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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블턴 시의 코비에게 - 2021 문학나눔 선정 도서 ㅣ 파랑새 사과문고 93
임태리 지음, 고정순 그림 / 파랑새 / 2020년 11월
평점 :
나는 엄마가 되지 못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는 지금 초등학교 1학생이 된 아들내미를 키우고 있다. 그 친구는 빌라에 산다. 그런데 친구의 말에 의하면, 아파트에 사는 어떤 학부모들은 아파트 외부에 사는 아이가 아파트 내부의 놀이터에서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고 하였다. 아니, 못마땅해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아파트 단지 학부모들의 단톡창에서 아예 외부 아이들이 놀이터로 놀러 오는 것을 금지시키자고 주장했을 정도라고.
이런 학부모들이 웜블턴 시에 살았다면 동화 속 주인공의 엄마처럼 코비 할아버지를 혐오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에도 코비는 있고 코비를 무조건 혐오하는 사람들도 있다. 빌라에서 산다는 이유로 아이가 차별을 받을까 봐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을 고려하는 나의 친구. 그 친구를 위해서라도 나 역시 내가 무심코 하고 있는 차별이 있다면 얼른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나의 경우, 장애인을 대하는 것이 어렵다. 나도 모르게 경직되고 장애인과 마주하는 것을 피하려는 나 자신을 볼 때가 있다. 이런 내 마음의 근저에 무엇이 있는지를 찬찬히 살펴보고 천천히 바뀌어 가야 할 것을 다짐해 본다.

위의 그림은 주인공의 엄마가 코비 할아버지에게 삿대질하는 장면이다. 코비 할아버지는 잘못을 하기는 커녕,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으로 어떤 행위를 했는데, 주인공의 엄마는 그것을 오해해 놓고도 미안하다는 말은 커녕, 코비 할아버지에게 면박을 주며 할아버지의 행위를 오해한 자신의 실수마저 코비 할아버지의 탓으로 돌린다. 나는 이 모습에서 나를 확인한다. 가령, 나는 나의 남자친구의 학력이 낮다는 이유로 남자친구를 은근히 무시하며 남자친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남자친구의 말이 옳았고 내가 틀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을 때, 그 때조차 나는 남자친구의 탓을 하곤 했다.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고, 나의 심정을 고려하지 않고 말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귀담아 듣지 않은 쪽은 나이며 잘못은 내게 있다. 차별의 주체가 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고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자꾸 상대방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것이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코비 할아버지가 꾸며 놓은 근사한 놀이터가 나온다. 할아버지가 간직한 동심이 그곳에 살아 있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린 아이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누가복음 18:16, 현대인의 성경)
But Jesus called the children to him and said, "Let the little children come to me, and do not hinder them, for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such as these. (Luke 18:16, NIV)
성경 말씀을 믿는다면, 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이는 광경이야 말로 천국의 광경이다. 그곳에는 어린 아이들이 신나게 놀 수 있는 미로공원, 정글짐, 통나무 구름다리, 짚라인이 있다. 가난하고 차림새가 허술한 코비 할아버지는 사실 더 중요한 것, 그러니까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에 성공했고 결국 천국의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동화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코비 할아버지의 평생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주인공의 엄마는 주인공을 데려가 행복한 하루를 선사한 코비 할아버지를 납치범으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코비 할아버지는 아무런 혐의도 없었고 심지어 선행만을 했기에 풀려나 버렸다. 그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주인공의 엄마도 변화했다.

웜블턴 시의 코비. 차별 받던 코비 할아버지가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은 한 아이와의 우정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우정은 그 아이의 용기 덕분에 생겨났다. 왜 저 사람은 차별 받을까? 라는 의문을 끈질기게 탐구한 아이. 차별 받는 대상에게 또 하나의 돌을 집어 던지는 대신 손을 내민 아이.
나는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떠오르는 기억 한 조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 짝꿍은 아버지가 청소부였다. 그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지만 그 사실을 입에 담는 친구들은 없었다. 조금은 못된 심보가 있었던 나는, 그 친구와 짝꿍이 되었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봤다. "너희 아빠 청소부야?"라는 나의 질문에 "응"이라고 대답하며 약간 얼굴을 붉히던 그 아이의 얼굴이 생각난다.
한번은 그 아이가 나에게 "오늘 우리 가족 고기 먹는다~"라고 설레는 듯이 자랑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자랑을 듣고 '우리 가족은 맨날 고기 먹는데'라고 생각했고 집에 가서는 부모님께 그 이야기를 전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아빠는 크게 웃으셨다. 그 때 아빠의 웃음은 짝꿍의 가난을 비웃는 것이었다기 보다는, 당신께서 우리 가족을 윤택하게 부양하고 있다는 자긍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 때, 아빠가 활짝 웃는 대신 조금은 조심스럽게, 그 아이의 집안 형편이 우리보다 어렵다고 해서 그 아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사람은 가난하든 부유하든 모두 똑같이 보배로운 존재들이며, 우리 역시 가난을 겪을 수 있는 것이라고 (실제로 IMF 때 우리 집안은 형편이 어려워졌다) 나에게 얘기해 주셨다면, 나는 조금은 더 일찍 가난을 이해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도 생각해 본다.
코비는 멀리 있지 않다. 나 자신이 코비일 수 있다. 비교를 시작하면 누구나 남들보다 못한 점이 있다. 우열을 가려서 열등한 점을 부각시켜 바라보며 그 열등함을 차별의 근거로 삼아 버린다면, 우리는 사실 나치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도 그랬다. 미워하는 것은 살인과 같다고. 상대방을 혐오하는 것은 상대방을 죽이는 일이다. 이 점을 기억하게 해 주고 가벼우면서도 섬세하게 일깨워 주는 <웜블턴 시의 코비에게> 감사를 보낸다.
