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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도 너무 길다 - 하이쿠 시 모음집
류시화 옮겨엮음 / 이레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한 줄도 너무 길다』하이쿠 시 모음집, 류시화 엮음, 이레, 2000
6월 둘째 주 토요일이었다. 그날은 토요 휴무일이었다. 전날 갑자기 산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토요휴무일. 사실 쉬라고 생겨난 휴무일인데 어쩐 일인지 이런 저런 행사로 사실 더 바빠진 것 같다. 현대인에게 편히 쉬라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나보다. 그래서 쉬라는 토요일에도 무엇인가 특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해야 안심이 되는 교육청, 흡족해 하는 학교이다.
어쨌든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반 아이들에게 모두 문자를 보냈다. 휴대폰이 없는 학생에게는 부모님께 보냈다. 내일 산에 가고 싶은 학생들은 아침 6시까지 어디로 나오라는 문자를. 그랬더니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는지 세 명 정도만 나온다는 연락이 왔다.
내일 새벽 아빠가 산에 간다니까 초등 5학년에 다니는 딸이 저도 같이 간다고 그런다. 아침 일찍 나서야 하는데 너 일어날 수 있어? 하니까 자신 있게 그러엄! 한다. 그리하여 첫 주말 산행을 가게 되었는데 이럴 수가, 우리 부녀 외에는 아무도 나오지를 않은 것이다.
처음이니까,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마음의 준비가 안 된 탓이었다. 조금은 실망하는 마음을 안고 딸과 함께 새벽산에 오르는 길은 정말 크나큰 기쁨을 주었다. 남원에는 양림단지라고 하는 곳에 덕음봉이 있다. 덕음봉 정상 부근에는 덕음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남원 시내 어디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에 오르는 길이 처음에는 자못 그럴 듯하여 땀도 어느 정도 솟아나게 하는 귀여운 산이다. 그래서 남원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산이다.
나는 어디에 갈 때 꼭 책을 갖고 다니는 습성이 있다. 은행이나 미장원에 가서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책을 읽는다. 그래서 간혹 책이 없을 때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어떤 때는 어느 정도 기다리는 시간이 생겼으면 하고 책을 갖고 갔는데 대기 시간이 없이 바로 일처리를 하게 될 때 조금은 서운한 생각까지 들 때도 있다.
그 날 나는 서가에서 눈에 띈 책 『한 줄도 너무 길다』이 책을 배낭에 챙겨 갔다. 산에 오르면서 쉴 때 이 책을 꺼내어 읽으니 딸이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읽어 보라고 넘겨주었더니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며 읽는다.
하이쿠에는 자연에서 보는 매미, 뻐꾸기, 나비, 나방, 새 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산에서 이 책을 읽게 되면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듯 하다. 결코 쉬운 시가 아니지만, 초등학생이 읽기에도 부담이 없는 아주 짧은 형태, 그리고 뭔가 깊고도 순간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하이쿠의 세계에 들어서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딸이 재미있게 읽은 하이쿠 몇 편을 소개한다.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 어, 다시 올라가네 / 나비였네! (모리다케)
얼마나 운이 좋은가 / 올해에도 / 모기에게 물리다니! (이싸)
달에 손잡이를 매달면 / 얼마나 멋진 / 부채가 될까? (소칸)
높은 스님께서 / 가을 들판에서 / 똥을 누고 계신다 (부손)
뻐꾸기가 밖에서 부르지만 / 똥 누느라 / 나갈 수가 없다. (소세키)
불을 피우게 / 그러면 내가 멋진 걸 보여 줄 테니, / 눈뭉치! (바쇼)
하이쿠는 원래는 한 줄짜리인데 류시화 시인이 번역 편집하면서 석 줄로 배치하였다. 위의 작품들이 각각 독립적인 하이쿠이다. 얼마나 순간의 번뜩이는 재치인가? 산에 올라 이런 시들을 읽으면서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면 얼마나 마음이 따사로워질 것인가?
위의 하이쿠 중에 특히 소세키의 작품은 이런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정치인의 초대를 받고 답장으로 쓴 시’라는 것이다. 이 설명을 읽고 위의 작품을 다시 읽어 보라. 얼마나 통쾌한 답장인가! 물론 이 작품이 우리더러 정치 혐오증에 빠지라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정치인의 초대를 뻐꾸기가 부르는 것으로, 게다가 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똥 누는’ 일로 나가지 못하겠다라고 한다. 이것은 대단한 희극적 변용이자, 자기 철학에 대한 자부심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력한 연줄에 닿아보려고 노력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사람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지만 참으로 신선하고도 청량한 느낌을 준다. 한 편의 시가 세상을 바꾸기엔 역부족일지 모른다. 그러나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고 깊이 있는 시들을 읽게 된다면 세상이 바뀌기 전에 그 시를 읽는 그 사람이 바뀌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면 결국 세상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바뀌게 되어 결과적으로 세상도 바뀌리라는 믿음이 든다.
이 날 새벽에 나는 산에서 아름답고도 시원하게 노래하는 새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서 나도 다음과 같은 하이쿠로 시늉하여 보았다.
산에 가기로 약속한 사람들 / 아무도 나오지 못 했어도 / 산에서 만난 수많은 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