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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놈 - 23장에 담긴 인간의 자서전
매트 리들리 지음, 하영미 외 옮김 / 김영사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게놈』의 저자 매트 리들리는 나에게 꽤 익숙한 이름이다. 지금은 종영했는지 계속 방영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KBS 1TV에서 방영하던 ‘TV책을 말하다’를 즐겨보던 내가 그 프로그램에서 봤던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매트 리들리의 저서인 『이타적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서점에서 『게놈』을 살까 『이타적 유전자』를 살까 매우 많이 고민을 했다. 결국 몇 년 전부터 사고 싶었던 『이타적 유전자』를 버리고 독후감을 위해 『게놈』을 택했지만…….
도서 중에서도 문학을 좋아하는 내게 『게놈』의 서두는 대충은 이해가 가지만 꽤 머리 아픈 내용이었다. 그러나 1장을 읽고 나서 나는 새로운 앎의 행복에 겨워 잠시 눈은 감았다. 단 1장만으로 나를 이렇게 감격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책은 여태 읽은 책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저자는 크기 순에 따라 23개의 염색체를 배열하고 각각의 염색체에 인류의 본성을 부여하여 이것을 글의 전개방식에 이용하였다. 지금 내 몸 안의 하나의 세포가 40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정보를 기록한 방대한 디지털 암호 책이라고 생각하니 내 몸이 새롭게 느껴진 것 또한 사실이다. 분명 내 몸 속에 DNA는 처음 생물체인 루카 시절부터 겪은 모험이 기록되어 있을 테고, 그 후에 펼쳐진 진화의 역사들도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유전자 자체가 과거 행 타임머신이다. 또한 나의 DNA는 내 대로 끝나는 것이 아닌 내 후손에 의해 길이길이 전해지고 보존되어 미래의 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태어나는 것 또한 어떤 또 다른 세계의 영향을 받고, 그 업적에 따라 태어난다고 믿는 나에게 DNA는 또한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생명을 위한 것일지라도, DNA 조작을 통해 생명이 원래와는 다르게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신문과 텔레비전에 떠들썩했던 서울대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배양 성공문제이다. 물론 황우석 교수가 인간 복제라는 것에는 절대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병을 고치기 위해 기술을 이용할 뿐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은 황우석 교수의 입장이지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 아니다. 아직도 인간 복제라는 반인륜적인 문제에 대해 끊임없는 호기심과 실행의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지구촌에 널려있다. 이야기가 잠시 곁길로 샜지만, DNA 조작이라는 생각에서 조금만 나아가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문제이다.
제 2장인 2번 염색체 '종'은 꽤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침팬지와 사람의 유전자가 98%나 같다고 한다. 나머지 2% 차이로 인해 우리는 모든 생물의 종을 다스리는 종으로 군림해 있는 것이다. 그 2% 차이가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 것이다. 선택받은 2%를 가진 98%는 모든 종의 위에 우뚝 서서 만물의 영장이라 스스로 외치며 고도로 발단된 어떤 틀 속에서 종들의 암호를 캐고 있는 반면, 버려진 2%를 가진 98%는 선택받은 2%를 가진 98%가 만든 우리 안에서 선택받은 2%를 가진 98%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1장 생명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하나 찾았는데, ‘박테리아는 인류보다 고등 생물이다’라는, 처음 들으면 누구도 얼굴을 찡그리며 쳐다볼 이야기이다. 실제로 인간은 핵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유전자들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같은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하는 루카의 원시적 분자구조인 RNA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박테리아는 뜨거운 장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RNA 세계에 있던 도구들을 대부분 버렸다. “박테리아는 우리보다 ‘훨씬 더 진화한’ 형태이다”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6장의 지능에서는 놀라운 실험결과를 보았는데, 지능과 자라난 환경과 태어난 조건과의 상관관계이다. 같은 사람이 두 번 테스트한 결과 87%정도 나왔고, 일란성 쌍둥이가 같이 양육된 경우가 86%로 같은 사람이 두 번 테스트한 결과나 다름없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런데 정말 의외의 결과는, ‘같이 사는 입양아들’의 지능 상관 비율이 ‘떨어져 사는 상관없는 사람들’과 같은 0%라는 것이다. 피는 전혀 안 섞여있지만 자라난 환경이 같은데 어떻게 0%씩이나 나올 수 있는지 충격적이었다.
