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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평점 :
- 알고 있는지. 나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 진실하지 않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
장미의 왕자, 3쪽
위에 적어둔 문장은 그 갈색수첩 속에 있는 한 문장으로, 찻집에서 일하는 '나'에게는 그것이 운명이 보내온 암시로 받아들여진다. 나는 저 문장이 이 소설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읽으며, 언뜻 보기에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람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흐름이 너무나 부드러웠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연결고리가 여자 손님, 그리고 회사원 '나'를 떠난 그녀의 갈색수첩이란 것도 매우 흥미로웠다. 또 가슴이 쓰렸다.
찻집에서 일하는 주인공 '나'는 장미의 왕자가 장미를 잃어버리게 될지라도 그가 사랑한 소녀 역시 그의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기를 원하지만, 정작 그것이 이 세상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단언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 받기를 원하면서도, 타인의 장미만을 사랑해버리는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 현 시간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 속에서 장미는 뭔가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다른 걸 감춰주는 것이며, 결코 내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장미는 '영지' 내에서만 시들지 않고 빛을 발하며, 영지를 떠나면 곧 시들어버리고 마는 제한까지 가지고 있다.
소설 속 또 다른 주인공인 회사원 '나'는 자신의 영지를 벗어나 '그녀'를 사랑하지만, 이내 그녀가 떠나고 다시 자신의 영지에 남아, 그를 감싸고 숨겨버리는 수트 속에 갇혀버린다. 상실에 익숙하다고 말하지만, 깊은 상실 속에 어쩔 줄 몰라하며 감당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기에 최선인, 상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상실의 대처법이 아니다. 그저 회피일 뿐이다. 본인도 알지만, 그는 그 외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
소설 속에서 장미의 왕자 이야기를 접했을 때, 나는 과연 마녀가 내린 것이 저주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녀가 한 저주는 요정들이 준 축복이 마녀의 장미가 왕자의 곁에 있을 때만, 그것도 영지 내에서만 효과를 발하는 것이었지, 왕자 본인을 흉측하게 만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어째서 저주가 되어버린 걸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내 모습으로 살아가기 두려워서 생긴, 왕자의 욕심이 불러온 비극 같았다. 왕자의 본모습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가 나온다. 한마디로 흉측했다. 하지만 그게 왕자의 본모습이다. 축복으로 꾸며진 모습이 아닌, 저주받은 것도 아닌, 그냥 왕자의 본모습.
소설 속 두 주인공은 자존감이 낮으며, 그렇기에 타인에게 '자신'은 사랑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상실을 두려워하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한다. 그렇지만 내면 속의 깊은 외로움과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매우 뜨겁고 강렬하며, 그것이 그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자신의 본모습을 나는 사랑할 수 없고, 나 역시 남의 본모습을 사랑해줄 수 없지만, 남은 사랑해주길 바라는 비겁한 마음.
은희경 작가의 이번 단편집 중국식 룰렛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는 문구가 있다.
'뜻밖의 운명을 향해 가는 나를 숨기는 진실게임, 중국식 룰렛-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운한 일들을 기다리며 매일밤 우리는 라벨이 가려진 위스키를 마신다.'
우리는 나를 숨긴 채, 라벨이 가려진 위스키를 '매일 밤' 마신다. 그것이 어떤 위스키인지 알지 못하고,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마신다. 두려움과 호기심, 또 기대감을 안고 마신다. 나는 이게 결국 사람과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를 숨기고, 서로를 마주한다. 그리고 사랑해주길 바란다. 언젠가 바람이 불어 내 영지 밖으로 장미를 가져가버려 내 흉측한 본모습이 보일지라도, 그 모습을 사랑해주길 바란다.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라벨이 가려진 위스키를 마셔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랑에 빠지며, 사랑을 받으며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의 인생을 관통하는 그 모든 사랑 속에서, 우리는 과연 상대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상대의 장미일까, 상대의 본모습일까?
은희경 작가의 중국식 룰렛, 그 안에서 그녀가 보여줄 이야기가 너무나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