, ‘오해’된 색깔들은 오히려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불길하고, 탐욕적이며, 포악한 것이 ‘레드’지만 불안한 우리를 꿈틀거리게 하는 에너지 또한 ‘레드’다. 에밀 놀데 <촛불 무희들>의 두 여인은 ‘붉게, 붉게 더 붉게! 댄스, 댄스, 더 댄스!’를 외친다. 촛불과 동화되어 ‘내면의 레드를 모조리 뽑아내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녀들의 춤을 보며 오은은 말한다. 불안하면 어때? 위태롭게 폭발하는 힘. 그게 ‘레드’잖아?

 

  오은이 붙인 소제목과 그림에 들어가 자유롭게 풀어내는 그의 개성 있는 이야기에 빠져들기 전에 나는 나 나름대로 그림들을 오해해보기로 했다. 왼쪽 페이지의 그림을 보고 그림의 제목과 내용을 상상해보는 일이었다. 메리 커셋 <파란 안락의자의 소녀>는 약간 따분해 보이는 소녀와 잠든 애완동물이 있는 풍경이다. 큰 느낌 없이 가벼이 넘긴 그림이었는데, 오은의 이야기를 보고 적잖이 놀랐다. 소녀가 ‘코발트블루’를 꿈꾸는 것도, 소녀가 메리인 것도, 성장한 소녀가 ‘블루’를 그리며 ‘블루’에 젖는 것도 신선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림을 펜촉에 찍어 글을 쓰는 느낌. 방심할 수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색깔로, 점점 흥미진진해졌으므로.

 

  낯선 그림들 속에서 나는 모리스 위트릴로 <파리의 골목>이 주는 ‘화이트’에 독특한 인상을 받았다. ‘화이트’지만 결코 밝지 않았고, 그렇다고 마냥 우울한 것도 아니었다. ‘따듯한 멜랑콜리’라는 소제목만큼 적절한 게 없어 보였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는 정말 다양한 기분이 떠오르게 하지만, 그것들을 글로 옮기는 게 가능할까 라고 생각해왔다. 남자와 여자. 금빛으로 반짝이는 이미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오은의 말빨은 ‘색깔’도 말을 하게 만든다. 남자와 여자를 장식 취급하는 ‘옐로의 경우’가 있는 것이다. 남녀보다 더 부각되고 싶은 ‘옐로’. <키스>를 다시 보았다. 더 이상 몽환적이고 아름답기만 한 그림이 아니었다.

 

  에드바르드 뭉크 <키스> 또한 ‘블랙’을 실감하게 한다. 우리는 어둠에 빠지면 불안하지만, 반대로 완연한 어둠은 차분하게 또는 서서히 잠들게끔 만든다. ‘블랙’은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서서히 들어온 어둠은 ‘나’를 대변한다. 바깥에서 어떤 ‘블랙’이 강하게 밀려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른 개의 ‘맛’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떤 날은 ‘블루’와 ‘옐로’를, 또 어떤 날은 ‘화이트’와 ‘그린’과 ‘레드’를, 어떤 날에는 더 진해질 수 없을 만큼 진한 ‘블랙’에 젖고 싶을 거라고. 개성 있는 그림들에 오은의 말솜씨가 더해져 내게로 번져 들어온다. ‘코발트블루라고 말할 때 내가 아콰마린을 떠올’렸을지도 모르지만, ‘코발트블루’를 통해 온전히 ‘블루’를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은이 풀어놓은 ‘컬러’를 맛보고 싶을 때에는 필요한 만큼 찍어서 원하는 만큼 맛보면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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