7장 본능을 폈을 때, 나는 예전에 <차인표의 블랙박스>에서 보았던 ‘짐승에게 길러진 인간 아이들’에 관한 내용의 프로그램에 나왔던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왼쪽 페이지에 ‘언어 본능’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띄는 가운데 오른쪽 페이지의, 로스앤젤레스의 한 아파트에서 오랫동안 사람들과 격리된 채 초라한 방에서 갇혀 지낸 13세의 제니 이야기가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짐승에게 길러진 아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말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위 이야기의 제니 양을 찾다가 그녀의 인터뷰 거부로 인해 결국 만나보지 못했던 TV 프로그램 담당자들이었다. 그 TV 프로그램에서는 ‘언어는 일정 시기를 지나버리면 아무리 노력해도 배우지 못한다’는 결과만 내놓았었는데, 『게놈』의 7장에서 언어 본능뿐만 아니라, 모든 본능에 대해 자세히 밝혀 놓았다. 바로 ‘많은 동물의 본능이 지닌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예민한 시기가 있고, 그 기간이 지나면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푸른되새는 일정 기간 자신과 같은 생물종의 노래를 들어야만 제대로 된 노래를 배울 수도 있으며, 사람도 아까 말한 ‘제니’의 사건을 통해 증명이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 아파트에서 오랫동안 사람들과 격리된 채 초라한 방에서 갇혀 지낸 13세의 제니가 알고 있는 단어는 “그만해”와 “더 없어” 두 마디뿐이었다. 예전에 TV에서 본 바로는 아버지가 그 곳에 가둬두어 아버지의 말을 듣고 따라 한 것이었다. 제니는 그 아파트에서 풀려난 후 많은 단어를 배웠지만 결국 문법을 활용하는 법을 익힐 수 없었다. 바로 ‘본능이 발현되는 민감한 기간을 지나쳤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눈여겨 본 부분이 바로 15장인 14번 염색체 ‘영생불멸’이다. 14번 염색체에 있는 TEP1라는 유전자의 산물인 텔로메라아제는 혹자의 말대로 ‘신비의 효소’이다. 텔로메라아제를 첨가하면 어떤 세포의 경우에는 영구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 몸도 텔로미어에 텔로메라아제를 언제까지나 주입할 수 있으면 어쩌면 영생불멸은 아니더라도 그 쪽에 가까워질 수 있지는 않을까? 지금 수명의 열 배는 살 수 있지 않을까?
16번 염색체인 ‘기억’을 통해서 나는 유전자와 자라온 환경의 관계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16번 염색체에 있는 학습과 기억을 관장하는 유전자들에 의해, 살아온 환경에 의해서도 인간이 바뀌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게놈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고 근사한 기계다. 만일 정량적 분석을 선호한다면 뇌는 수십억 개의 염기 대신에 수백경 개의 시냅스를 가지며, 무게는 마이크로그램이 아닌 킬로그램 수준이다. 기하학으로 표현하면 뇌는 디지털형의 2차원적이라기보다는 아날로그형의 3차원적 기계다. 열역학적 면에서 보면 뇌는 증기기관처럼 일할 때 다량의 열을 발생한다. 생화학자의 임장에서 뇌는 단지 DNA의 4개의 뉴클레오티드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수천 개의 다른 단백질과 신경전달물질을 포함한 다른 화학물질이 필요한 것이다. 참을성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게놈은 빙하보다 더 천천히 qkRNl는 반면에 뇌는 문자 그대로 시시각각 당신이 보는 동안에 새로 배운 기억을 만들어 내기 위해 시냅스를 변화하면서 바뀌게 된다. 자유의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경험이라고 하는 무자비한 정원사에 의해 우리 퇴의 신경망이 다듬어지는 것이 뇌의 적절한 기능에 필수적인 반면에, 게놈은 상대적으로 거의 유연성 없이 미리 정해진 메시지를 끝까지 연출해 간다.’라는 저자의 말은 나의 의문을 속 시원히 풀어주었다.
예전에 가끔 듣기만 하던 뜻도 모르는 단어, ‘게놈 프로젝트’. 이제야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23쌍의 염색체의 염기서열을 모두 찾아냈다는 소식이 얼마나 대단한 하나의 사건이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세포안의 까만 핵 속에 들어있는 DNA 유전자 정보. 이 내 몸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항상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해준 책 『게놈』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