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4대 희극 - 개역판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이태주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여름밤의 꿈>

 

 짝사랑 하던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샤프로 연습까지 하고 펜으로 꾹꾹 정성껏 적었지만 편지에는 내 감정의 반의반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많이 좋아했거나 머릿속에 든 단어가 적었거나, 아무튼 답답한 와중에 책꽂이의 ‘셰익스피어의 4대 희극’이 눈에 들어 왔다. <한여름밤의 꿈>을 펼치고 나는 몇몇 구절을 무릎을 탁 치며 편지 끄트머리에 옮겨 적었다. 내가 이런 걸 적었다니 정말 미쳤던 건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오글거리는 짓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지구에서 가장 진지했다. 내 마음을 표현해 줄 언어를 만들어준 작가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만족스럽게 편지의 대미를 적어 내려갔다. 하지만 편지의 도착을 시작으로 사랑의 꿈은 떠내려갔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랑이 마법의 꽃물로 이루어지는 위대한 기적은 책 속에만 남았다. 현실은 마법의 꽃물보다는 쓰디쓴 소주였다.

이때 나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글이든 말이든 마음을 표현할 때는 반드시 독자와 청취자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독자나 청취자가 될 의향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 상대방이 내 말과 마음을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땐 차라리 조용한 게 낫다. 그래도 표현 못해서 죽을 정도라면, 죽지 않을 만큼 표현해 버리는 게 낫긴 하겠지만. 답답한 마음으로 표현할 말을 도저히 찾지 못할 때 <한여름밤의 꿈>을 본다면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에서 마구 떨어지는 선물 꾸러미를 뜯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물론 꼭 사랑 타령이 아니더라도 <한여름밤의 꿈>은 이야기 자체에 유희가 가득해 언제 읽어도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디미트리어스와 라이센더라는 두 남자가 허미아를 동시에 사랑한다. 또 디미트리어스는 오직 허미아를 사랑하지만, 헬레나는 디미트리어스를 사랑한다. 오직 허미아와 라이센더만이 서로를 사랑한다. 꼬여버린 이들의 사랑은 요정들의 장난으로 한 번 더 꼬인다. 두 남자가 순식간에 허미아가 아닌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요정 : 여인을 제 곁에 눕히지도 않고. 요녀석. 단단히 혼 좀 나라, 네 눈에 마술의 꽃물을 발라주마. 네놈이 깨어나면 그때부터 두 번 다시 잘 수 없는 상사병이여. 그때까지는 잠재워 두자.

라이센더 : (깨어나며) 당신을 위해서라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겠다! 투명한 헬레나! 이것은 자연의 마술이다. 디미트리어스는 어디 있는가? 아, 얼마나 더러운 이름인가, 그 이름은.

헬레나 : 라이센더, 그런 말 마세요, 그런 말 마세요. 그가 당신의 허미아를 사랑한다 해도 상관없잖아요? 여전히 허미아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니 만족하세요.

라이센더 : 허미아에게 만족하라구? 안 돼, 나는 후회하고 있어. 그녀와 함께 지냈던 지루했던 그 세월을. 내가 사랑하고 있는 여인은 허미아가 아니라 헬레나야. 검은 까마귀를 흰 비둘기와 바꾸는 것은 당연하지 않아?

 

 갑자기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 라이센더. 그렇게 꼬여버린 사랑 속에 네 사람이 모여 싸우는 장면은 황당하면서도 어쩜 이리 귀여운지.

 

허미아 : 또 작다고 하네! 키와 몸둥이가 작다는 타령뿐이구나. 나를 이토록 업신여기니 가만히 있을 수 없네. 요 계집애 맛 좀 봐라, 덮치자!

라이센더 : 꺼져라, 요 난쟁이야, 땅딸이, 꼬마, 콩알, 도토리.

 

 인간들의 사랑은 요정들의 장난으로 변덕스럽게 뒤바뀐다. 한 여름날 잠시 몽롱하게 다른 사랑에 푹 빠져버렸다가 이내 깨어나 원래의 사랑으로 돌아간다. 그들에겐 어찌되었든 행복한 일이다. 셰익스피어의 꿈같은 이야기 <한여름밤의 꿈>속에서 사랑은 지속된다. 현실도 마찬가지라면 소주 따위는 없어도 될 텐데.

 

디미트리어스 : 확실해? 우리가 깨어 있는 것이? 아직도 자면서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야.

 

 사랑에 대한 감정은 혼자만 생각하면 아주 낭만적이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 같기도 하다. 사랑은 누군가와 둘이하기 때문에 굉장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이어야 성공적인 사랑이 가능하겠지만, 뭐 어떤가 울적하게 혼자 즐겁게 낭만질 해보는 것도.

 

 ‘세상에도 희한한 광경이었어. 내가 본 꿈 말일세. 그 꿈이 어떤 꿈인지는 인간의 지혜로선 어림도 없다. 이 꿈을 해몽하겠다고 껍적대는 녀석들은 어리석은 당나귀 같은 놈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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