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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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오늘의 거짓말-삼풍백화점>은 일상적이면서 수다스럽다. 자유롭게 쇼핑하는 백화점, 그리고 그 안에서 주인공과 친구들이 수다를 나누는 일상의 이야기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삼풍백화점’은 그 자체로 무거운 주제다. 덕분에 마음도 무거워 진다. 신나게 수다를 떨다 어딘가 예상 못한 기습 공격을 받은 것 같은, 매우 오묘한, 그러한 느낌이 든다. 뭐야, 난 이런 슬픈 일 떠올리며 살고 싶지 않다고. 제목 보고 알고 있었어야지. 작가에게 핀잔을 듣는다. 그래도 비극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일상 속에서 비극은 언제나 완벽하게 내 삶을 빗겨왔고,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란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매일 아침, 신문과 TV는 우직하게 세상의 비극들을 나에게 밀어 넣는다. 평범한 일상에 비하면 마치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 사건들은 점심시간이면 시간을 때우는 적당한 가십거리로 이용당할 뿐이다. 그런 순간이 올라치면 입을 꾹 다문다. 그래야 그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또 이렇게 해야 내가 '착한사람'으로 불릴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착한척증후군도 한 몫 했다. 비극의 기억은 남은 사람들의 앞으로의 삶을 슬프게 하거나 두렵게 만들뿐이라는 논리까지 거들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이게 솔직한 심정이면서도, 어설픈 동정심 따위는 하지 말자는 허울 좋은 이기주의,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자-. 비극을 대하는 내 모습이다. <삼풍백화점>의 수다는 그런 나를 신문과 TV들처럼 비극 앞으로 확 끌어냈다.

 

 비극을 직접 마주한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꽤 노릇노릇 숙성된 괴로움 덕에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거나 밥을 먹다가 경미한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친 건 아니었으니 나를 피하지는 말자.) 아무튼 이런 일이 지속되고, 결국 끔찍한 사실들이 온전히 내 것이라고 느낄 때 즈음 나는 자꾸만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해서는 안 되는 상상력을 발동시키곤 했다.

 

 한심한 망상속의 어느 날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던 길에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올랐다. 내 앞에 선 어떤 이가 어깨에 큰 가방을 메고 있었다. 가방은 끄트머리가 뒤에 서있던 내 코끝에 올 만큼 무식하게 컸다. 건들기만 해봐라, 하고 혼자 으르렁 거리고 있을 때, 가방 지퍼 끝에 달린 아주 조그마한 노란 리본이 보였다. 이 작은 리본이 내 상상력을 순식간에 다른 쪽으로 돌렸다. 누가 널 기억이나 할 거 같아? 노란 리본이 날 비웃는 듯 했다. 수학여행 가던 꿈 푸른 학생들을 통째로 빠뜨려도, 그래도, 잊혀 진다-. 이 소름 끼치는 사실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짧은 순간 나는 작은 리본을 통해 잊었던 비극을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그 때 평소 내 생각과는 달리, 비극을 마주하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 삶의 의지를 강력하게 불태우게 만들었다. 얼마나 지속될지 의문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완벽히 유효하다.


 최소한의 책임, 최소한의 마음, 최소한의 행동. 그건 일상의 수다 속에서조차 비극을 담아두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비극이 시작조차 않도록 모두가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여전히 비극은 도처에서 시작되고 있고 어쩌면 우리를 간신히 빗겨가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극을 잊어버리는 건 나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매순간 비극들을 인식하며 사는 것도 이상하지만 매순간 잊어버리는 것도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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